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호 2013년 봄 [특집] 식량주권과 식량자급

[ 생산 실천편① 우리밀 살리기 ]

맛에 대한 기억으로 밀밭 지키기

글 김세진 편집부

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점심에는 짬뽕, 저녁은 야근하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는 밀누룩을 발효해 만든 막걸리와 전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종일 먹은 것이 밀, 밀이다. 이런 날이 어디 하루뿐이랴. 꼽아보니 밀을 정말 많이 먹고 살고 있구나 싶다.

그런데 우리나라 밀 자급률은 2.2%(2012년 기준)에 불과하다. 그나마 1980년대에 비하면 나아진 수준이다. 1984년 정부가 밀 수매를 중단하면서 15%에 이르던 밀 자급률이 0.03%까지 떨어져 밀 종자가 사라질 뻔했다. 한살림과 가톨릭농민회가 힘을 합쳐 ‘우리밀살리기’ 운동을 벌여 겨우 살렸지만 2011년 이후 생산량이 주춤하고 있다. 소비가 생산에 미치지 못해 버려지는 밀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송동흠 사무국장은 정부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접지불제 등을 통해 농가를 지원하고, 수입밀과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정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밀 가공식품을 많이 만드는 대기업에서 우리밀을 선호하지 않는 것도 정착하기 어려운 요건이다. 항간에는 우리밀이 품질이 고르지 않고 빵을 만들기에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다.


'월인정원' 이언화 씨와 100명의 우리밀 워커

이언화 씨(46살)는 우리밀로 빵을 만들고, 블로그 월인정원(healingbread.net)을 통해 조리법을 공개하고 있다. 블로그 이름 ‘월인정원(越人庭園)’은 한계와 범주를 뛰어넘고자 하는 이의 뜰, 동산이라는 의미. 우리밀로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워크숍도 열고, 빵 만드는 교사들을 모집해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곧 우리밀밭을 지켜낼 거라고 확신한다.

그는 구례로 귀촌하기 전, 서울의 어느 동사무소 문화교실에서 베이킹을 배웠다. 그런데 가공마가린이며 기름이며 달걀이며 설탕 등 빵에 들어가는 재료가 너무 많았다. 우리밀로는 빵을 만들 수 없을까? 설탕 대신 조청이나 꿀을 넣으면 안 될까? 요가를 시작하면서, 먹거리도 바꿔가던 이언화 씨에게는 자연스런 질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건 빵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밀로는 정말 빵이 안 될까? 당시엔 우리밀로 빵을 만드는 조리법이 어디에도 없었다. 직접 실험하기로 했다. 3년 동안 매일같이 1,000번 이상 빵을 구웠다. 한 번에 여러 개 구웠으니 개수로 하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딱딱한 돌빵도 헤아릴 수 없이 구웠지만, 차츰 먹을 만한 빵을 굽기 시작했다. 우리밀은 글루텐 함양이 적어 잘 부풀지 않지만 빵을 만들기엔 부족하지 않다.

우리밀로 만든 빵이 처음 오븐에서 나오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빵이 공기를 압도하는 듯, 그윽한 향이 가득 찼다. 식감은 거칠지만 탄력이 있었다.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은 특별한 맛과 기운이 느껴졌다. 기존의 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죽을 관찰하면서도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효모들이 끊임없이 제 일을 하는 걸 깨달은 것이다.


빵 굽기의 시작은 불을 살피는 것부터. 구례의 월인정원 작업실에서 이언화 씨가 세심하게 불길을 만지고 있다.


구례의 작업실, 월인정원에서 여는 우리밀빵 수업과 워크숍에는 전국에서 신청자들이 모인다. 평소에 빵을 만들면서 궁금했던 것을 같이 묻고 자기만의 방법을 나누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가정식 우리밀빵을 배우고 만든다. 한 번에 5~6명만 함께 한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최상의 상태에서 만나기 위해서다.

이언화 씨가 무엇보다 집중하고 있는 것은 우리밀 워커다. 우리밀로 빵을 만들고 가르칠 전국의 빵교사, 우리밀 워커 100명을 모으고 있다. 꼭 빵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집에서 만들더라도 열정적으로 열심히 만들고 우리밀빵을 퍼뜨리고 싶은 사람이면 된다. 이언화 씨를 포함한 101명이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이다. 온라인 공동작업실 마을에빵(
www.ecobread.com)과 오프라인에서 수시로 단계별 작업을 공개하고 부족한 부분을 의논하고 개선하면서 서로에게 배우는 그런 네트워크 말이다. 그들이 빵작업실에서 돌아가며 한 번씩만 강의해도 풍성한 빵 수업이 열릴 것이다.

100명의 빵교사가 다 채워져도 모두 한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중 단 15명만 열심히 해도 좋다. 월인정원, 한 명으로 시작한 빵교사가 15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5명의 빵교사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열 명을 가르친다고 가정하면, 또 그중 한 명 정도가 이어서 열심히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좋다. 몇 명이라는 숫자보다 한 명이라도 누군가 명맥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빵교사가 되어 또 퍼뜨리면 되니까.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100명이 되고, 100명이 또 100명을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알의 밀알이 이윽고 들을 채우는 것과 같은 원리다.

우리밀 빵교사의 명맥을 잇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돌연 갓 귀농했던 7년 전과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불과 몇 년만에 들과 밭과 숲이 없어졌다고. 나무들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한옥펜션이나 별장들을 세웠고, 논은 조경용 묘목을 심는 땅으로 바뀌었다. 농사를 짓던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자녀들이 땅을 이어받으면서 농지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점점 그런 일들이 늘어날 것이다. 구례는 인구 2만 명 중에 1만7,000명, 즉 80%가 노인인데, 70~8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는 10년 후에는 대체 어떻게 될까?

위기를 느꼈다. 시급해졌다. 이언화 씨는 밀밭 가까이에서 밀이 겨울 땅을 뚫고 나와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는 것을 봤다. 밀밭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밀이 결코 없어지면 안 된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보아온 대로라면 점차 밭이 없어질 텐데, 밭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문득 어릴 적 먹었던 맛의 기억은 평생을 간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맛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밭이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는 사람이 있는데 밭을 없애기는 어렵다. 맛을 기억하게 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밀로 맛있는 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더 늘어나길 바란다. 그런 바람을 담아 개인작업실을 우리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작업실로 열어 두었다. 빵을 잘 만들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작업실 월인정원은 열려 있다. 우리밀지원군으로 함께 할 수 있다. 빵과 함께할 잼이나 치즈, 효소, 차 등을 가져와 나누면 된다. 누구든 와서 자꾸 밀밭을 찾고 눈으로 보고 또 찾고 그랬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빵테이블을 여는데 직접 빵을 만들어 와 나누어도 좋고, 무엇이든 먹거리를 바로 만들어서 나눠도 좋다. 내게 넘치는 것은 무엇이든 나눌 수 있다. 이를테면, 집에 있지만 잘 안 쓰게 되는 오븐을 가져와 다른 베이킹 재료와 바꿀 수도 있고, 잼과 치즈를 바꿔 가져갈 수도 있다. 햇밀이 나오는 6월, 밀밭에 황금빛이 넘실대는 계절에 열리는 햇밀축제에도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월인정원은 이미 구례에서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빵 강좌를 들은 귀촌자들을 중심으로 빵 동아리가 생겼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은 빵이란 으레 대기업 빵만 있는 줄 알고 사서 먹었는데, 곧 마을에서 나는 우리밀빵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앞으로 구례에 빵공장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배고픈 이들과 빵을 나누어 먹는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빵은 밥과 달리 손쉽게 내어줄 수 있고, 간편하게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협동조합은 구례에 이미 귀촌한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일자리가 될 것 같다. 우리밀 빵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찾는 사람들이 계속 있으면 결코 밀밭이 베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길로 밀밭을 찾는 사람들, 맛 때문에 우리밀을 찾는 사람들 덕에 말이다.

이언화 씨의 생각에 빵은 관계의 총합이다. 빵의 어원이 진흙이고 빵은 결국 흙을 일구어 흙에서 온 것을 나눠 먹는 이기 때문이다. 구운 빵을 잘라서 나누면 각자 한 조각을 가지게 되고, 각 조각들은 동시에 같은 일들을 다른 곳에서 수행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 그리고 빵은 조각이기 때문에 자기가 왔던 곳, 조각 이전을 그리워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같은 빵조각을 먹은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게 되는 것. 근원을 찾는 그 힘들이 모여 우리 밀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금곡정미소의 앉은뱅이밀

공기를 압도하는 빵, 월인정원 이언화 씨가 말한 그 빵을 만들어낸 밀가루는 바로 앉은뱅이밀이다. 그는 오랫동안 밀의 원형을 찾았다. 육종되지 않은 원형이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무지 우리밀의 원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보통 ‘우리밀’이라고 불리는 밀은 금강밀이나 조경밀로, 개량종이다.

밀유산보호협회(Heritage Wheat Conservancy)에 고대 곡물인 아이콘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걸 얻어서 구례에 심는 실험을 해 볼까도 생각했다. 그 정도로 바람이 간절했다. 그러다가 우리밀의 원형인 앉은뱅이밀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앉은뱅이 밀은 정말 토종일까? 우선 앉은뱅이밀과 관련된 문서를 살펴보자

한국 고농서에 밀의 품종과 관련된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92년에 출간된 강희맹의 《금양잡록》이다. 심는 시기에 따라 참밀이라 부르는 가을밀과 봄에 심는 봄밀 두 종류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1825년 서유구가 저술한 《행포지》엔 중밀이 나온다. 까락 없이 반질한 모습이 중의 머리와 비슷하여 붙인 이름인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시험장에서 일하던 다카하시 노보루라는 농학자의 아들이 2007년 농촌진흥청에 기증한 자료에는 다양한 밀이 나오는데 그중에 왜목과 좌맥이 있다고 한다. 키가 작은 것을 특징으로 하는 이름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아마 ‘앉은뱅이밀’의 다른 표현인 것 같다. - 김석기·백승우의 《토종곡식

‘앉은뱅이밀’은 난장이밀이라고 불린다. 보통 1m까지 자라는 다른 밀에 비해 50~80cm만 자라기 때문. 앉은뱅이밀은 동남아시아 식량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0년 노먼 블로그 박사는 키가 커서 잘 쓰러지는 서양밀과 작은 밀을 교배해서 ‘소노라64호’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밀의 생산성을 높여 기아 문제를 해결했다. 덕에 노먼 블로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바로 소노라의 원종이 농림10호이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가져간 우리나라 앉은뱅이밀의 후대 품종이다.

앉은뱅이밀은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값싼 미국산 밀가루에 밀려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를 쓴 안완식 박사도 1995년 남해에서 토종 앉은뱅이밀(진주재래종)을 재배하는 농가를 발견하고 이후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경남 진주 금곡면에서 여전히 앉은뱅이밀을 재배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누군가 앉은뱅이밀을 구입했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고 그 덕에 경남 금곡정미소를 중심으로 밀밭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앉은뱅이밀밭은 진주시를 비롯해 하동 악양과 고성군 일대에 있다. 100여 농가가 30ha 밭에서 120톤 정도를 생산한다. 농가는 원종을 유지하려고 채종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들 가운데에 있으면 화분이 섞일 수도 있기 때문에 외곽에 채종포를 두었다. 돌연변이는 그때그때 자르고 햇빛에서 자연 건조해서 발아시키는 것은 기본이다.

정부가 우리밀 수매를 중지하면서 많은 밀밭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이들은 토종 밀농사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농민들은 밀을 사 준 곳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금곡정미소에서는 값을 더 쳐서 앉은뱅이밀을 샀다.


이것이 금곡정미소에서 10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기계다. 백관실 대표의 할아버지 때부터 쓰던 것


금곡정미소 백관실 대표(64)는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이어 앉은뱅이밀을 수매하고 제분하고 있다. 밀 수매제도가 폐지되고, 많은 정미소들이 문을 닫았는데 어떻게 금곡정미소는 그 시간을 견디었냐고 물으니 답이 간명하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것. 되레 앉은뱅이밀 때문에 정미소가 망하지 않고 살았노라고 했다.

앉은뱅이밀 자체가 맛이 있어 계속 사람들이 찾았기 때문이다. 찰지고 쫄깃한 맛과 구수한 향을 잊지 못해 ‘옛날 밀가리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주 지역에 살면서 맛 봤던 사람들이 이사 가서도 주문하고, 그것을 먹어본 이웃들이 주문하고 입소문을 듣고 주문하는 식이었다. 밀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외려 정미소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했다. 수입밀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는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매년 수요가 조금씩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에는 한포대 40kg짜리가 3,000포대 정도 팔렸다.

그러고 보면 토종 앉은뱅이밀이 살아남은 건 자체의 맛 덕이다. 농협에서는 밀가루 색깔이 새하얗지 않다고 받지 않았지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백 대표는 정부가 정책을 잘 세우면 토종 앉은뱅이밀이 전국에 퍼질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땅에서 수입밀이 아니라 우리밀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종자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서슴지 않는다.

“나 혼자 갖고 있으면 뭐할끼고? 이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죽으면 억울하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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