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 2012년 가을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우리 땅의 생명을 늘린 우렁이농법을 창안하다 - 충북 음성 성미마을 최재명 씨

김성희

충청북도 음성군에 사는 농부 최재명 씨를 만나러 중부고속도로를 달렸다. 어쩐지 논에 사는 붕어나 미꾸라지, 우렁이 같은 게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았다는 이다. 음성나들목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2km가량 가면 대소면소재지에 이른다. 거기서 4km가량 더 달리면 오른쪽으로 최성미마을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서울을 떠난 지 불과 2시간도 안 돼 닿는 거리다. 행정구역으로는 금왕읍 대소면 성본3리. 최성미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피난 온 해주 최씨들의 세거지인 탓에 붙여졌다. 마을은 꽤 멀리까지 뻗은 비산비야의 펑퍼짐한 구릉에 안기듯이 들어서 있다. 논들은 구릉 사이로 흘러내리듯 마을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제 마을에 논은 별로 없고 대부분 밭뙈기들이 오밀조밀 낮은 구릉들 위로 펼쳐져 있을 뿐이다. 나중에 들으니 마을 농사의 대부분은 외지인들이 와서 짓는 인삼, 마, 토란 같은 환금 작물들이라고 한다.

 

 

“죄다 늙은이들 혼자 사는 집이니까….”
최재명 씨가 한숨처럼 흘리던 말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성미마을 어귀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있었다. 오래된 마을들에는 대개 마을 초입과 마을 뒤 산등성이에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 당산나무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셈이다. 그런데, 이 마을의 느티나무는 나뭇잎이 성기고 그나마도 대부분 시들어 있어 애처로웠다. 몇 해 전, 이 마을에 살다 돌아가신 최재두 한살림생산자연합회 회장의 장례식 때도 그 나무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그때 이미 나무는 시들어 있었다. 나무는 1989년, 한살림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단오잔치를 연 순간을 기록한 사진 속에도 등장한다. 사진 속의 나무는 마을을 다 뒤덮을 듯 우람했고 짙은 나무 그늘 속에 100명은 족히 될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한가로운 표정으로 단오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 한살림 초창기 소비자들과 이 마을 농민들, 그리고 몇 명 되지 않던 실무자들이었다.
“원래 두 그루였는데, 주차장하고 운동시설 만든다고 주변에 콘크리트를 뒤덮은 뒤로 이렇게 됐지. 결국 나무 하나는 죽어서 잘라내고, 한 그루는 저렇게 시들고 있어요.”
500살 가까이 되었다는 마을의 수호신은 이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친환경농업의 역사에 굵게 새겨져야 마땅한 이 마을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일흔 아홉, 8천 평의 농사를 혼자 꾸려가며

새벽에 들에 나왔다는 최재명 씨는 해가 뜨거워지기 전까지는 일을 하고 있을 테니 그리로 찾아오라고 했다. 구릉과 구릉 사이로 길게 흘러내린 논배미에서 해오라기나 백로들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일흔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고 표정이 맑았다. 평생 맑은 일만 하고 산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어떤 탈속한 이미지마저도 느껴졌다. 일을 하는 모습도 젊은 사람들처럼 완력으로 무엇을 제압하려기보다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리듬을 타듯이 부드러웠다.
그는 지금도 26,400㎡(약 8,000평) 규모의 농사를 혼자 힘으로 꾸리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마을 입구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대여섯 배미 논 가운데 맨 위에 있는 800평, 맨 아래 1,200평에는 벼를 심었지만 그 사이에 있는 농지에서는 우렁이와 새뱅이를 기른다. 새뱅이는 전라도에서는 토하라고 불리는 민물새우이다. 농약 치는 농사가 퍼지기 전에는 흔했던 새뱅이가 이제는 멸종위기생물이라고 한다. 맑은 물에만 살면서 물속의 유기물을 먹으며 13개월쯤 살다 죽기 때문에 따로 사료를 줄 필요는 없다. 다만 몰려드는 해오라기나 오리떼를 막기 위해 그물을 덮어두었다. 새뱅이는 최재명 씨 말고는 전남 강진의 청자골 정도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인근 하천과 수자원공사 등을 몇 년 동안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새뱅이를 번식시켜 겨우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맑은 물도 중요하지만 알에서 깬 새끼들을 어미들이 살던 논이나 수조에 넣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바짝 말렸던 논이나 수조에서 번식시켜야 하는 것도 그가 스스로 터득한 방식이다.
새뱅이양식을 하는 논 아래쪽으로는 길이 80m, 폭 6m가량 되는 비닐하우스 여섯 동을 세워 우렁이를 기른다. 수심 10cm 가량 물을 가두어 놓고 지하수를 가느다란 관에 연결해 계속 뿌려주면서 수온이 너무 올라가지 않게 해줄 뿐 특별한 시설은 없다. 우렁이는 먹성 좋게 부레옥잠 같은 물풀을 먹어 치운다. 우렁이가 너무 많은 칸에는 부레옥잠이나 물풀이 거의 남아나지 않고, 너무 적은 곳에는 주체할 수 없게 물풀이 우거져 있었다. 최재명 씨는 그 사이의 조절자다. 우렁이를 넣거나 빼면서 물속 생태계를 유지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렁이는 한여름에 물 온도가 섭씨 37도 이상이 되거나 겨울에 영상 7도 이하로 내려가면 대부분 죽는다고 한다. 살려서 겨울을 나게 하려면 삼중 비닐막을 쳐서 보온을 해주어야 한다. 그가 기르는 우렁이는 인근의 우렁이농법을 하는 농가들이 함께 쓰고 일부는 식용으로 팔려나간다.
논에 담가두었던 그물 어항을 건져 미꾸라지 몇 마리를 소쿠리에 털어내더니 점심을 함께 먹자며 자전거 뒤에 싣고 집으로 갔다. 미꾸라지와 우렁이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와 그가 기른 현미밥을 꾹꾹 눌러 담은 밥상을 받아놓고 두어 시간 더 이야기를 이어갔다.

 


 

양식을 하려다 우연히 발견한 우렁이농법

그가 처음으로 창안한 우렁이농법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미 열대지방이 원산지인 왕우렁이는 1983년경 농가소득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수입돼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그의 아들 최관호 씨도 1990년 겨울에 우렁이양식을 하겠다며 우렁이와 양식 도구 등을 사가지고 왔다.
“방안에서 기른다는데 여간 까다롭지 않아요. 겨울에도 섭씨 26도를 유지해 주라는데 시골집이라 아무리 불을 때도 20도가 안 돼요. 100만원이나 주었다는데, 평소에 뭐든 열심히 하라고 말해온 체면이 있으니 말릴 수도 없고. 애가 몇 달 끙끙대다가 결국 포기하고 논에다 다 쏟아 부었어요.”
그때부터 논에서 잡초가 사라지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을 계기로 관찰과 실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4년 우렁이농법을 완성한다. 그가 알아낸 방법은 이렇다. 200평 논을 기준으로 큰 우렁이 약 3kg가량을 준비해 알을 낳게 하고, 모를 내면서 낳은 새끼들을 논에 넣어준다. 큰 우렁이는 모낸 지 15일에서 20일가량 지나 모가 어느 정도 억세진 뒤에 넣어야 우렁이가 모까지 먹어치우는 걸 막을 수 있다. 우렁이는 논의 물속에서 싹터 오르는 풀을 깨끗이 먹어치운다. 우렁이가 아니었다면 노인들만 남아있는 농촌에서 맹독성 제초제에 의존하지 않고 벼농사를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충주에 귀농한 부부나 전남 장성 한마음공동체 남상도 목사 같은 이들이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풀 매느라 두 부부가 손톱이 뒤집어지도록 고생을 했는데, 이젠 삽 들고 물고나 봐주러 왔다 갔다 하니까 정말 세상 좋아졌다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해요. 그게 보람이죠.”
어지간한 기초단체들은 친환경농법을 권장하면서 우렁이 값을 대주거나 아예 우렁이를 사주는 식으로 농민들을 지원한다. 오리농법은 너구리나 들고양이 같은 짐승 피해도 많고 조류독감 우려도 있어 점차 우렁이농법이 대세가 됐다. 우렁이가 절감한 노동력이나 비용대체효과 같은 것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만약 이것을 창안한 최재명 씨가 셈 빠른 도회사람들처럼 특허나 실용신안 같은 것을 등록하고 로열티를 받았다면?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온 뒤, 농림수산식품부 친환경농업과에 전국에서 우렁이농법을 시행하는 농가수나 논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전화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몇 년 전 농촌진흥청과 환경부에서 우렁이가 겨울에 죽지 않고 월동을 하면서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는 해로운 외래생물이라며 제기했던 유해논쟁 때문에 따로 우렁이농법을 지원하는 정책을 고려하거나 실태를 파악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재명 씨 말로는, 전남 해남인가 남쪽에서 우렁이가 몇 마리 산 채로 겨울을 난 사례를 놓고 주로 학자들이 토론회에서 문제를 삼았지만 실제로 우렁이가 겨울에 살아남아 환경을 교란한 사례는 없었다고 한다.

 

 

마을도 사람들도 늙어가고 있다

지금처럼 사통팔달 포장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이 마을은 그저 주변의 펑퍼짐한 지형만큼이나 한가롭고 조용했다. 1980년대만 해도 인근 무극까지 버스를 타고와 비포장길을 한 시간 걸어 들어와야 하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 이 마을에는 격정적인 에너지가 끓어 넘쳤다.
“아, 박정희 정권하고 지겹게 싸웠지. 유신통치 철폐하라! 긴급조치 철폐하라! 쌀값 보장하라! 허허.”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할 것 같은 인상인 그의 입에서 나온 ‘지겹게도 싸웠다’는 말이 조금 낯설었다. 이 마을은 가톨릭농민회(가농)의 역사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40여 호나 될까 싶은 작은 마을에 가농회원이 무려 18가구나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
“마을에서 처음 가톨릭을 받아들인 건 우리 어머니였어요. 1960년 무렵인데, 그때는 무슨 일이 있으면 다들 무당집에 가서 굿을 하고, 집안에 뭘 잘못 건드리면 동티난다고들 하고 그랬잖아요. 내가 결혼을 하고나서 군대에 가 있을 땐데, 안식구가 마당에 두레박질하는 우물을 팠어요. 주위에서 괜한 짓을 해서 동티날 거라고 수군댔지. 그런데 누가 천주교 믿고 성당에 다니면 그런 거 다 괜찮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때부터 우리 어머니가 장호원 성당에 나가시게 됐어요.”
1966년에 결성된 가농은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권위주의 통치에 맞서 가장 ‘전투적인’ 농민권익 보호운동을 펼쳤다. 1982년 인근에 있는 무극성당에서 벌어진 ‘부당농지세시정 농민대회’는 오월항쟁 이후 숨도 쉬기 어렵도록 억눌려있던 분위기를 일거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경찰 봉쇄를 뚫고 모여든 농민 1,500명이 외친 ‘부당한 농지세 폐지하라’는 외침은 5공화국의 철권통치에 균열을 냈다. 40대 중반 혈기 왕성했던 그는 동생 최재영 씨와 함께 역사의 현장을 지켰다.
최재명 씨가 생태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동생 최재영 씨와 그 자신이 농약중독을 겪고 난 뒤부터다. 동생은 담배밭에 농약을 뿌리다 쓰러진 뒤 몇 달 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그도 고추밭에 농약을 뿌리다 쓰러져 10여일을 앓아누웠다. 그 뒤로는 가정용 파리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 한동안 고생을 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가농에서는 점차 생명농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었다.

 

 

무소유공동체 실험과 좌절

최재명 씨 형제가 무농약 농사를 실천하는 일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원래 제초제는 안 쳤고, 이화명충이나 매미충약도 끊었더니 첫해에는 반이나 거뒀나? 그 다음해에는 조금 낫고, 한 삼 년 동안은 제대로 소출이 없었어요. 농사지은 쌀도 어디 따로 낼 데가 없으니까 그냥 정부수매에 일반 쌀과 섞어서 낼 수밖에 없었고….”
당시만 해도 유기농을 실천하는 일은 단순히 줄어드는 소출을 감내하는 것만이 아니라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갖은 협박과 회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농촌지도소에서 나와서 주인 허락도 안 받고 논에다 빨간색 삼각형에 ‘방제’라고 쓴 팻말을 박아놓고 가요. 나는 죄 뽑아서 내동댕이쳤지. 그 사람들도 난처해요. 상부에서 하도 볶아대니까 남의 논에 무작정 뛰어들고 그랬으니….”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한 살 아래인 부인 원정애 씨는 사사건건 정권에 맞서는 남편의 활동을 당시에는 말리고 싶었다.
“아, 말리고 싶었죠. 군에서 시키는 통일벼 안 하고 다른 볍씨 못자리 만든다고, 남의 집 방안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그걸 죄 뒤집어 버리지 뭐예요. 그래서 농사꾼이 어련히 자기 농사 알아서 할까봐 이런 짓을 하느냐고 막 항의를 했죠.”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세상이 변한 것 같다. 공무원들의 그런 행동을 지금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하기 어렵고, 지자체들이 나서서 우렁이를 사주며 친환경농사를 권하는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농약을 쳐선 땅도 나도 못살겠다 싶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싫어하는 일이니까 반독재 투쟁한다 싶어 더 열심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고집이 있는 사람이니 더 열심히 농사지었지. 퇴비도 많이 넣고 두어 해 지나니까 소출도 엇비슷해졌어요. 공무원들이 소출 줄어든 걸 조사해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나섰는데 한 마지기에 두 된가, 0.03 프론가밖에 차이가 안 난 거야. 그래서 상부가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그대로 보고하라고 했지.”
지난 이야기를 하며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웃으며 회고할 수 있는 옛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상대대로 농사짓던 방식으로 돌아가는 길을 다시 열어젖히기까지 최재명 씨 같은 선구자들이 치른 대가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0~80년대를 앞서 가던 성미마을의 선구적인 실험들은 안타깝게도 꾸준히 성장하지는 못했다. 한살림이 출범하던 무렵, 마을의 10여 가구 가농회원들은 이미 ‘함께 경작하고 함께 소득을 분배하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시작했다. 내 것 네 것 없이 함께 농사짓고 농사에 필요한 자재도 공동기금에서 지출하며 ‘함께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실험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간 이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당시에는 이들의 생산물을 안정적으로 소비해줄 소비자조직이 미약했다. 초창기의 한살림도 불과 몇 백 세대 회원들로부터 시작한 수준이었다. 가톨릭의 서울 본당 신부님들이 판매를 알선해주기도 했지만 역시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십여 명의 젊은 농부들이 시금치도 일구고 상추도 길렀지만 하루에 주문이 들어오는 양은 불과 몇 십 봉지가 되지 않았다. 노임은 고사하고 운송비용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완전한 무소유공동체도 아니어서 자기 농사를 지어 따로 내다 팔고 공동기금에는 넣지 않는 사람도 생겨나고, 누군가는 그것을 불편해하기도 했다. 형편이 좋았다면 그런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과 피로가 이들의 신경을 예리하게 벼려놓았다. 그 무렵 독일의 가톨릭단체인 미제레올에서 가난한 한국 농촌의 대안공동체를 지원하겠다며 성미마을에 농지 1만 평가량을 살 기금을 제안했다. 대신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농토를 공동체로 귀속시키고 거기에 미제레올이 지원하는 1만평까지 합산하는 조건이었다. 말 그대로 ‘공동소유 공동경작’의 대안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사적소유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 채 더 높은 수준의 결사체로 나아가는 일은 실패하고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물론 최재명 씨가 우리나라 논농사의 기본 환경을 바꿔놓은 일만으로도 대단하긴 하지만 이 마을 농부들의 도전이 계속 이어졌다면 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논에 사는 붕어, 미꾸라지, 새뱅이, 우렁이 같은 게 참 좋았어요. 새뱅이를 살려낸 것도 누가 시켜서 한 건 아닌데, 멸종위기라는데 누가 이어받을지….”
그는 지금도 어린 시절 논가 둠벙에서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던 때처럼 맑은 표정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일흔아홉 살의 그는 여전히 건강하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다. 논의 둠벙을 키우고 맑은 샘물로 우렁이와 새뱅이를 살려낸 이 일이 이어질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새뱅이를 1kg에 5만 원씩 500kg가량 내고 있는데, 여러 가지 비용을 제하면 누군가 이어받아 생계를 꾸려갈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껏 자기 몫의 일을 다 했다. 살다 간 어떤 이들이 사회에 이런 족적을 남길 수 있을까? 그의 족적을 어떻게 이어갈지 선택은 우리 사회가 하게 될 것이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