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호 2013년 겨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

발전은 선인가?

글 유해정

‘발전’을 국어사전의 정의처럼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이라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발전의 부작용으로 빈곤과 불평등,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을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재앙 수준의 폐해가 있어도 발전에 대한 믿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여전히 발전은 한 나라의 문제, 지구 전체의 문제를 해결해줄 강력한 주문이기 때문이다.

 

이때 주목할 사실은 발전 피해자들이 애용하는 인권담론 역시 발전과 경제성장을 옹호한다는 점이다. 인권담론은 자원의 쓰임새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는 권리들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며, 경제성장을 통해 자원부족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모든 권리를 지속적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인권은 정의와 형평의 실천을 제1원칙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현재의 발전 과정에 비판적이지만, 속내야 어찌됐든 발전 옹호자들 역시 빈곤퇴치와 사회발전, 개인의 자유 증진 등을 명분으로 내걸고 달려왔다. 그런 점에서 인권이 발전과 경제성장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인권진영 내에서 발전과 인권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착한 발전’을 넘어 “발전과 인간 존엄성이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질베르 리스트 지음 /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펴냄 / 2013년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자본주의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해온 발전사관

 

스위스의 발전전문가이면서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의 저자인 질베르 리스트는 발전이 “서구의 긴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유구한 전통”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발전사관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자연스러움), 성장과 동일시되어 사유되다가 4세기에 와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직선적인 역사관으로 개진된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진보, 사회진화론과 결합하면서 지배적인 힘을 얻는다. 사회와 지식, 부의 발전을 매우 당연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 산업혁명, 자본주의 사조가 매우 자연스럽게 조응하면서 발전은 근대 서구를 관통하는 사상이 됐다. ‘진보’, ‘문명화’, ‘개화’라는 논리로 서구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했고, 전후 새롭게 제기된 사회질서 속에서 발전을 전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 이상으로 제시했다.

 

이때 분명히 할 점은 서구의 발전사관을 비판했던 사상과 체제조차도 발전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리스트에 따르면, 민중의 주체적 시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해명하려 했던 종속학파도 “그저 다른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동일한 형태의 발전을 제안하는 데 만족했다. (중략) 그들이 도출해낸 유일한 결론은 ‘발전’이 가로막혔다는 것이며, 주변부가 스스로의 ‘자연적’ 과정을 따랐다면 가로막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제3세계’가 내세운 신국제경제질서 역시 서구의 발전사관을 답습했다. 이들이 국제질서를 비판한 이유는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빨리 부유해지는 데 국제질서가 따라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이고 인식론적인 통찰을 통해 리스트는 발전이 전 세계적인 신앙이자 종교로 성장해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우물과 도로를 건설하고, 숲과 간척지를 개간하고, 공장을 세우고, 임금노동을 다양하게 만드는 등 모든 현대적 활동에 발전이라는 이름표가 붙으면서 “발전은 여전히 더 나은 삶에 대한 보편적 소망의 표현”으로, “종국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귀결되리라는 추정에 근거”해 하나의 신앙으로 설파되고 맹신되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속성은 무엇일까? 열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근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실행된 발전의 외형적 특징과 현상에 기반해 살펴본다면, 발전은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자연환경과 사회적 관계를 전반적으로 변형하고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성적표를 떠나 이것이 발전의 본질이다. 리스트의 논리가 옳다면, 원조가 아닌 교역으로 제3세계의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공정무역은 발전 신앙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발전을 통해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겠다는 인권의 발상은 얼마나 공허한가?

 

거대한 역설: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
필립 맥마이클 지음 / 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 / 2013년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에 심취한 서구가 식민지에 모델로 제시

 

미국의 국제개발 전문가 필립 맥마이클은 《거대한 역설》에서 발전을 “통치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규정한다. 발전은 “일종의 정치적 구성물로서 식민지배 본국(종주국), 정치·경제 엘리트, 다자간 국제기구 등 지배적 행위자들이 세계 질서를 수립하고 그 질서에 대한 반대를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맥마이클은 통치 프로젝트로서 발전의 뿌리를 서구의 식민지배에서 찾는다. 당시 유럽은 리스트의 주장처럼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에 심취해 서구가 성취한 발전의 내용, 즉 지식의 구축 및 기술의 변화, 자본주의 및 산업화 등을 식민지 국가들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모델로 제시했다. 서구는 “백인이 져야 할 짐”이라는 말로 식민지배를 숭고한 과업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식민지 국가에서 수행된 발전은 식민지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주민들을 서구의 지배에 종속시키거나 주변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발전이 국가의 공식적인 프로젝트가 된 것은 20세기 중반 탈식민화의 물결 속에서였다. 1949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취임연설을 통해 전 세계는 발전국과 ‘저발전국’으로 양분됐다. 식민지가 본국에 종속되었던 것과 달리, 발전과 저발전의 이분법하에서 모든 국가는 동등해졌다. 이제 남은 일은 저발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식민관계에 따른 불평등과 책임은 자치국가라는 이상 속에서 방기되었다. 국가가 시민들의 존엄과 복리를 충족해야 한다는 시민권 구상이 등장하고, 발전을 계량하는 국민총생산지수 등이 개발되면서 발전은 모든 국가와 국민을 통치하는 프로젝트로 성장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면 발전은 지구화 프로젝트로 변모한다. 지구화 프로젝트의 핵심원칙은 자유로운 세계시장의 실현에 있는데, 이 과정에서 발전은 ‘자원의 배분자로서 시장의 확대’라는 의미로 새롭게 규정됐다. 세계경제라는 슬로건하에 국가경제가 개방됐고, 공적 영역이 시장화됐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 발전은 ‘지속가능성 프로젝트’로 재탄생한다. 식량 위기와 빈곤, 불평등과 실업, 환경 파괴의 위협 등에 맞서 사회적·생태적 회복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가 시장의 번영을 위한 명분에 그칠지 아니면 발전의 궤도를 수정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금도 힘겨루기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발전은 특정 세력의 분명하고도 정확한 정치·경제적 의도와 목표 속에서 추진되어 온 프로젝트였고, 여기에 사회주의와 남반구도 공모했다.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한 기획에 ‘모두의 풍요’라는 희망이 뒤섞이고, 지구의 상층계급이 소비를 통해 풍요를 경험하면서 발전은 무조건적인 복종과 믿음을 요구하는 전 세계인의 종교로 성장했다. 하지만 발전은 생활조건의 향상과 환경 악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역설이다. 발전할수록 불평등해지는 역설이다. 가난한 이가 더 많은 희생을 요구받는 역설이다. 개인의 자유를 약속했으나 오히려 시장에 종속시키는 역설이다. 삶의 독립과 자율을 약속했으나 시장과 국가의 종속과 간섭을 강화하는 역설이다. 발전은 누군가를 위해 한정된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인간을 상품화하고 사회와 자연을 파괴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을 거치더라도 발전에 대한 개종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리스트가 발전과 관련해 가장 어려운 과제가 바로 “지식이 신앙을 이겨내도록 만드는 것이며, ‘발전’ 이후에도 삶이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이라고 말했을까? 사실 발전은 선 자리, 서고 싶은 자리의 문제다. 엄청난 불평등과 환경폐해 속에 도래한 풍요의 자리에 서서 발전을 바라보기에, 그래도 발전이 일말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지금 누리는 혜택과 안락을 포기하기 쉽지 않아 ‘대안이 없다’고 망설이는 것이다. ‘그’도 가능했기에 ‘나’에게도 삶의 풍요와 편의가 주어질 거라는 희망에 오늘의 삶을 저당 잡히고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다. 하기에 발전과 결별하기는 나의 욕망을 끊어내는 일이며, 그러려면 소박한 삶의 불편함과 고단함을 자처하는 용기와 실천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용기와 실천은 오로지 나만의 몫일까? 내가 바뀌면 정말 세상이 바뀌는 걸까?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M. 영 지음 / 허라금, 김양희, 천수정 옮김
이후 펴냄 / 2013년

 

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적인 책임과 우리를 바로잡는 정치적 책임

 

‘지금처럼 살지 않겠다’고 어렵게 결정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결별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미국의 사상가 아이리스 영은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에서 현실은, 우리가 일상적이고 합리적으로 하는 행위가 의도치 않게 기존 질서에 기여하고 누군가를 착취·배제하게끔 이미 구조적으로 촘촘히 설계되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소비와 쓰레기가 분리된 세계 속에서 타인과 생태에 대해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물건을 사고 팔고, 학교나 직장을 선택하고, 집을 세놓거나 구하는 등 일상의 모든 행위들이 “일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특권적인 기회를 주는 행동으로 구조적인 제약을 생산함으로써 간접적이고 집단적으로, 그리고 누적적으로 부정의에 기여”한다. 1+1 혹은 저가물건을 사는 것이 노동착취로 이어지고,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면 소규모 상인의 삶에 타격을 주듯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부정의를 늘 성찰하고 이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영에 따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책임’이다. 법적인 책임이 명확한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하고 비난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책임은 부정의의 생산/재생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행위를 되돌아보고 바로잡을 책임을 의미한다. 정치적 책임은 잘못의 경중을 따지고 서로를 비난하기보다는 미래에도 지속될 수 있는 부정의한 구조를 변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는데, 이때 책임은 동료 시민과 공유되어야 한다. 즉 내가 개인적으로 혼자 지는 책임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그 책임을 진다는 걸 자각하고 지는 책임”이며, 동시에 “태도보다는 행동을 통해 만들어낸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책임이 “다른 이들과
함께 집단행동에 나설 때에만 면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 구조와 제도, 관행을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권활동가 류은숙은 《사람인 까닭에》에서 이런 함께함을 ‘연대’라고 명명한다. 인권활동가로, 식당노동자로 살고 있지만 때론 부정의를 고착시키는 소비자로, 운동판에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일처리를 추종해온 활동가로 살아온 삶을 고백하며 “우리는 다 서로를 이용하며 배신하며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상의 배신을 “사는 게 다 그런 거야라는 찌질함으로 퉁치지 않고 반성하고 다시 시도할” 때 비로소 연대가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공감’, ‘개인들을 괴롭히는 문제의 뿌리에 대한 인식’, ‘공감과 인식에 기반을 둔 실천’이라는 연대의 공식은 책에서만 이해되는 미션 임파서블일 뿐이라고 일갈하는 류은숙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통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어 보라고 제안한다. 사람을 만나다보면 열매만 챙기려는 얌체들에게 상처받고 분노하기도 하겠지만 “만나서 부딪치다 보면 어쩌다 한 번 ‘번쩍’ 불꽃이 일 만한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더불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만남도, 고립도 계산하는 시대에 이러한 처세술에 도전하는 것으로부터 다른 삶이 시작될 수도 있다.

 

사람인 까닭에
류은숙 지음 / 낮은산 펴냄
2012년

 

둥글게 모여 앉기부터 시작하자

 

아프리카에서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고아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는 발전의 정점에 서 있으나 가장 빈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은 상품이 되었고, 인간관계와 자연 역시 화폐로 환산되어 인간은 시장에서 벌거벗은 고립된 개인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발전에 대한 개종은 인간을 고유한 인간으로 되돌리는 일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모두 둥글게 모여 앉아야 한다. 노동력과 상품,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고유한 인간으로서 타자에게 보이고 들리는 경험을 만들고, 자본이 침투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바로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물론 이런 실험들이 항상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그 동안 우리 집이 애용하던 생협은 인건비와 냉장차 유지 등 비용 문제 때문에 공급을 외주화했다. 필요한 노동을 직접고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며, 공급자와 나누던 대화가 사라지니 생협에 대한 소식을 소식지로만 듣게 된다. 새벽 6시고 밤 10시고 물건을 놓고 사라지는 외주공급 속에서 우린 조합원이 아니라 소비자가 됐다. 동네 다른 생협 매장을 이용해보지만 매장 안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물건과 가격에 관한 것들뿐이다. 여기에 생협의 가치와 운동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물론 만남이 없으니 관계라고 할 것도 없다. 더 가난해지는 것만이 남았다. 하지만 절망에 허우적거리기보단 계속 둥글게 모여 앉기를 시도하는 게 더욱 현명할 듯 보인다. 설령 비틀거림의 연속일지라도 질문을 통해 또 다른 관계를 만들고 미래를 만드는 일이 종교의 열망에 기대는 것보단 나으니 말이다.

 

유해정 님은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로, 10년 넘게 인권운동의 언저리에 있었으나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야 비로소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공적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인권이 개인이 아닌 ‘관계’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인권 전령사’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삶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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