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 2012년 가을 살림,살림

[ 살림이 본 영화 - <그리고 싶은 것>과 <간지들의 하루> ]

'위안부' 할머니와 십대 가출 소녀들

글 이영진

‘평화, 생명, 소통’이라는 주제로, 9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 제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상영되는 한국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의 윤리를 고민하는 두 감독의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녀의 증언을 직접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사실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장막이 한순간에 찢겨져 나가고 그것을 직시하는 게 주저될 정도의 가혹한 현실을 그녀는 온몸으로 이야기했다. 17세 때에 당한 강간, 그리고 그 뒤 계속되는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 때문에 그녀의 신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신음하듯이 그녀는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그와 같은 증언은 그녀의 신체 깊숙한 곳에 뿌리박힌 것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 오오코시 아이코 《여성·인권·전쟁》

 

일본의 학자 오카 마리는 《기억 서사》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맨 먼저 알린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동료 학자 오오코시 아이코의 글을 소개한다. 덧붙여 그 글을 읽었을 때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외려 피해자들을 욕보이는 데 앞장서왔던 일본 우익인사들의 뻔뻔하고 야만적인 언사와 행동에 치를 떨던 오카 마리는 왜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오오코시 아이코의 공감을 순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들이 몸을 더 깊이 파헤쳐 당사자밖에 알 수 없는 고통을 계속해서 증언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얼마만큼 그 육신을 찢어내고, 얼마만큼 그 육신을 파헤치고 그리고 얼마만큼의 고통으로 몸을 헤집어 증언해야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까?”

오카 마리는 ‘후안무치한 역사부정론자들이 사건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피해 당사자의 처절한 증언만이 진실을 담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증언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실은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감추기 위함이며, 이는 또 하나의 고문이라고 말이다.

흔히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事實)이라고 하고, 거짓이 없는 사실을 진실(眞實)이라고 한다. 만약 사실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진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사실을 훼손하고 왜곡해 왔기에, 진실이 요청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정신의 본령 또한 이와 멀지 않다. 그러나 오카 마리가 지적한 것처럼, 진실은 또 다른 희생을 야기할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 카메라에 항상 들러붙는 윤리적인 딜레마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실을 끄집어내려는 안간힘만이 진실을 향한 최선일까? 자, 여기 역사와 현실 앞에서 카메라의 윤리를 고민하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리고 싶은 것
감독 : 권효/ 출연 : 권윤덕, 심달연, 이케다 요이치/ 상영시간 : 93분

2007년 여름, 권윤덕은 일본의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양국 동료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권윤덕은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를 주인공 삼은 그림책 《꽃할머니》 제작에 들어간다. 하지만 정작 스케치를 받아 본 일본 쪽 출판사는 아이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직설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며 난색을 표한다. 그들은 역사의 고난을 이겨낸 할머니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권윤덕은 “불쌍한 할머니 그림책은 만들고 싶지 않다”며 타협을 거부했고, 《꽃할머니》의 일본 출판은 무기한 연기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얼마 뒤, 권윤덕은 애초의 강경한 입장을 철회하고 수정본 작업을 위한 모니터를 시작한다. 《꽃할머니》는 일본 아이들의 손에 전달될 수 있을까?

‘그리고 싶은 것’은 ‘말하지 못한 것’이다.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심달연 할머니는 기억과 말을 잃어버렸다. 심달연 할머니는 늘그막에 꽃그림을 그리며 스스로를 치유한다. 권윤덕은 심달연 할머니의 신산한 삶에서 자신의 끔찍했던 유년을 본다. “사실 나는 성폭력 피해자예요.” 카메라 앞에서 일찌감치 상처를 털어놓은 권윤덕은 자신이야말로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꽃할머니》 작업은 진척되지 않는다. 일본 출판사의 걱정과 우려 때문인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권윤덕은 무려 열두 권의 가제본을 만든다. <그리고 싶은 것>은 ‘거칠고 감정적이었던’ 권윤덕의 붓질이 조금씩 ‘다듬어지며 변하는’ 이유를 관객들에게 콕 짚어 일러주지 않는다. 대신 찬찬히 헤아려보라고 조심스럽게 권한다.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고 피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는데 카메라는 왜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담지 않는가? 혹은 권윤덕의 상처를 심달연 할머니의 그것과 겹쳐 보여주지 않는가? 미리 일러두자면, <그리고 싶은 것>은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실은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작품의 방향을 바꾼 뒤 한국의 동료작가들과 언쟁을 벌이기 전, 권윤덕은 이미 깨달았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 구도로는 분노와 슬픔이 결코 온전히 말해질 수 없음을…. 권효 감독의 카메라 역시 그를 쉽사리 단정하지도, 섣불리 추궁하지도 않는다. 흡사 후일담처럼, 카메라는 그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되새김하듯이 기록한다. 폭로와 고발 대신 치유와 대화를 택했다. <그리고 싶은 것>의 윤리적 선택이다.

 

간지들의 하루
감독 : 이숙경/ 출연 : 은정, 승희, 송화/ 상영시간 : 80분

아직 스무 살 문턱을 넘지 못한 은정, 승희, 송화는 쉼터 윙에 모여 산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을 나온 세 사람은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데 성격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노란머리에 문신을 한 은정은 철드는 걸 끔찍하게 경멸하는 반면, 제법 의젓해 보이는 승희는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월세 집, 오토바이, 차를 갖고 싶은 승희와 달리 또래보다 한참 앳된 송화는 돈을 벌면 곧장 화장품과 옷을 사는 데 쓴다. 물론 세 친구 모두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쉼터에서 제공하는 거처와 일감은 그들의 ‘간지 나는’ 꿈을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은정, 승희, 송화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번갈아가며 거리로 떠나가고, 백화점 캐셔, 국숫집 서빙, 봉제공장 보조, 휴대폰 판매원, 전화상담원 등의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감독에게 말이 안 통한다며 손사래를 치면서 담배를 꺼내 무는 은정, 되바라지고 퉁명스런 은정에게 처음부터 끌린다면 거짓말이다. 연인 사이인 승희와 송화 역시 마찬가지다. 참견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들은 항상 제멋대로다. 그래서 위험하다.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미리 읽는다면, 관람 전에 10대들의 삶을 그들의 눈높이로 이해해보겠다는 마음은 다들 한 번쯤 가질 것이다. 하나 그 결심이 오래 지속되진 않는다. 세 친구가 말하는 ‘간지 나는’ 삶이 실체 없는 허상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지켜보면서, 혹시라도 그녀들이 엇나갈지 모른다는 걱정도 수시로 엄습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짧은 사연과 마주할 때, 우린 고작해야 근사한 꿈조차 지니지 못한 그들에 대해 연민을 품어야 할까.

“이 영화는 일기다. 3년 동안 카메라와 마이크가 집 나온 소녀들의 일기장이 되었다.” 이숙경 감독이 연출노트 첫머리에 쓴 말이다. <간지들의 하루>는 다큐멘터리에서도 흔히 요구되는 드라마 구조를 철저히 배제하고 무시한다. 이해한다고 하면서 규정하고, 배려한다고 하면서 재단하지 않기 위해 감독 스스로 정해둔 원칙일 것이다. 감독의 말처럼, 아이들은 내킬 때 찾아와 카메라를 붙들고, 원치 않을 땐 가차 없이 카메라를 물린다. <간지들의 하루>는 남은 토막 기록들을 재구성하지 않고 순서대로 이어 붙인다. 그 울퉁불퉁한 굴곡에 10대들만의 생기가 담겨 있다면 과장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답변 앞에서 세상 다 아는 오십 다 된 감독이 끊임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들을 눈여겨보라. 누가 위로받는가? <간지들의 하루>는 10대들을 위한 응원가가 아니라, 10대들이 불러주는 응원가다.

 

↘ 이영진 님은 영화주간지 《씨네21》에서 14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영화 보는 걸 귀찮아 해 동료들에게 일 안 한다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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