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호 2012년 겨울 살림,살림

[ 살림이 본 영화 ]

두 개의 숲 - <웰랑 뜨레이>와 <춤추는 숲>

이영진

두 작품은 감독의 가족들이 프로듀서, 조감독 등으로 참여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김태일 감독은 전작 <오월愛>에 이어 이번에도 가족들을 스태프로 고용해 착취(?)했고, <경계도시2>에서 연출을 맡았던 홍형숙 감독은 <춤추는 숲>에선 프로듀서를 맡아 남편 강석필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에 힘을 보탰다. 두 작품 모두 도시화를 키워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들의 참여가 단지 이색적인 제작방식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도시는 인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다른 무엇보다 자기 마음속의 욕망에 따라 고쳐 만든 가장 성공한 시도이다. 그러나 도시가 인간이 창출한 세계라면 그것은 또한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세계이기도 하다.” 도시사회학자 로버트 파크의 말에 덧붙여, 도시가 “잉여생산물의 지리적, 사회적 집중을 통해 성장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자. 도시의 욕망과 운명은 인간의 욕망과 운명인 동시에 자본의 욕망과 운명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도시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에 따르면 1950년 인구 1백만 명 이상의 도시는 86개였지만, 2015년에는 550개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만으로는 폭발적인 도시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류학자 그레고리 굴든의 사례 연구를 빌어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농촌 주민은 더 이상 도시로 이주할 필요가 없다. 도시가 농촌으로 파고드니 말이다.” 착취를 통해서 잉여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박탈을 통한 축적’이야말로 도시화의 핵심일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중국을 예로 든다. “중국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차지하고 살던 공간을 박탈당하고 있고, 베이징에서만도 3백만 명에 이른다. 그들은 사유재산권이 없는 까닭에 국가는 이들이 떠나는 데 쓸 얼마 되지 않는 현금만 쥐어주고 강제로 퇴거시킨 뒤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그 땅을 개발업자들에게 넘길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비단 중국만의 비극일까?



웰랑 뜨레이_ Wellang Trei
감독: 김태일 / 상영시간: 80분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접경 지역인 몬둘끼리. 뜨레이는 이곳에서 아내 슬리와 다섯 아이, 장인, 장모와 함께 살고 있다. 땅을 개간해 벼농사를 짓는 뜨레이 가족은 1년 내내 엄청난 노동에 시달린다. 벼 수확 외에도 덤롱(카사바)을 깎아 말린 뒤 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아홉 식구가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년 먹을 식량을 너끈히 자급자족했던 뜨레이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은 건 인근 플랜테이션 농장이다. 소수민족인 부농족으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땅에 대규모 농장을 지은 외지인들 때문에 뜨레이 가족은 더 이상 화전을 일구지 못한다. 게다가 플랜테이션 농장의 대규모 수확으로 농산물 가격마저 대폭 하락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뜨레이 가족의 결심은 지켜질 수 있을까?
결국 뜨레이 가족은 도시화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는 뜨레이 앞에서 김태일 감독이 어떤 위안의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웰랑 뜨레이>는 그들의 절망적인 미래를 연민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운명이기도 하다. 뜨레이 가족을 도와 밭에서 묵묵히 일하는 김태일 감독의 가족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공동 운명의 자각이야말로 어떤 위로보다 든든한 연대의 바탕임을 반복적으로 일러준다.



춤추는 숲_ Forest Dancing
감독: 강석필 / 상영시간: 105분






김태일 감독의 <웰랑 뜨레이>가 도시화의 과정을 추적한다면, 강석필 감독의 <춤추는 숲>은 도시화의 탈출을 모색한다. 도시가 끝없이 팽창한다면 도시에서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한 것 아닌가 싶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웰랑 뜨레이>가 자본의 욕망과 인간의 운명을 대립시켰다면, <춤추는 숲>은 자본의 욕망과 인간의 욕망을 맞세운다. 그리고 제안한다. 디스토피아로서의 도시 위에 유토피아적 거점을 만들자고,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안에 숨 쉴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면 된다고 말이다.
<춤추는 숲>의 오프닝은 서울 성미산 마을 사람들의 환한 얼굴이다. 자전거에 매달린 카메라가 동네 구석구석을 훔쳐보는 동안 쉴 새 없이 오가는 주민들의 인사는 적잖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성미산 마을은 이상한 마을이다. 낮술 먹고 집에 간다고 털어놓질 않나, 암호 같은 별명을 서로 이름 대신 부르지 않나.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성미산 숲의 키 큰 나무들은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 댄다.
성미산 마을이 생태형 도시공동체가 된 건 1994년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온 부모 세대와 다르게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열망은 공동육아를 넘어 “마을이라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 카페 작은나무, 그 옆에 두레생협, 그리고 마을식당과 성미산학교. 모두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내 만든 곳들이다. 10년 전 성미산 마을에 들어온 강석필 감독(맥가이버)과 홍형숙 프로그래머(호호)도 아들 이헌이와 함께 어엿한 마을의 일원이다.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건 아니다. 2010년 서울시가 조례를 깡그리 무시하고, 비옥토 1급 지역인 성미산의 개발을 소유주인 홍익재단에 허가하면서 마을은 전쟁터가 된다. 2003년 서울시의 성미산 개발에 맞서 3년 가까이 ‘파란만장한 싸움’을 치렀던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거대한 포클레인을 막아서고 나무를 자르기 전에 내 목숨부터 가져가라고 맨몸으로 시위한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뒷동산이지만, 이곳 아이들에게 성미산은 포근한 고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춤추는 숲>에서 자본의 욕망과 인간의 욕망은 사유(私有)와 공유(共有)의 근본적인 갈등이기도 하다. 자본에게 도시는 재산인 반면, 인간에게 도시는 거처다.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은 나무 위에 올라탄 주민들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하게 나무를 잘라내는 순간들이다. 무차별적 폭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자본의 욕망이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제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을 목도할 때 용산 남일당 망루가 연상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싸우는 현실 뒤에 꿈꾸는 미래가 온다


벌거숭이가 된 <웰랑 뜨레이>의 숲과 <춤추는 숲>의 성미산. 자본의 욕망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쩔 수 없이 포기되어야만 할까? 접근방식과 톤은 사뭇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웰랑 뜨레이>에서 김태일 감독의 딸이 대뜸 “우리가 뜨레이 가족의 양식을 축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때, <춤추는 숲>에서 뿌리 뽑힌 나무를 다시 심으며 승혁이가 “생명에는 주인이 없다”고 답할 때 카메라는 희망을 보았다고 할 순 없지만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들은 우리를 저버릴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삶과 시간이 주어진 동안 싸우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 시대의 사람들 어느 누구도 싸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싸워야만 존재하고 또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일어난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찾아온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마지 피어시의 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의 한 대목이 일러주듯이, 꿈꾸는 미래는 싸우지 않는 현실 뒤에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 이영진 님은 1999년부터 <씨네21> 기자로 일해 왔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보다 만들어져야 할 영화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독립 다큐멘터리에 대한 애정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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