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 2012년 가을 [특집] 마을, 마을사람들

[ 생산자 공동체 마을만들기 : 전북 부안 산들바다공동체 ]

일도 놀이도 신명나게, '무공해' 농부들

김세진 편집부

당산나무답다. 전북 부안 변산면, 마포마을과 산기마을 사이에 있는 팽나무는 나무기둥 셋이 서로 휘감은 채 하나처럼 자라 울창하게 뻗어 있다. 사이좋던 세 친구가 그곳에 묻혀 서로 보듬는 것이라는 전설 덕인지, 이곳 사람들은 의가 좋다.


당산나무 살리기, 마을문화 살리기

35년 전까지 정월대보름이면 당산나무 아래에 7개 마을이 모였다.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었다. 농사를 짓기 전 마지막 노는 날이라는 생각에 마을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성이 다른 세 집 이상의 밥을 아홉 번 먹어야 복이 온다는 말 때문에 종일 밥을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로 다투어 서먹해진 관계는 한바탕 놀면서 회복되었다.

그러던 마을이 쓰렁쓰렁해졌다. 1970년대 산업화바람이 불어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갔고,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집회하기 어려웠다. 마을마다 종교가 다른 것도 한몫했다. 기독교와 원불교와 천주교로 갈렸고, 특히 기독교는 당산제가 미신이라며 금했다. 어느새 마을의 중심이던 당산나무가 뒷방 신세로 밀려났다. 주변도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바로 앞에 들어선 김공장은 당산흘려보냈다. 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마을사람들 누구도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사장은 외지인이지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받는 이들은 마을사람들이라 조심스럽기도 했다.

2007년 마을에 새 바람이 불었다. 마포와 산기마을의 두 이장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뜻을 모았고, 주민 총회에서 ‘꿈을 이루는 마포리 만들기’를 결성했다. 먼저, 민원을 넣어 개인 소유지였던 공장 부지를 군에서 사도록 했다. 그곳은 공원이 되었다. 개천 따라 꽃을 심고 운동기구를 들였다. 또 폐교인 마포초등학교는 ‘부안생태문화활력소’라는 마을공동체문화공간이 되었다. 마을 이장들, 마을풍물패인 천둥소리와 변산공동체, 지역신문인 <부안21>, 산들바다공동체가 운영위원회로 함께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리모델링했고, 역사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문화공간, 농도 교류공간, 그리고 주민활동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산들바다공동체가 도시 소비자와 함께 단오잔치를 했던 이곳에서 2년 전부터는 운영위원회가 주최해 정월대보름 행사를 열고 있다.

산들바다공동체 회원 17가구가 모두 마포리에 살고 있진 않다.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변산면 도청리와 지서리, 진서면 운호리 등에 흩어져 산다. 공동체 회원 중 2/3가 귀농자이고 각기 흩어져서 유기농을 짓던 사람들이 나중에 연대한 형태이기도 해서 모두 한곳에 자리 잡진 못했다. 하지만 마포초등학교를 거점으로 자주 모인다. 하도 들락거리니 마을사람들이 아예 이들을 ‘명예주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네가 애국자여

마포·산기마을 50~60가구 유기 농사를 짓는 집은 세 집이다. 모두 산들바다공동체 회원.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해도 사람들이 탐탁찮은 눈으로 지켜봤다. 걸핏하면 전염병이 돌아 농사를 망치거나 팔릴 것 같지 않은 못난이들을 내놓아서다. “고추에 탄저병이라도 돌면 전부 망혀. 어쩌려고 그려.” 걱정했던 사람이 몇 년 후에 “자네, 먹고사네 그려” 이러더니 지금은 “자네가 애국자여” 한다.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밭에서 비닐을 태우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태우지 않는다.

‘시금치, 냉이, 양배추 등 겨울채소를 내면서부터 산들바다 생산자의 집이 사랑방이 되었다. 노지 채소를 키우니 일이 많아 도움을 청했다. 노인들은 한가한 겨울에 용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배달시키거나 빵과 우유로만 대신하는 집이 여럿이다. 산들바다공동체 식구들은 참 하나라도 따뜻하고 맛있게 내려고 했다. 누군가 지나가면 와서 밥 먹어라, 술 한잔 하고 가라며 불렀다. 땅과 생명을 살리는 유기농을 하면서 밥을 대충 때우는 식으로 대접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미료를 안 넣고도 할머니 입에 감칠맛 나게 만들려니 부지런히 연구해야 했다. 정성이 들어간 제철 반찬을 내니, 할머니들이 요리법을 물어오기도 한다. “무공해 각시들은 참 잘혀.” 유기농이라는 말이 어려워 무공해로 이해한 할머니들이 그렇게 칭찬했다.

인기쟁이 ‘산기할머니다듬이예술단’

겨우내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 이런저런 이야기판이 벌어진다. ‘시금치 작업이 끝나면 이제 무얼 하고 놀까?’ 시간이 나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화투를 치며 무료하게 보내기 십상이었는데,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다듬이질을 해보자고 했다. 젊은 생산자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다듬이를 수집했다. 낡은 괭이자루를 잘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다듬잇방망이를 쥐었지만 할머니들은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도움이 될까 해서 난타 선생님을 불렀다. 이번에는 빠른 박자를 따라하는 게 힘에 겨웠다. 할머니들만 남았다. 툭탁툭탁 한 분이 민요를 불렀고 누군가 거기에 박자를 맞췄다. ‘도라지타령’, ‘노들강변’은 그렇게 선정된 곡.

공연할 기회가 생겼다. 한살림 농도교류 행사로, 마을에 온 도시 아이들에게 보여주게 된 것이다. 다듬이질을 처음 본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자, 할머니들이 신이 났다. ‘산기할머니다듬이예술단’ 데뷔 날이었다. 대부분 산기마을 할머니로 구성되었는데 한 분이 마포마을 할머니라 ‘예술단 이름에 산기를 빼야 하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마포 할머니의 한마디에 결론이 났다. “괜찮여. 나도 산기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할머니예술단은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인기몰이로 번 출연료와 공연비를 차곡차곡 모았다. 단복도 맞추고 간식도 사 먹고, 나머지로는 냉장고 같은 공동비품을 떡떡 사서 내놓았다. 평생 어디에 나선 적 없고 마을에서 큰소리 낼 일이 없었던 할머니들이 자존감이 높아졌다. 처음엔 쑥스러워하던 단장할머니도 달라졌다. 멘트가 길어졌다.

도시 사람들이 자주 오니 마을에 활력이 생겼다. 도시 조합원과 산들바다공동체가 맺은 끈끈한 관계 덕이다. 옛 마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는 단오행사에는 500여 명이 모인다. 돼지도 잡고 창포물에 머리 감고 씨름도 하면서 한바탕 논다. 그 외에도 생산지 견학과 일손돕기로 수시로 들락거린다. 여름, 겨울에는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온다. 할머니들은 다듬이 공연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송편을 빚고 두부도 만든다. 할아버지들은 짚풀공예를 가르친다. 이날을 위해 미리 공예를 배웠었다. 나라에서 지원받은 1,000만 원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열었고, 할아버지는 한때 잊혔던 짚풀 다루는 법을 다시 익혔다. 삼태기, 씨오쟁이 등 그럴싸한 작품이 쌓였다. 마을회관 2층을 증축해, 짚풀전시문화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할아버지들도 신이 났다.
 
어르신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걸 해보시라고 바람을 넣던 생산자들이 어느새 뒤로 빠졌다. 언뜻 허전하기도 했지만 마을 일은 마을사람들이 앞장서는 것이 바람직하니까. 스스로 (명예)마을사람이니 마을 일을 하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 산들바다공동체는 유기농부의 결사체라, 지역사람들에게 문턱이 너무 높게 느껴질까 긴장하고 있다. 그 간극을 문화로 메우고 싶은 바람이 조금은 이루어졌다.

생산자들도 모여 놀면서 문화를 만들어 간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가 생기면 불러 모아 먹고, 여성 생산자들끼리는 가끔 시내에 영화도 보러 간다. 딱 하나 남은 총각을 장가보낼 때는 인근 바닷가에서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사방으로 알아보고, 뒤풀이 일손을 도왔다. 사람들은 그가 공동체 덕분에 장가를 간다고 큰소리치고, 그도 딱히 부인하지 않는다. 아들 이름도 ‘산들’이라고 지었다.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애정 어린 말이 오간다. 유기농한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그러면 안 된다”고 조언하고, 부부관계의 어려움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 도움을 얻기도 한다. 누가 상이라도 치르면 그 집에서 몇날 며칠이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마을에서 하고 싶은 건 특별한 게 없다. 그저 이런 거다. “입 딱 벌어지게 노는 거죠, 뭐. 누구든 함께하고 싶게….”


생산자가 말하는 ‘산들바다공동체’
산, 들, 바다처럼 어울려 살아볼랑께

생산자 공동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니, 한둘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단다. 장소를 세 번 옮겨 스무 명 남짓의 생산자를 만났다. 회원들 사이에 민주적인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더니, 여론 형성도 과연 민주적이다. 산들바다공동체는 이런 곳이다.

시작은 1983년이예요. 정농회에 있던 정경식 씨가 농민운동을 하던 오건 씨 농장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봐요. 1986년에 농민 활동가들과 함께 ‘전북 자연농실천농민회’를 조직했어요. 1992년에는 전주 지역 소비자와 ‘한울공동체’를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도농 직거래를 시작했어요. 당시 소비자가 150명, 생산자 농가가 여덟 가구였어요. 1990년에 한살림과 인연을 맺어요. 2002년에는 조직의 앞날에 대해 이견이 생겨 '한울공동체'를 해체했고, ‘산들바다공동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중점은 민주적인 관계로 두어요. 공동체가 잠시 어려운 일을 겪은 후에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그때 서로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를 잘 맺어보자고 이야기했어요. 생산과 유통에서도 형평성을 유지하고요.
 

소통은 이렇게 해요. 나이와 연한에 상관없이 모든 회원이 돌아가면서 직책을 맡고, 회장의 임기는 2년으로 제한했어요. ‘전 회원의 간부화’라고 할까요?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처음엔 잘할까 싶은 사람도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곤 해요. 생산과 유통과정에서도 형평성을 지킵니다. 작목 계획을 세울 때 전 품목을 1/n로 나눕니다. 한 생산자가 한 가지 작물만 내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를 길러서 자급자족하기 위해서죠. 윤작과 휴경 계획도 함께 세워요. 월례회의를 할 때, 서로 충분히 논의하고 토론하죠. 그러다가 새벽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만약 우리와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3개월 정도 서로 적응하는 시간을 두고 결정합니다. 강요하지 않고 충분히 이야기해요. 우리는 벼, 마늘, 양파, 단호박, 양배추, 시금치, 냉이, 봄동, 무 등 여러 작물을 키워 내는데요. 새로운 사람에게는 비교적 기르기 쉬운 단호박 등의 작물을 생산하도록 합니다.

정착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특히 지서리와 운산리에는 귀농자들이 많은데요, 품앗이를 하면서 많이 친해져요. 일을 거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막걸리도 하죠. 또 동네에 젊은사람들이 없어서 어린아이들을 많이 예뻐해 주세요. 젊은이들이 농사짓겠다고 오는 걸 기특하게 여기시기도 하고요. 텃세요?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서로 아는 사이에 낯선 사람들이 오면 궁금한 게 당연하죠. 귀농한 사람들이 그걸 간섭이라고 여기면 힘들어져요. 외부인들이 마을사람이라고 인정받기까지 세 단계가 있는 것 같아요. 농사를 지으면 살려나 보다 하시고, 농지를 구입하면 오래 살겠구나 생각하시고, 집을 지으면 비로소 여기에 눌러 앉겠구나 생각하세요.

여성은 서로 만나는 걸 좋아해요. 수시로 만나서 아이들 얘기, 남편 흉을 보면서 수다를 떨죠. 여성들끼리 있으면 더 말이 잘 통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남녀가 비교적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어요. 농촌 생산자 조직이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체 임원 여섯 명 중에 두 명이 여성이고, 대외활동도 열심히 해요. 참,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도 열심히 했어요. 여성 생산자 여덟 명이 삭발 투혼을 발휘했을 정도이니까요.

운동은 지역 사안에 열심히 참여했어요. 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할 때, 꼬박 1년을 매일매일 낮엔 농사짓고 밤이면 집회 현장에 갔어요. 그 때문에 옥살이한 사람도 있고, 벌금형은 여러 명이 받았어요. 부부가 다 핵폐기장반대위원회 일을 해야 해서 생계가 힘든 집에는 얼마씩 밥값을 주기도 했어요. 생명을 살리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핵은 꼭 막아내야 할 것이지요. 참, 얼마 전엔 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을 했어요. 평생 살 곳인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지켜야죠. 산과 들과 바다가 다 있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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