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호 2013년 겨울 살림,살림

[ 살림이 본 영화: 헝거게임: 캣칭파이어 ]

치사해서 더 무서운 생존게임

글 송경원

얼마 전 책을 빌릴 일이 있어 다녔던 대학의 도서관을 찾아갔다. 시험기간이 아니었는데도 이미 만석이라 앉을 곳이 없었다. 필요했던 책 말고 몇 권의 SF소설도 덤으로 빌려서 집으로 오려다가,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어 학생들의 책상 위를 슬쩍 둘러봤다. 영어책, 수학책, 그 사이로 가끔 보이는 문제집. 그 넓은 도서관에서 도서관에 꽂힌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묵묵히 수험공부를 하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예전 고등학교 교실이 생각났다. 시키니까 당연한 듯 공부하던 시절. 지금 이 학생들에게는 누가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고 말해줬을까? 취업난이 심각하다더니 다들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구나, 남들이 다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곤 이내 그 풍경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양 잊고 살았다. 얼마 후 <헝거게임: 캣칭파이어>를 본 후 극장의 어둡고 긴 복도를 빠져나오는 내내 그때의 도서관 풍경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매일 쏟아지는 부조리를 뉴스에서 접하면서도 우리는, 그때 그 학생들은,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유치하고 어설픈 영화인 줄 알았는데


<헝거게임>은 동명의 SF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3부작으로 출간된 수잔 콜린스의 소설 《헝거게임》은 사실 그리 진지하거나 무거운 작품이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트와일라잇》으로 대표되는 미국 영 어덜트 소설에 속하는 내용으로 판타지적인 설정, 이 경우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빌려와 한 소녀와 그를 사랑하는 두 남자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이런 식의 영 어덜트 소설이 판타지나 SF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중요한 건 한 여자가 ‘어장관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지 세상 돌아가는 꼴이나 복잡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과 멀어질수록 그들의 연애는 극적이고 달콤해진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 낀 소녀라니, 얼마나 매혹적이고 비현실적인가? 소설 《헝거게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고 아무도 반항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아 완벽하게 통제되며, 통제수단이란 게 겨우 각 지역의 대표를 선발하여 공포심을 심어주는 ‘헝거게임’이라니 이 정도면 설정이 유치하다고 해도 달리 변명할 말이 없다. SF소설 팬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병풍 삼아 쓴 달콤한 로맨스 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2012)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납득하고 넘어가자는 각오가 없는 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어설픈 설정이 못내 불편했다. 애초에 헝거게임이라는 통치방식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허술한가 말이다. 반면 1편에 호의적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이 영화의 설정이 허술하기 때문에 반대로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녀의 투쟁이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고 지적했다. 분명 동의할 여지가 있는 분석이긴 하다. 영화화된 <헝거게임>은 로맨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본영화 <배틀 로얄> 같은 생존게임에 가까웠고,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소녀의 투쟁은 참신한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름의 개성을 선보였다. 적어도 할리우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배우 제니퍼 로렌스의 몸을 빌어 재현되는 생생함만은 박수쳐줄 만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을 즐길 수 없었다. 공감의 통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연애감정으로 접근하기엔 영화가 생각보다 무거웠고, 그렇다고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는 디스토피아 영화가 되기엔 깊이가 한참 모자랐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영화가 되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생존할 것인가? 대의에 몸을 던질 것인가?


그런데 2편인 <헝거게임: 캣칭파이어>를 보고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장르영화의 재료와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이 작품 속에서 혁명의 기운을 느꼈다. 장르를 전복하거나 독특한 형식이 있거나 혁명적인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헝거게임> 시리즈처럼 기획된 블록버스터 영화는 정해진 틀과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선보이는 어떤 방향성, <헝거게임: 캣칭파이어>의 경우를 두고 표현하자면 원작의 인력을 벗어날 순 없을지언정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고자 하는 방향성이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요컨대 이번에는 이 영화에, 메시지에, 주인공들의 몸부림에 공감했다.


전작에서 헝거게임에 우승한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살인을 저지른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도 각 지역의 대중들은 지배계급인 캐피톨에 반항한 캣니스를 혁명의 상징으로 여기고, 중앙에서는중앙 나름대로 캣니스와 가족을 위협하며 헝거게임의 홍보를 위해 캣니스를 끌고 다닌다. 하지만 혁명의 기운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결국 대통령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역대 우승자들만의 특별 헝거게임을 개최한다. 캣니스는 다시 한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이제 단순한 지역 대표가 아니라 혁명의 불꽃이 되어버린 그는 또 다른 음모 속에 놓여 있다.


영화의 과제는 헝거게임이라는 시리즈의 포맷 안에 어떻게 다시 한번 캣니스를 끌어들일 것인가에 달렸다. 이를 위해 영화는 혁명에 대한 담론을 고민하는, 좀 더 정치적인 해석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개인적인 차원의 생존을 고민하는 캣니스와 이미 하나의 의미가 되어버린 그를 이용하려는, 혹은 그에게 기대를 거는 대중의 움직임은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충돌과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생존에의 욕구를 따를 것인가,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질 것인가? 누군가의 대의가 나의 대의가 될 수 있는가? 애초에 대중의 열망, 대의란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이미 영화는 로맨스 중심이던 원작의 정서와 결별한다.



눈앞에 빤히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정의


사실 이 영화는 선동적인 영화는 아니다. 혁명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내용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이 영화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당위의 영역에 있다. 극심한 빈부격차, 확실하게 구분되는 선악의 대립구도. 누가 정의의 편인지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순한 동화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러한 혁명의 메시지 자체를 담아내려 했다면 유치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애초의 목적이 혁명 서사가 아닌 까닭에 영화는 그런 단순한 주장을 밀어붙이진 않는다. 그런데 로맨스 서사로서의 정체성과 이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결과가 발생한다. 눈앞에 빤히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정의, 너무도 선명하지만 짐짓 아무도 모르는 척 진행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묘하게 지금 우리의 현실과 겹쳐 보이는 것이다. 개인적인 행복(혹은 생존)과 혁명의 대의(혹은 타인의 희생) 사이에서 고민하는 캣니스의 모습은 매우 단순해서 역설적으로 복잡하게 싸여 있는 현실의 껍질을 벗겨버린다.


영화 속 가상의 세계관에서는 명확한 대립구도와 선악의 구별을 위해 단순화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왜 눈앞의 부조리를 보지 못할까?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인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문제는 모르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당장 내가 나서서 할 수 없기에, 용기가 부족하기에 도리어 적극적으로 뒤틀린 구조에 몸을 맞춘다. 열심히 살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안고, 그것이 거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 채 지금의 불행은 단지 내가 게으른 탓이라며 자발적으로 체제의 노예가 된다. 남을 짓밟고 승리한 첫 번째 노예에게 주어지는 한 줌의 영광, 개인적인 성공을 차지하기 위해 오늘도 도서관에서 고개를 숙이고 하루 18시간씩 공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땅의 청춘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처음에 볼 땐 유치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헝거게임이, 공포로 대중을 학습시키는 그 방식이 21세기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있음을 현실을 잊고 시간을 때우려 찾아간 극장에서 알게 된다.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헝거게임을 끝낼 현실 속의 캣니스는 등장할 것인지, 영화가 끝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 되새김질 중이다.



디스토피아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브이 포 벤데타>(2005)를 추천한다. 자유와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영원한 고전 <메트로폴리스>(1927)도 좋겠다. 헝거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내 발버둥 치는 제니퍼 로렌스를 보고 나니 최근 화제가 된 산드라 블록 주연의 <그래비티>도 생각난다. <올 이즈 로스트>(2013)의 로버트 레드포드도 있다. 그래, 결국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 송경원 님은 영화평론가이자 <씨네21>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쓰는 만큼 즐거워질 거란 믿음으로 오늘도 쉬지 않고 영화 관람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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