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호 2012년 겨울 살림,살림

[ 말글살림 ❾ ]

군불에 등 뜨습고 짚불에 무쇠가 녹는다 - 재료와 상황에 따라 다른 불의 우리말

박남일

오래 전부터 인간은 불을 이용하여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견디고, 음식을 익혀왔다. 물, 흙, 공기와 더불어 불은 생명을 살게 하는 바탕이며 문명의 원천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받은 축복이다. 그러나 그 축복 뒤에는 위험도 숨어 있다. 활활 타올랐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듯이 말이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우리 옛집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뜨끈뜨끈한 아랫목이다. 방바닥에 구들장을 놓아, 그 아래로 불기운이 지나가게 하는 온돌 난방 때문이다. 온돌 난방은 아궁이에 솥을 걸어 취사도 겸할 수 있다. 물론 한겨울에는 취사와 상관없이 ‘군불’을 때기도 했다. 그래도 밤낮 가스나 기름으로 군불만 때는 요즘 집에 비하면, 옛적 온돌은 꽤나 겸손한 난방방식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형편에 따라 아궁이에 집어넣는 땔감이 달랐다. 예컨대 양반 집에서는 주로 장작을 땔감으로 이용했다. 반면 가난한 농가에서는 등겨, 즉 벼의 껍질을 태운 ‘겻불’이나 볏짚을 태운 ‘짚불’을 땠다. 불에도 계급이 있었다. 그래서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사실 장작불에 비하면 겻불은 불기운이 영 신통치 않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얼굴이 발개지도록 후후 불거나 풍로로 부지런히 바람을 일으켜야 겨우 불꽃이 살아난다. 또 짚불은 금방 활활 타지만 곧 사위어 재만 남는다. 사람이 늙어서 곱게 운명하는 모습을 두고 “짚불 꺼지듯 하다”고 말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농사가 적어 등겨나 볏짚도 구하기 어려운 농가는 아궁이에 ‘싸리불’을 지폈다. 싸리는 주변에 널려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땔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장작불에 비하면 불기운이 턱없이 약했다. 그 때문에 북한 지역에는 “싸리불 피워놓고 불 좋다고 한다”는 속담도 전해온다. 보잘것없는 것을 두고서 자랑한다는 뜻이다.
겻불이나 짚불은 불기운이 약하고, 장작불은 세다. 숯은 연기가 나지 않는 고급 땔감이어서 방안에 화롯불을 피울 때 주로 썼다. 물론 숯이라고 모두 잘 타는 건 아니다. 덜 구워져서 연기와 냄새만 나고 잘 타지 않는 ‘냉과리’라는 숯도 있다. 말하자면 불량품 숯이다. 겻불이나 짚불이라고 무시할 일도 아니다. 겻불은 불기운이 은근히 오래 가서 겨울밤에 고구마를 구워 먹는 데는 제격이다. 짚불은 오래 타진 않아도 필요할 때 쉽게 불을 지필 수 있다. “짚불에 무쇠가 녹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약한 힘이라도 지속되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밑불’ 지피면 ‘꽃불’이 이글거려 ‘불보라’ 흩날리고


집밖에서 불이 필요할 때는 ‘모닥불’이나 ‘화톳불’을 피웠다. 모닥불은 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닥모닥 긁어모아 피우는 불이고, 화톳불은 장작 따위를 한데 모아 질러 놓은 불이다. 그런데 장작 따위에 불을 지피려면 우선 ‘밑불’이 있어야 한다. 밑불은 땔감에 불을 붙이기 위한 불이다. 솔가리 따위에 불을 붙이거나 짚이나 잎나무를 작은 뭉치로 만들어 불을 붙인 ‘불꾸러미’를 밑불로 쓰기도 한다. 그렇게 불길이 타오르다가 불땀이 최고조에 이르면 ‘꽃불’이 이글거린다. 그러다 바람이 불면 불꽃이 흩날리기도 한다. ‘불보라’이다. 또 불보라가 타래져 흩날리는 것은 ‘불갈기’이다. 불보라나 불갈기가 일어날 때는 ‘불티’들이 멀리 날아간다. 불조심을 해야 한다.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다 보면 가장 늦게까지 타거나 타다가 남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등걸불’이라 한다. 나뭇등걸을 태운 불이라 할 수 있다. ‘등걸’은 단단하고 질겨서 오래 남은 부분을 뜻하는데, 흔히 줄기를 잘라 낸 나무의 밑동을 가리킨다. 나뭇등걸은 뿌리와 닿은 부분으로, 목질이 단단하기 때문에 불이 천천히 붙고 오래 탄다. 이와 더불어 나무뿌리나 등걸을 구워 만든 숯은 ‘등걸숯’이라 부른다. 이글이글 타고 있는 굵은 숯 토막은 ‘숯등걸’이라 한다. 숯불은 불꽃이 잘 일지 않지만 활활 타는 꽃불보다 뜨겁다. 활짝 피어 이글이글한 숯불을 ‘잉걸불’이라 하고, 그런 불의 상태를 ‘불잉걸’이라고도 한다. 대장간에서 숯으로 잉걸불을 피워 쇠를 달군다. 잉걸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보다 더 뜨거운 불로, 잉걸불이 타고 있는 숯불덩이는 ‘잉걸덩이’이다.
불을 피우다 보면 매우 센 불땀을 머금은 덩어리가 있다. ‘불등걸’이다. 불등걸 한 덩어리를 꺼내어 다른 곳에 불을 피울 때 밑불로 쓸 수 있다. 이것을 ‘알불’이라 한다. 또 알불을 옮기다보면 자잘한 불덩어리들이 떨어져 나오기 십상이다. 이런 작은 불덩어리가 바로 ‘불똥’이다. 튀는 불똥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거의 타고 재만 남은 줄 알았는데, 그 속에 불씨가 살아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잿불’이라 한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유명한 화재 예방 표어는 바로 이 잿불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잿불도 꺼지고 남은 재는 ‘묵재’이다. 묵재는 고무래로 긁어내어 분뇨를 섞은 뒤에 거름으로 쓴다. 자연에서 얻은 땔감의 잔재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주는 일이다.
빛을 내는 불의 특성 덕분에 우리는 어두운 밤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조명은 오래 가는 게 관건이라 횃불이나 모닥불, 화톳불로는 불편했다. 그래서 기름을 담은 그릇에 심지를 놓아 불을 밝히는 등잔이 출현했다. 이어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 어둠을 밝혔다. ‘호롱’은 석유를 담아 불을 켜는 데에 쓰는 그릇이다. 사기나 유리 또는 양철 따위를 이용하여 작은 병 모양으로 만들고, 뚜껑에 구멍을 내어 심지를 박은 조명기구이다. 그런데 등잔불이나 호롱불은 심지가 갈라져서 옆으로 뻗쳐 퍼지기도 한다. 이를 ‘벌불’이라 한다. 벌불이 퍼지면 방 안 벽에 어룽어룽한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사람이든 호롱불이든 심지가 곧아야 하는 법이다. 밤에 등잔 따위를 들고 밖에 나갈 일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에 불이 꺼지는 게 문제였다. 그 때문에 등을 넣어 밖에 걸어두거나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등롱’을 만들어 썼다. 등 대신 초를 넣은 기구는 ‘초롱’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청사초롱은 전통혼례식 때 쓰는 초롱이다. 그런데 등롱이나 초롱 따위를 통틀어 우리말로 ‘불어리’라고 한다. 불어리는 불에 들씌워 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다. 또 불티가 날리는 것도 막아준다.


인류의 역사는 불장난의 역사


오늘날에는 옛적의 호롱불이나 촛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밝은 전등이 한밤중에도 온 집안을 대낮처럼 밝힌다. 칠흑 같은 어둠에도 자동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대낮보다 빠르게 질주한다. 지금은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컴퓨터나 그 똑똑하다는 스마트폰도 모두 전기가 일으킨 불빛을 이용한 도구들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전기의 시대이다. 다만 우리는 전기가 빛을 내는 동안에 어딘가에서 거대하고 위험한 불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전기만큼 편리하고도 위험한 불은 없다.
산불은 숱한 생명들을 집어 삼키는 화마(火魔)이다. 산에 불이 나면 불길이 더 넓게 번지지 않도록 ‘맞불’을 놓는다. 맞불은 불이 나고 있는 쪽을 향하여 맞은편에 놓는 불이다. 큰불이 일으키는 대류현상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불이 난 쪽으로 빨려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또 산불 주위를 빙 둘러 맞불을 놓기도 하는데, 이런 불을 ‘불깃’이라 한다. 옷에 옷깃을 달듯, 주위에 불깃을 만들어 큰불의 위세를 달래는 것이다.
불은 사람이나 짐승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총과 포 따위는 모두 불을 이용한 무기들이다. ‘된불’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바로 급소를 맞히는 총알을 말한다. 또 그런 총알을 맞았거나 호된 타격을 당했을 때는 “된불 맞았다”고 한다. 된불은 사람이나 짐승을 한방에 명중시키는 불이다. 오늘날의 무기 경쟁은 점점 센 된불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지금도 군대에서는 ‘화력’이라는 말을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할 만큼 불은 공공연한 무기 역할을 하고 있다.
핵을 이용한 발전은 위험한 불장난의 극치로, 그 위험은 이미 검증되었다.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고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2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때문에 앞으로 100만여 명이 사망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예측이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위험한 불장난의 역사였다. 불로 시작된 인류의 문명은 아마도 불로 사라질 것이다. 불은 참 유용하지만, 두렵다.



↘ 박남일 님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등 우리말 관련 책을 썼습니다. 지금은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동네에서 우리말글을 연구하며 인문학 분야의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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