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 2012년 가을 살림,살림

[ 교육살림 ② 산골유학은 아이들이 직접 선택하고 책임지는 기회 ]

부모를 떠나 하루하루 도전하기

카스아줌마

올해 어느 봄날, 양귀비 꽃씨를 샀다. 봉투에 300립이라고 적혀 있었다. 300송이의 양귀비꽃을 상상했다. 하늘하늘 살랑살랑 움직일 터였다. 큰 꽃잎, 날씬한 줄기. 별빛공부방 선생님 중 한 분도 양귀비꽃이 좋다 했다. 화분에 한 무더기 담아 선물로 드리는 상상을 했다. 미리 말하지 않고 놀라게 해줄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양귀비, 내 기대를 저버리고 봉선화로 피어나다니


가끔씩 화단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는 나를 보며 같이 살면서 농사짓는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밭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마다 빵만큼, 아니 빵보다 장미가 중요하다는 눈빛으로 응대하며 하루하루 화단을 가꿨다. 작은 말뚝을 박아 실로 울타리도 해주었다. 남자가 물었다. “양귀비 새싹이 뭔지는 알고 풀을 뽑는 거야?” “아니 몰라. 근데 일정하게 나는 것들이 있네. 이거야 이거. 솟아오르는 싹이 새초롬하니 예쁘네.” 날씨가 점점 더워졌다. 내가 풀을 뽑은 덕에 예쁜이들만 남았다. 줄기가 빳빳하고 두꺼웠다. 그럴수록 난 더욱 확신에 차서 바라보았다. 사진보다 더 큰 꽃을 피울 건가봐, 더욱 눈부시게.
7월 여름이 시작되자 꽃망울이 터졌다. 이게 웬일인가. 큰 꽃이 아니라 작은 꽃망울들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내려다봤다. 봉…선…화…. 남자의 비웃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게 나를 속이다니.’ 기가 막혔다. 저 작은 집단생명이 미웠다. 장맛비가 온 뒤 풀들이 엄청나게 자랐지만, 풀이 자라든지 말든지 내버려뒀다. 그 속에서도 봉선화는 더욱 굵어진 줄기로 분홍꽃을 미친 듯이 피워냈다. 봉선화의 강건함이라기보다는 나를 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난 거의 100일 동안 양귀비꽃을 꿈꾸고 정성을 바쳤다. 씨앗을 뿌리고 물과 거름을 준 다음 내가 원하는 열매를 상상하고 자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배신당했다. 괴로웠다.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 뭔가 다른 것을 해야 했을까?



내 생각대로 아이들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


얼마 전 모 방송사의 스페셜다큐 기획팀이 우리 마을의 산골유학을 촬영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단다. 그동안 몇몇 방송사들이 취재를 왔던 터라 나는 더 이상 카메라가 신기하지도 않고, 오히려 촬영효과를 위해 연출을 주문하던 몇몇 관계자들에게 실망한 경험까지 있다. “야, 고구마 다시 한번 먹어봐. 아까처럼 말이야. 아까처럼 웃어봐. 맛있었니?” “저희가 시간이 없는데 어차피 내일 할 것 오늘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센터선생님들, 농가부모님들, 마을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결국 카메라에 찍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줄 것과 어떤 연출도 주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촬영할 것을 요구했다. 친절한 제작진은 수용했다. 그리고 3주 동안의 밀착취재가 시작되었다.
속상할 정도로 정직한 촬영이었다. 방송이 나간 후 나는 지인들의 감상소감을 듣게 되었는데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산골유학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잘 봤다. 아이들한테 참 좋겠다. 나도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이가 있으면(혹은 지금의 아이가 크면) 산골유학 한번 보내고 싶다.”라고 했다. 한편 우리 마을을 자세히 보아왔던 지인들은 “방송이 너무 아쉽다. 재미있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데, 카메라에 담지 못한 광경이 너무 많다. 우리(또는 그) 아이는 왜 안 나왔나?”라고 했다. 센터선생님들과 마을부모님들의 요구사항을 잘 지켜준 제작진들에게 감사하며, 동시에 작가가 구성한 이야기 흐름을 존중한다. 단지 이 글을 통해 나는 고백한다. “그 어떤 연출도 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찍어라.”라고 큰소리 탕탕 친 사람들 중 한 명이지만, 내심 계속 걱정했다는 것을. “남의 아이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설마 제 자식처럼 키울라고. 아이는 남에게 맡기지 말고 부모가 직접 키워야 해. 아무리 1년이라도 그렇지, 아이는 부모 곁에 있어야지. 그렇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하는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안에도 아직 그런 의문이 살아있기에 제3자는 우리를 보고 어떤 주제를 잡을지,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고 불안했다. 또한 내가 내심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맘껏 토해내는 웃음과 자연을 닮은 습관들이 카메라에 포착되어 방송을 타고, 그것들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을 발견했다.



‘아이’라는 씨앗이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일본 산골유학의 역사는 30년이 넘고, 우리나라도 이제 10년이 된다고 한다. 내가 있는 별빛마을은 이제 3년차다. 현재 우리 마을 유학생은 십여 명이다. 방학 때 4박 5일 정도 캠프를 하면서 센터선생님들과 상담하여 유학여부를 결정한다. 부모님, 특히 아이의 의사가 중요하며 쉽지 않은 일이다. 유학을 하려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고, 시간이 지난 뒤 만족 또는 불만족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아이의 나쁜 습관이 고쳐지고 부모님이 원하는 사항이 만족되면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인 산골유학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웃는 법과 좋은 습관을 가르쳐주는 또 하나의 학원이 아니란 말이다.
도시에서 살다 온 아이한테 산골의 모든 것은 낯설다. 낯선 것에 등을 돌리기도 하고 심심해 미쳐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게임을 하게 해 달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있는 게임시간이 끝날 때면 금단증상처럼 더욱 짜증을 낸다. 정성스레 요리한 나물반찬이나 김치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억지로 씹거나 물로 삼키면서 패스트푸드를 열심히 나열한다. 주변의 땅을 보며 평당 얼마인지 물어보고, 자기네 집이나 갖고 있는 물건은 얼마인지 말한다. 자기가 입은 옷은 얼마짜리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생명이 있는 것을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파괴한다. “저 뭐하나요? 뭐하고 놀면 좋을까요? 놀 것 주세요. 심심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러던 아이들은 산골에서 매일매일 작은 도전에 직면한다. 한 반에 5명에서 10명 정도 되는 친구들과 수업을 받는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개인지도라 할 만큼 세심한 학습지도를 받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가 있더라도 같이 놀기 위해 관계라는 끈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한다. 꼬마목공실에 가서 책상도 연필꽂이도 직접 만든다. 학교와 공부방 사이에 있는 작은 텃밭에서 감자, 옥수수, 참외, 수박, 상추 등을 심고 수확한다. 토끼, 개, 고양이 등 동물들의 먹이를 직접 주며 함께 자란다. 진흙에 맨발을 담근 채 손모를 심고, 황금색으로 길게 자란 벼를 낫으로 직접 베는 등 계절마다 중요한 농사일은 어른들과 함께 해본다.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많으니 밥 한 그릇 달게 비운다. 주말에는 마임축제 등 지역의 문화축제를 즐기고 명소를 방문한다. 듣기만 해도 아이들에게 무척 좋아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재미난 것들이 많아서 산골유학이 좋은 게 아니라, 아이들이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1년 동안 자신의 놀이를 직접 선택하고 책임지는 첫 발을 디딘다는 게 좋은 것이다. 하루하루 노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도전한다.
학교선생님, 공부방선생님, 마을사람들 그리고 도시부모님 등 수많은 어른들이 아이라는 씨앗을 심고 물과 거름을 준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혼자 해보는 시간을 주는 것도 물과 거름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생각처럼 꽃과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어떨까? 양귀비꽃이 피었으면 하고 씨앗을 심고 물과 거름을 주었는데, 봉선화가 나오면 어쩌냐는 말이다. 양귀비꽃 사건을 계기로 나는 아이들을 “내가 키웠어요. 우리 마을이 키웠어요. 산골유학생이에요. 예쁘죠? 이렇게 변했어요.”라고 자랑하고픈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어른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이 산골유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마다 피워내는 꽃의 종류도 다르고, 시간도 다를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준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 카스아줌마 님은 3년 전 서울에서 춘천 산골로 이사왔습니다.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 카스라 마을에서 카스아줌마로 불리웁니다. 아이들과 함께 배우며 놀고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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