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 2013년 가을 살림,살림

[ 살림이 본 영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

열차는 모두를 싣고 달린다

글 송경원

논쟁적인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단순하고 직선적인 영화에 가깝다. 그럼에도 <설국열차>는 봉준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작으로 보인다. 아니, 올 한 해 개봉한 영화들을 놓고 살펴보아도 이만큼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져 나온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경탄, 호의, 기대, 실망, 위안까지 영화를 보고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반응이 이 영화 주변에 모여 있다.



직진하는 기차의 에너지를 닮은 영화


<설국열차>는 근래 보기 드물게 지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시나리오 공식에 매달린 할리우드 상업영화 가운데에서도 확연히 구분 가능할 만큼 눈에 띄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문제는 영화를 평가하는 데 있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화 이외의 것이 지나치게 많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이 뒤에서 앞으로 직진하는 기차의 에너지를 닮으려 한 영화다. 때문에 지적인 고민들을 근간으로 출발하지만 문제의 해결책은 자못 단순하고 분명하다. 제목 그대로 기차의 직선운동을 닮고 싶었던 영화다.
그런데 지금 성패를 측정하기에는 기차에 초대받지 않은 탑승객이 너무 많이 탄 모양새다. CJ가 400억 원을 투자했으니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얼마의 관객이 들어야 한다느니, 대부분 국내 자본이 투자되었으니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라 한국영화라느니, 봉준호의 전작들에 비해 지역적인 정서가 약해졌다느니 말들이 많다. 어떤 지점에서는 유효한 논쟁들이지만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들이 그런 외부적인 기준에 따라 영화를 판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죽하면 주연배우 틸다 스윈튼이 내한해 가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제 국적에 관한 질문은 그만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스윈튼의 말대로 예술에는 경계가 없다. <설국열차>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거추장스런 애국 프레임이나 경제 논리를 빼고 영화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결이 풍성한 영화다.



열차라는 닫힌 공간 속에 펼쳐진 상상력


영화는 긴 내레이션과 함께 문을 연다. 지구온난화로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자 인류는 CW-7이라는 물질을 대기권에 쏘아 올려 지구의 온도를 낮추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섣부른 지혜는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켜 과하게 작용한 CW-7의 효과 때문에 지구는 제2의 빙하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생물이 얼어붙은 죽음의 세계 위를 달리는 단 한 대의 열차가 있다. 윌 포드(에드 해리스)가 설계한 열차는 일 년에 한 바퀴씩 지구를 돌며 무한의 원을 그린다. 그것이 벌써 17년째, 영화는 열차라는 폐쇄된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단순하게는 환경 재앙이 불러온 디스토피아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에 관한 영화로 요약할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틀린 애기는 아니다. 빙하기의 날씨를 피해 꼬리 칸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은 좁아터진 열차 안에서 단백질 블록에 의지해 근근이 살아간다. 반면 열차의 원래 승객인 앞 칸 사람들은 각종 향락시설을 즐기며 화려한 삶을 누린다. 열차의 관리자이자 2인자인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꼬리 칸의 승객들을 무릎 꿇린 채 말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으니 불만을 품지 말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엔진을 숭배하라고. 빈부격차 아니 신분격차라 불러 마땅할 차별은 기차의 칸이라는 공간을 빌려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스템이란 이름의 닫힌 사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본질적으로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부조리. 다만 영화는 ‘기차’라는 폐쇄 공간을 활용해 이를 선명하게 시각화했을 뿐이다. 도식적으로 보일 정도의 계급갈등, 사회의 축소판이 이 영화에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요컨대 <설국열차>는 꼬리 칸에서 시작한 혁명이 엔진 칸까지 도달하는, 시스템의 전복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시스템에 대한 노골적인 우화가 뼈대라면 실제로 관객이 맛보는 살점은 열차라는 공간을 재현하는 상상력, 그리고 앞으로 돌진하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각양각색의 드라마다. 꼬리 칸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 그들이 먹고 사는 단백질 블록의 정체, 열차의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각 칸의 기능은 열차라는 상상력의 공간을 통해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며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꼬리 칸의 혁명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일행이 혁명을 통해 각 칸을 통과할 때마다 펼쳐지는 신세계의 풍경은 그 광경을 함께 접하는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열차 안 수족관, 알록달록 기이한 교실, 향락에 찌든 상류사회의 모습을 상상해서 표현한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 그 자체인 셈이다. 이는 SF영화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으로, ‘공간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가 곧 메시지이다.








관객이 함께 만나게 될 또 하나의 보석은 돌진하는 드라마 사이사이의 빈틈을 메워주는 캐릭터들의 깊이다. 혁명가 커티스, 2인자 메이슨, 꼬리 칸의 성자 길리엄(존 허트), 열차의 지배자 윌 포드 등 열차의 시스템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캐릭터 자체의 매력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이를 연기한 배우들의 아우라 덕분일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설국열차>의 성취를 논할 때 캐릭터의 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다는 점이다. 커티스는 왜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지, 길리엄이 꼬리 칸의 성자가 된 사연은 무엇인지, 2인자 메이슨이 그토록 충성하는 위대한 엔진의 비밀은 어떻게 밝혀질 것인지, 윌 포드가 바라는 영원한 시스템의 비밀은 무엇인지 등 열차를 둘러싼 모든 의문은 각 인물들의 사연과 정교하게 교차하며 들끓는 드라마를 만들어 나간다.



해석 폭 넓은 기차영화의 최종판


<설국열차>는 눈 덮인 산 위를 구르는 작은 조약돌처럼 부피와 속도를 더해가며 맹렬히 달려가는, 혹은 그러려고 하는 영화다. 물론 성패에 대한 평가는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시스템 자체를 전복시키는 결론을 두고 탈정치적 쾌감을 느낄 수도 있고, 막힌 문을 뚫고 돌진하는 질주를 통해 장르적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반면 각 칸마다 차이 나는 밀도가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의 돌파력이 확실히 떨어지는 탓으로 완만함 속도감에 지루해 할 수도 있다. 각 기차 칸의 디자인과 상상력 자체도 다소 진부하거나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완성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관객 개인의 취향과 판단 문제로 보인다. 속도가 느려지면 그만큼 드라마가 채워지고 각 인물의 사연이 식상한가 싶으면 시스템에 관한 우화가 짙어지는 등 관객이 의지만 있다면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버라이어티>의 평을 빌려오자면 접근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관객의 지적 수준을 존중하는 영화’랄까?
좋은 영화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기에 절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해석의 여지가 다양할수록 좋은 영화가 될 가능성도 커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가능성이다. 누군가 <설국열차>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발견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그저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과 표현력에 경탄한다면 그 영화를 두고 감히 좋은 영화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단순히 상업영화의 쾌감에 몰두하는 사람과 하나의 세계(체계)가 깨어지는 순간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 나란히 앉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영화. 미국 대공황 이후 사회상을 절묘하게 묘사한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북극의 제왕>(1973)의 날카로운 비판정신과 기차여행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삼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웨스 앤더슨 감독의 <다즐링 주식회사>(2007)의 깊이 있는 드라마를 함께 담고 있는 영화. 레일 위를 벗어나는 일 없이 질주하는 동시에 레일 바깥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기차영화의 최종판. <설국열차>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폭 넓은 해석의 가능성에 있다.



↘ 송경원 님은 영화평론가이자 <씨네21>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쓰는 만큼 즐거워질 거란 믿음으로 오늘도 쉬지 않고 영화 관람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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