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호 2013년 봄 [특집] 식량주권과 식량자급

[ 생활 실천편① 꾸러미 ]

‘사먹는 것’이 아니라 ‘나눠먹는 것’

글 이선미 편집부

일주일에 한 번,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채운 선물상자가 우리 집에 도착한다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다. 생산자에게는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고, 소비자에게는 우리 땅에서 자란 건강하고 맛난 농산물을 먹게 해주는 꾸러미는 모두에게 선물이다.


꾸러미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런 좋은 걸 먹을 수 있었을까?


경기도 수원에 사는 박정현 씨는 일주일에 한번 꾸러미를 받는다. 이번 꾸러미에는 시금치, 무, 냉이와 함께 식혜, 가래떡, 한과 등이 꼼꼼히 들어 있어 엄마가 싸보낸 것만 같다.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인 두 딸과 남편이 채소를 좋아해 제철 채소가 주로 오는 꾸러미의 재료를 남기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더 좋아해요. 밖에서 사먹는 것과 맛이 다르다고 하니 더욱 믿고 먹게 되죠.”
모양도 예쁘지 않고 흙도 그대로 묻어와 손질하는 데 시간과 품이 제법 들지만 꾸러미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런 좋은 걸 먹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든다. 게다가 각각의 특징과 조리법, 농사 근황을 세세하게 알려주는 편지가 늘 함께 오니 그 정성이 마음에 와 닿는다. 전부터 먹거리에 관심을 갖고 신경 써서 국내산 위주로 식재료를 구입했지만 미덥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직접 농사지은 것들을 바로 보내주는 꾸러미의 가치가 더욱 크다. “저는 너무 좋아서 주변에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매주 배송받는 것과 재료를 손질하는 것을 번거로워하더라고요. 좋은 먹거리를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죠.” 꾸러미의 특성상 보내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데, 박 씨는 장 보는 시간이 줄고 제철 음식을 고민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을 장점으로 꼽는 데 반해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먹을 수 없는 점을 꺼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누가, 어떤 씨앗으로, 무슨 생각으로 키우는지 알 수 있다


박 씨가 받는 꾸러미는 충남 홍성에 사는 금창영 씨 가족, ‘민재네 집’에서 보내는 것이다. 2008년 귀농한 금 씨는 2009년 6월부터 꾸러미를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30상자 내외를 보내고 있다. 이 정도를 유지해야 받아보는 각 가정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꾸러미를 받는 사람들 중에는 50대 이상이 많다.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이 먹거리에 신경쓰게 되면서 받아보기 시작하는데, 그 때문인지 쉽게 그만두지 않는다.
처음 귀농했을 때는 열심히 하기만 하면 안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아 농사는 힘들었고 가정 형편도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꾸러미를 시작하면서 계획성 있게 농사를 짓게 됐고, 소득도 예측가능해졌다. 마음 놓고 농사를 짓게 되자,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비닐멀칭을 하지 않고 자연재배를 지향하는 등 더 건강한 농사를 짓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하게 됐다. 금 씨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동네에 꾸러미를 하는 이웃이 여럿 생겼다. 할머니 두 분과 젊은 사람 한 명이 하는 꾸러미는 할머니들의 손맛을 살린 반찬이 많아 찾는 사람은 많은데 할머니들이 힘드실까봐 스무 집에만 보낸다. 토종씨앗에 기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지어 보내는 꾸러미도 있다.
금 씨는 꾸러미의 가장 큰 장점으로 ‘누가, 어떤 씨앗으로, 무슨 생각으로 키우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토종씨앗을 심으며 마늘, 양파, 고추 등을 재배하는 데 거름을 쓰지 않는 것도 기쁘게 먹을 수 있는 것들, 건강하게 자란 것들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귀하게 기른 것들을 주고받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아니다. 금 씨는 꾸러미를 받는 집의 아이들이 몇 살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기억하며 짐을 꾸린다. 금 씨만이 아니다. 꾸러미를 받는 사람 중에는 금 씨의 아이 생일이 되면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고, 농사 지을 때 입으라고 옷을 선물하는 사람도 있다.
“규모를 늘려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공급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소비자들의 지지를 통해 작물 다양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각각의 작물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귀중함을 꾸러미를 통해 나누고 싶습니다.” 꾸러미를 보낼 때마다 편지를 쓰는 것도 어떻게, 왜 농사를 짓는지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한 번 서면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여섯 번 정도는 서야 느낌이 있죠. 우리 농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해요.” 바라는 것은 받는 사람들도 자기를 보여줬으면 하는 것이다. 주변에 꾸러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개하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이라면 농지트러스트에 동참하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



꾸러미에는 근황과 조리법 등을 담은 편지가 항상 들어간다.


얼굴 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 만든다


경북 상주에 있는 언니네텃밭 봉강공동체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에서 ‘얼굴 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 만드는’이란 슬로건으로 16명의 회원이 주 1회 128개의 꾸러미를 보내고 있다. “이 지역은 주로 논농사를 하던 곳이에요. 논농사를 하면 다른 상업작물을 짓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있어 텃밭농사를 하기 좋지요. 그 덕에 꾸러미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언니네텃밭 김정열 단장의 말이다.
전여농에서 꾸러미를 하게 된 이유는 생산자는 마음껏 농사를 짓고, 소비자는 정체불명의 먹거리가 아닌 좋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알게 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회원들과 함께 식량위기에 대해 공부하고 토종씨앗운동을 펼치면서 공부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배운 것을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렇게 2009년 4월 셋째 주에 21개 가구에 꾸러미를 보내기 시작했다. 2013년 현재 전국 15개 공동체에서 한 주 800개 가구에 꾸러미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전여농은 2012년 세계식량주권상 대상을 수상했다.
두부와 유정란은 기본 품목으로 각 공동체에서 생산된 제철 채소와 간식거리 등이 주요 품목이다. 생산자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먹기 위해 텃밭에 기른 것들을 소비자들과 나눠 먹는데, 기른 사람과 똑같은 것을 먹는 것만큼 신뢰가 가는 일이 더 있을까 싶다. 외식이나 가공식품 위주로 식사를 하다가 꾸러미 중심으로 밥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또 식생활 구성이 달라지면서 몸이 약해 병을 달고 다니던 회원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나 아이들이 시장에서 사온 채소는 잘 안 먹는데 꾸러미로 온 것은 잘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흐뭇하다. 하지만 꾸러미로 오는 농산물을 다 해먹지 못해서 중단하는 사람도 있어 안타깝다. 택배로 보내다 보니 배달사고가 종종 있고, 명절 등에는 배송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식품허가부분에서도 어려움이 있다. 현재의 식품 관련 규제에 따르면 떡이나 반찬, 김치 등은 꾸러미로 보낼 수 없게 되어 있다. 앞으로 정부에서도 꾸러미사업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만큼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역시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꾸러미가 있는 마을 공동체는 분위기가 좋고, 귀농인들이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장에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짓는 농사는 더욱 신이 난다. 때마다 제철 농산물로 꾸러미를 채워야 하므로 다양한 종을 농사짓게 되고, 이는 토종씨앗운동을 지원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농촌이 좀 더 가까운 곳이 되고 있다.



쌈채소를 뜯자마자 꾸러미에 넣는다.


꾸러미 덕에 제대로 먹고 산다


언니네텃밭에서 꾸러미를 받는 곽기수, 이화진 부부도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엔 꾸러미를 받으면 어떻게 해먹어야 할지 몰라 인터넷으로 요리법을 찾아서 해보다 실패할 때도 많았다.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비싸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에야 파는 것과는 달리 유기농으로 정성껏 자란 작물이란 걸 알지만 그때는 단순히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늘 먹던 것만 먹는 생활에서 벗어나 음식의 폭이 넓어진 것을 깨달았다. 장보는 횟수와 함께 지출이 줄어들면서 비싸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생산자가 직접 담근 물김치, 장아찌, 오이지, 식혜 등은 참 귀하고도 맛났다. 생산공동체를 방문하면서 믿음은 더욱 커졌다. 집에서는 채소를 먹지 않던 아이가 공동체에 채종포 심기체험을 다녀온 후 상추를 먹기 시작했다. 꾸러미로 받던 것들이 생산지에서 먹는 밥상에 그대로 오른 것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는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꾸러미를 받는 것뿐인데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생산자들에게서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 꾸러미 덕에 제대로 먹고 산다고 느껴졌다.
“이왕 먹는 거 농민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꾸러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습니다.” 곽 씨의 말은 아마도 모든 꾸러미 생산자와 소비자의 바람일 것이다.



민재네 집
www.minjene.com
언니네텃밭 www.sistersgarde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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