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호 2012년 겨울 살림,살림

[ 삐딱이의 생활 일기 ]

네가 뭐라고 떠들든 말든… 바보상자, TV

이소영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각자 기계 하나씩을 들고 DMB를 열심히 시청하고 있다. 2005년에 세계 최초로 DMB방송을 시작했다는 대한민국, 이 나라의 ‘수도권’ 전철에서 볼 수 있는 신기한 광경이다. ‘턱’별시 사람들에게 당연해도 이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다고 일단 서두부터 강조한다. 여하튼 퇴근해서 집에 와서는 곧장 TV를 켜놓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끈다. 다음날 그 TV가 알람이 되어 도로 켜진다. 거실에도 부엌에도 방방마다 TV가 한 대씩이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할라 치면 밥상만 차려져 있고 한 사람씩 보던 프로그램이 끝나야 나타난다. 명절이면 온 나라가 그리운 가족을 찾아간다는 민족대이동을 치르지만 결국 모인 가족들은 또다시 TV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한 분위기를, 모두에게 친숙한 TV가 수습해주는 역할까지 한다. 이제는 스마트TV시대이기 때문에 떼쓰는 아이를 바꿀 수 없으면 TV를 바꾸라는 ‘신기한’ 광고도 한다.
 

영국 아이들에게는 포켓몬, 우리 아이들에게는 뽀통령

이처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TV는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 교육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구매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하고 창조적이고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를 생산해낸다. 너무도 닮아 있어서 누가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는 아이돌 스타가 되기 위해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외모를 가꾼다. 드라마 주인공이 입은 명품의류와 가방, 그들이 타는 신형고급차를 사는 사람은 드라마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아이돌 스타나 연예인들은 광고에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프로그램 안에서는 간접광고를 전담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취학 전 아이들은 일반적인 야생동물보다 포켓몬을 더 잘 알아보며 미국의 2세 아이들은 알파벳 M은 인지하지 못해도 맥도날드의 M모양 아치는 알아본단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뽀통령이 있다.

스티븐 존슨은 저서 《바보상자의 역습》에서 TV의 긍정적인 세뇌를 옹호한다. ‘CSI시리즈’, ‘LOST’, ‘24’ 같은 (미국)TV 드라마가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고민하게 하고 추리하게 만들어 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나도 ‘24’를 본 적이 있는데 긴박한 줄거리 덕분에 한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갔다고는 느꼈다. 하지만 보여주는 대로 봤고 다음 회를 기대하게 되었을 뿐, 다음 장면에 대해 내용을 추리해 본 적은 없다. 나만 그런가? 스티븐은 복잡한 사건들을 스스로 추리하며 풀어나갔나 보다.

여하튼 ‘역습’이라고 불릴 만큼 TV의 긍정적인 측면도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TV 이전의 문화, 그 기성의 권위를, 문화의 위계를 해체함으로써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문화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1970년대 말 TV를 우리는 왜 바보상자라 불렀을까? TV 덕분에 ‘똘이장군~만~만세!(2000년대에 뽀로로가 있다면 1970년대에는 돼지 수령을 때려잡는 똘이장군이 있었다)’를 흥얼거리던 아이는 1980년 컬러TV방송을 보게 되면서부터는 ‘아!~대한민국’을 따라 불렀다. 각종 오락성 행사가 방영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다양한 스포츠 중계가 시작되었다. 권위주의 정부가 우민화정책의 일환으로 TV를 활용하던 때였다. 지금도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라는 올림픽이라도 하면 방송국의 모든 채널은 경기 중계만 한다. 이제는 중계권 이용료를 지급해야 하는 자본의 억압이다. 시청자의 선택권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뭐,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TV를 통해 주입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일은 아니다. 과학기술과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선진국 문화는 타문화를 존중하며 상호교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문화제국주의로 위력을 떨쳐왔다. TV에서 재탕, 삼탕 보여준 슈퍼맨 시리즈, 람보 시리즈 등은 서구문화, 특히 미국 백인문화의 우월성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는 식의 TV광고를 본 적이 있다. 잘 지내느냐 물었는데 자동차로 답한다. 소비사회는 소비를 통해 구성된다. 그랜저를 사면 썬팅도 하고 튜닝도 하고 격에 맞는 고급음식점을 찾는다. 부르디외는 이처럼 끊임없이 사회의 다수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소수의 노력을 ‘구별 짓기’라 부른다. TV광고는 이윤추구와 구별 짓기를 위한 획기적인 도구가 되었다. 충동 소비를 확산시켜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하고 더 많은 광고를 위해 높은 시청률을 요구하고, 더 자극적인 내용들을 쏟아낸다. 욕구의 확대재생산은 상품 주기를 단축하여 자원을 낭비하고 각종 쓰레기를 양산한다.


다수인 소수자를 외면하는 프로그램

자, 지금까지 주절거린 TV에 대한 비판들은 사실 모두 아는 것들이다. 알기 때문에 TV 안보기 운동도 했고, TV를 아예 없애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알지만, 알면서도 여전히 수동적인 TV 시청자들에게 그런 잔소리 말고 조금 다른 문제제기를 해보려고 한다. TV라는 기기가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사람들 말고, 그렇지 못한 ‘다수’의 ‘소수’자를 한번 보자. 위성방송도 디지털도 없이 3사 방송 정도만 보면서 겨우 문화생활을 누리던 쪽방사람들의 눈앞에 어느 순간 화면 절반을 뒤덮은 디지털TV 전환 문구가 떴다(물론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화면이 나오는지도 모를 테다). 며느리와 아들이 새 TV로 바꿔주더라는 전환 유도 광고를 하고 있다. 가장 큰 효도선물이란다. 어이가 뒤통수를 친다. 다수결은 효율성에 비해 소수자를 의사결정 과정에서 합법적으로 제거시키는 맹점을 가진다. 보편성의 강제를 정당화한다.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디지털 전환이란 말인가? 물론 디지털 전환도 세계적인 추세라니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쫓아가야겠다. BBC(영국 공영 방송)에서 2012년이 지나면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하겠다는 홍보 영상을 본 기억이 있다. 그게 2006년 말경이었다. 5년이나 뒤에 대해 준비하고 홍보해왔던 것이다. 왜 그들의 이런 소통방법, 의사결정 과정은 모방하지 않고 소비중심주의만 넘쳐나게 모방하는 것일까.

기왕 언급한 김에 하나만 더 편들자. 물론 영국은 시각장애인이 교육부장관을 했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낮은 곳이기는 하다. BBC는 아이들 프로그램에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는 장애인이 선생님으로 나온다거나 팔이 없는 장애인이 MC를 맡는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을 떠올려 보라. 수많은 우리들이 광화문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광할 때 그 자리에서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모인간은 이동할 권리가 있다며 이동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그런데 그건 보도가 되지 않았다. 마치 장애인의 얘기는 남의 이야기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장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90.5%가 사고(35.4%)나 질환(55.1%) 등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TV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행복한 세상 꿈꾸기

TV는 상상력을 자극하여 두뇌발달을 돕지 못하는 바보상자이고, 광고를 통해 소비주의만을 극대화하는 요물이며, 사회 비판의식이 소멸한 우매한 대중을 만드는 권력의 도구라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20여 년 전 시작되었던 TV 끄기를 또다시 주장한다. 필요에 따라 프로그램을 찾아서 볼 수 있는 능동적 시청자가 이제는 될 만도 하지 않은가? 그 돌고 도는 소비지향 물질만능의 쳇바퀴에서 내려와, 보다 적극적인 문화를 창조할 만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 더 다그치고 싶은 것은 그깟 TV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 고작 TV에서 보여주는 문화라도 누리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그런 TV에서조차도 배제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이다.

그럼 앞으로 20년 후에는 TV 속에서 소외된 소수자들, 소비력이 부족한 계층이 지금처럼 외면 받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TV가 허상을 쫓지 않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조종되지 않고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면 사실 별반 재미가 없어 시청률도 떨어지겠다. 다 내 이야기고 이웃의 이야기니까 바보상자를 통하지 않고 이웃과 소통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허겁지겁 돈벌이를 다녀와 TV 앞에 멍청히 앉을 필요도 없겠다. 쪽방 할머니도, 퇴직한 할아버지도, 놀 곳 없는 아이들도, 비정규직 일용 노동자도, 교통사고로 휠체어에 앉은 전직 교사도 마을에서 이웃에게 재능기부하고 또 도움 받으며 소박하고 따뜻한 삶을 채워나가겠다.

생태발자국도 급격히 감소하겠다. 사람도 살고 마을도 살고 지구도 살겠다. 듣자하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탈소비사회를 만들자는 역성장(de-growth)정당이 만들어졌단다. 모든 소비양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직접 생활에서 실천해 온 운동에 근거한 정치적 움직임이다. 지역과 이웃과 아이들과 장애인과 이주노동자와 노인과 실업자와 극빈층이 TV가 제 혼자서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는 그런 사회를 벌써 만들어 가고 있으면서 제도정치인 정당까지 만들었단다. 그렇단다.

↘ 이소영 님은 에코토피아를 꿈꾸는 살림꾼입니다.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부산대 생태유아교육사업단 연구교수를 거쳐 지금은 고려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인드라망, 지금 여기의 에코토피아》를 썼으며 《비아캄파시나-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을 공동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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