제24호 2014년 봄 살림,살림

[ 아이살림 ]

빨간 머리 앤처럼 이름 짓기

글\사진 신순화

 

‘이름’이란 참 신비하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 같 다. 이름을 통해 우리는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선택한다. 이전과 다른 의 미가 생겨난다. 그야말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꽃이 되어 다가온다. 존 재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어제와 다름 없는 일상을 끝없이 새롭게 만드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소설 《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 앤은 이름이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알고 있 었다. 앤은 좋아하는 대상에게 자기만의 이름을 붙여준다. 앤이 매튜 아저씨를 처음 만나 양옆에 사과꽃이 만발한 길을 지나는 장면이 있다. 가로수 길이라고 불리는 그 길에 앤은 ‘환희의 하얀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연못 ‘배리 못’은 ‘빛 나는 호수’라고, 벚나무는 ‘눈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제라늄 화분도 ‘보니’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오랜 아파트 생활을 끝내고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모든 것이 새로웠다. 집들이 모두 다르게 생겼고 어느 길 하나 반듯하거나 똑바르지 않았으며 어딜 가나 꽃들과 나무와 새가 있었다. 거실에서도 저수지의 눈부신 물빛이 내려다보였고 집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린게이블즈에 도착한 앤이 된 심정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기에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근사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에게 새로 만나는 모든 것들에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자고 제안했다.

 

“나무든 꽃이든 건물이든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새로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면 그 대상과 친구가 되는 거래. 집처럼 생명이 없는 것들도 근사한 이름을 지어 아껴주면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마음에 드는 나무가 있다면 너희들의 나무로 정해도 좋아.”

 

써니데일 13번가 위쪽 금이가 있는 빌라빌라콜라

우리가 살게 된 2층집은 이미 ‘삼락재’라는 이름이 있었다. 교직에 오래 몸담았던 집주인이 맹자의 ‘군자삼락’에서 빌려온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는 ‘빌라빌라콜라’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말괄량이 삐삐’가 사는 ‘뒤죽박죽 별장’에서 따온 것이다. 아이들이 어지른 물건들로 정신없는 집안 풍경이 그야말로 뒤죽박죽 별장과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삐삐가 되어 온 집안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집 쪽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오면 낡고 쓰러져가는 농가주택 한 채가 나오는데 아무도 안 사는 이 집에 ‘써니데일 13번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톰과 제리>에 나오는 마녀가 사는 집 이름이다. 아이들은 “써니데일 13번가다. 마녀님, 안녕? 오늘은 톰이 말썽 안 부렸나요”하며 깔깔거리곤 한다.

 

집 근처 나무에도 이름을 지었다. 키가 큰 전나무를 ‘금이’라고 불렀고, 은행나무는 ‘은이’가 되었다. 산비탈에 자란 단풍나무는 ‘단이’, 그 옆에 조금 작은 단풍나무는 ‘풍이’가 되었다. 아들은 잠자리에 누워서 어두운 숲속을 향해 “금이야 잘 자. 은이야 잘 자. 단이도 풍이도 잘 자.” 하며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러면 곁에 누운 두 여동생들도 오빠를 따라 나무들에게 밤 인사를 건네느라 한바탕 즐거운 소동이 일었다.

 

새로 이름을 붙여줄 대상들이 너무나 많았다. 집 안에서는 벌레들이 기어 나왔고, 집 밖으로 나오면 새며 나비며 날아다니는 벌레들이며 신기한 것들이 가득했다. 생김새가 특이하거나 같은 곳에 자주 나타나는 벌레들에게는 어김없이 이름이 붙었다.

 

주방 천장 구석에 꽤 큰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따금 거미줄을 타고 바닥까지 내려와 깜짝 놀라게 한다. 아이들은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어마어마하게 큰 거미의 이름을 따라 ‘아라고그’라고 불렀다. 이름을 붙인 다음부터는 거미가 천정에서 내려올 기미가 보일 때마다 “아라고그, 그냥 거기 있어.”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정말 내려오려다가도 다시 기어 올라간다. 아이들은 아라고그가 말을 잘 듣는다고 좋아한다. 얼마 전엔 이웃집에 강아지 두 마리가 새로 태어났다.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오래 의논하더니 ‘알투, 디투’라고 이름 지었다.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 이름이다.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마음을 기울여 대상을 오래 살펴보게 된다. ‘어떤 이름이 잘 어울릴까? 어떤 특징이 이름이 될까’를 궁리하는 동안 눈앞의 대상이 마음에 성큼 들어온다. 이름을 지어주면 새 존 재를 탄생시킨 듯한 뿌듯함과 기쁨이 차오른다. 이름을 지은 것들은 더 이상 징그럽기만 한 벌레나 들쥐, 늘 거기 서 있기 마련인 나무만이 아니다. 특별하고, 근사하고, 소중한 친구가 된다.


닭장을 만들고 어항이 들어오고 새장이 생기고 처음 보는 들꽃을 만날 때마다 아이들은 이름을 짓느 라 머리를 맞대곤 했다. 못 보던 새가 나타났다고 도감을 찾다가 책에 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냥 제 귀에 들리는 새소리를 따라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삐이삐이 새’와 ‘호드득 새’가 생겼고, ‘쎄엑 쎄엑 우는 매미’도 생겼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롭고 놀라운 생명들이 우리 앞에 나타났고, 이미 만났던 것들을 다시 보는 즐거움도 컸다.

 

이름을 지어 주는 대상이 늘어날 때마다 친구들이 많아졌다. 어딜 가나 이름을 불러줄 무언가가 곁에 있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친구들 때문에 몇 번 이나 차를 세워야 한다. 둔대 경로당을 지나면 개를 키우는 곳이 있는데 그 개 중에 제일 큰 알래스 칸 맬러뮤트에게, 아이들은 병으로 우리 곁을 떠난 개 ‘해태’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해태를 보러 가 는 길은 ‘해태길’이 되었다. 처음엔 사납게 짖었지만 짖던 개도 이제는 우리가 ‘해태야’하고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문으로 뛰어온다.

 

이름을 짓는 것은 마음을 주는 일이다. 정을 주면 미운 것이 없다. 어떤 대상과도 친구가 된다. 애정 을 나누는 존재가 가득한 세상이란 얼마나 근사한가? 단지 이름을 지어 주는 것으로 아이들을 둘러 싼 세상에 따스함이 더해진다. 마법 같다.

   

809호 아닌 속달마을에 산다

예전엔 마을마다 집집마다 이름이 있었다. 개울도 다리도 들판도 어느 하나 이름 없는 것이 없었다. 생김새대로, 내력과 사연대로, 존재들은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없었다. 새터와 배나무골, 감나무집, 탱자나무길 같은 이름들은 얼마나 정겨운지. 이름도 어려운 브랜드 아파트의 동과 호로 부르는 공간에 있다 보면 자연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파트 단지는 어디나 다 비슷하고, 모든 것이 반듯이 정비되어 있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206호에 살거나, 809호에 살았다. 이름 대신 번호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번호를 부르다 보면 나도 숫자가 되는 것 같았다.

 

아파트를 떠나면서 나는 ‘속달마을’ 사람이 되었다. 우리 마을을 지나면 ‘납덕골’이 나오고 ‘안골’도 있고, ‘둔전마을’도 있다. 마을에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데, 우리에겐 이미 정해진 이름 말고도 우리가 새로 이름 붙이고 부르는 무수한 대상들이 있다. 특별한 친구가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 없이 바깥 풍경에 눈길을 주는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먼 곳에 갔다가 마을에 들어서면 마음이 벌써 설렌다.

 

“엄마, 해태길로 가요. 해태에게 인사하게요.”, “노랑이가 그새 또 컸어요.”, “금이야, 은이야 집 잘 지켰니”. “앵두야, 오디야, 겨울아, 여름아, 잘 지냈어”, “뽀롱아, 아롱아, 뽀로로야, 진돌아, 누렁아, 복실아, 까망아, 방울아.” 아이들은 수많은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건넨다. 별다른 것 없는 풍경에서 많은 친구들과 인사를 하는 것이다. 전철역까지 갈 일이 있으면 한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아이들이 ‘짜장로드’라고 이름 붙인 산길로 걸어 다닌다. 언젠가 뜨거운 여름, 힘들게 그 길을 넘어 시내에서 맛난 짜장면을 먹고 온 뒤로 그 길은 짜장로드가 되었다.

 

이렇게 모든 이름에는 사연이 있고 역사가 있다. 행복하고 즐겁고 가슴 짠한 추억이 있다. 그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고, 이야기가 되는 우리만의 보물이다. 어린 날엔 친구가 많아야 한다. 게임기와 휴대전화, 텔레비전 말고 내가 애정을 기울이는 대상이 많을수록 따듯하게 자랄 것이다. 자연에서, 나를 둘러싼 사물에서 애정을 기울일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어떤 삶이라도 외롭지 않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관계가 풍성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 나무 한 그루, 벌레 한 마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이면 그 아이 곁에는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가 늘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이들과 산책을 하며 이름들을 부를 것이다. “해태야, 금이야, 은이야, 단이야, 풍이야. 고마워, 사랑해.”

 

↘ 신순화 님은 필규, 윤정, 이룸 세 아이와 하루하루를 신나게 보내고 있는 엄마입니다. <한겨레> 육아 전문 사이트 ‘베이비 트리’와 개인 블로그에 행복한 출산과 육아에 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두려움 없이 엄마 되기》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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