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 2012년 가을 [특집] 마을, 마을사람들

[ 오래된 도시마을 되살리기 : 서울 장수마을 ]

고치고 가꾸며 사람들이 뿌리내리는 마을

이선미 편집부

 

220세대, 500여 명이 모여 사는 장수마을. 서울성곽 바로 아래에 터를 잡아 마을을 오르다보면 금세 숨이 찬다. 몇 년은 재개발이 될 거라는 기대에 술렁였고, 몇 년은 재개발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재개발이 아닌 ‘조금씩, 천천히, 스스로 하는 개발’로 생기를 되찾고 있다. 장수마을은 비로소 ‘정든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을’이 되었다.


 

재개발을 넘어선 조용한 모험

2007년은 재개발이 정점에 이른 해였다. 정든 집이건 오래된 골목이건 모든 것을 부수고 밀어버리는 식이었다. 작은 집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층층이 높은 대형건물이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건물에는 시멘트와 페인트가 풍기는 ‘새것 냄새’가 물씬 났다. 이전에 여기 누가 살았고, 무엇이 있었는지를 까맣게 잊게 만드는 냄새였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늘 지는 쪽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그럼 이 후진 동네를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낼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답 없이 싸우는 것에 지치고, 힘이 들었다.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개발도, 재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아닌 제3의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2008년 5월부터 장수마을에서 시작된 것이 대안개발이다. 전면 철거와 같은 기존 재개발 방식이 아니라 대안적 방법으로 마을사람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던 삼선4구역, 일명 ‘장수마을’에서 조용한 모험이 시작되었다.

 

 

이웃과 삶을 나누며, 마을을 스스로 바꿔간다
재개발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원래 살던 사람들이 더 이상 지금 사는 곳에서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1~2,000만 원 전세를 살던 사람들이 많게는 3,000만 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고 집을 비워야만 하는데, 이 돈으로는 다른 곳에 셋집을 구하기 어렵다.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는 보상금으로 들어가 살기에는 너무나 비싸다. 결국 재개발은 정든 마을을 떠나 또 다른 낙후된 동네로 이주해야 하는 이유일 뿐이다. 게다가 장수마을은 경사가 심한데다가 국공유지에 지어진 집들도 꽤 있어서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거기에 수익성까지 낮으니 재개발이 차일피일 미뤄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결국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그러니 현재 사는 집과 주변환경을 고치고 가꾸자’였다. 마을사람들이 감당할 수준의 점차적인 개선을 목표로 했다. 재개발 아니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삶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마을기업인 동네목수에서 골목에 있는 낡은 평상을 수리한 적이 있다. 나무만 조금 바꾸었을 뿐 크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오며가며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골목 커뮤니티가 살아났다. ‘다섯이 모이면 골목이 바뀐다’는 주민공모도 마찬가지다. 주변 이웃 다섯 명의 동의를 얻어서 마을에서 고치고 싶은 부분을 신청하면 동네목수에서 관할 구청 등에 문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이웃의 동의를 얻기 위해 서로의 사정을 챙기게 되고, 이렇게 생긴 개인적인 관심과 유대감이 마을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재개발에 익숙했던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바꾸는 일은 다른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눈에 띄게 깨끗해진 마을환경만 봐도 알 수 있다. 2008~2009년 사람들이 재개발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마음을 잡지 못할 때는 마을이 온통 쓰레기로 정말 지저분했다. 하지만 어느새 내집과 골목을 가꾸는 사람들로 마을은 많이 깨끗해졌다.

 


그저 별일 없이, 여기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
장수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로 불린다. 누군가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저렴한 주거지가 필요하다. 장수마을은 어려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싸고, 쾌적하고, 따뜻한 동네가 되면 좋겠다고 한다. 오래되고 낡은 빈집을 고쳐서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최근에는 수리된 집에 들어와 살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전망과 경관이 멋져서, 마을 분위기가 맘에 들어서라고 한다. 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고 내부구조가 특이한 점을 좋아하기도 한다. 저렴한 집값이 장점임은 물론이다.
외부의 관심과 지원은 때때로 어려움이 되기도 한다. 마을만들기 사업견학을 한다고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와서 마을을 들쑤셔놓는다. 성의 없이 마을을 둘러보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나?”라고 말하면 속이 많이 상한다. 방송 촬영을 계속 거부하니 몰래 와서 찍어가기도 한다. 마을에 무언가를 지원하고 홍보한다며 사람들에게 연출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장수마을이 언론 등에 자주 노출되자 집세를 올리는 집주인도 있었다. 서울시는 서울성곽과 장수마을을 묶어 역사·문화특화마을로 조성하려고 한다. 인사동이나 삼청동처럼 마을사람들은 배제된 관광지가 되어버릴까 걱정이다. 사람 사는 곳에 테마가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장수마을에는 아직 수리해야 할 집이 많고, 마을사람들 스스로 해볼 일도 많이 남았다. 마을만들기는 그곳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억지로 주제를 덮어씌울 필요도, 거창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어느 한 쪽의 의견만을 고집할 수 없기에 절충과 타협이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장수마을에는, 사람들이 산다.
장수마을 블로그 samsun4.tistory.com

 

인터뷰 ● 장수마을 동네목수 박학룡 대표
“동네가 통째로 마을기업이 되면 좋겠어요”
장수마을이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사는 진짜 공동체가 되었으면

 

인터뷰 당일에도 박학룡 대표는 무척 바빴다. 집수리 작업을 하다가 잠시 짬을 냈다고 했다. 늦은 점심을 급하게 해치운 박 대표와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자재 배달이 출발했다는 것에서부터 마을 누구네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것까지 용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요즘 빈집을 수리하는 일이 있어서 좀 바쁩니다. 이 집은 다 고쳐지면 새로운 사람들이 바로 들어와서 살 거예요. 빈집을 수리할 때 동네목수에서 먼저 세입자를 찾기도 해요. 그러고 나서 세입자가 내는 보증금을 집수리비로 충당하는 거죠. 그럼 집주인은 당장 목돈이 없어도 우선 집도 고치고, 세도 놓을 수 있어서 부담이 덜합니다.”
처음부터 마을기업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2008년 당시 녹색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박 대표는 철거재개발 방식에 대응하여 대안적이고 친환경적인 주거개발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오랫동안 살아온 삼선동에 있는 장수마을에서 주거권운동네트워크, 도시연구소 등과 함께 이를 실행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면서 장수마을에는 낡고 위험한 집을 고치고 주변을 가꾸는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 일을 마을사람들 스스로 지속적으로 해나갈 방법을 찾다보니 마을기업에까지 이르렀다. 지난해 초에 서울시에서 마을기업을 공모할 때 신청해서 선정됐고, 6월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동네목수는 무료로 일을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마을기업도 엄연한 회사니까요. 비용을 낸 이상으로 일을 해주는 경우야 종종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을 의뢰한 사람이 비용을 냅니다. 자기 집 수리비용은 자기가 내는 거죠. 그 밖에 마을 외부에서 일감을 받아 일하기도 하면서 매출을 내고 있습니다.”
집 고칠 준비는 마쳤지만 정작 집주인이 집을 고치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도 많다. 어찌 됐든 집에 좀 더 투자하는 일을 꺼리기 때문이다. 재개발을 기대하고 웃돈을 주어 집을 사놓았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집주인을 설득하는 일도 많이 합니다. 이 집으로 이득을 얻기 위해서라도 집을 고치고 관리해야 한다고요. 장수마을은 재개발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그러니까 기약없는 재개발을 기대하기보다는 집을 수리해서 가치를 높이는 편이 집주인에게도 좋은 거죠.”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둘 일을 맡기는 추세다. 덕분에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마을사람들이 동네목수에서 함께 일하게 됐다. 좋은 점은 마을사람들에게 소득이 생긴 것이다. 동네를 고치면서 소득을 올리고, 그 소득으로 자신의 집을 고치는 선순환이다. 게다가 가까이 사는 이웃들과 함께 일하니 그것도 재미있다.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고 사이도 가까워진다.
“동네목수에서 마을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같이 돈도 벌었으면 좋겠어요. 옛날에는 옆집 엄마랑 같이 품을 팔러 가서 삯을 받아 오는 일이 흔했잖아요.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집이 수리되고 동네가 정비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수입도 있어야 하니까요. 동네카페를 연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동네목수가 빈집을 수리해서 만든 카페인데, 마을사람들이 일하도록 할 거에요. 그럼 소득도 생기고 카페 수입도 생기겠죠. 카페 수입은 마을을 위해 쓸 거고요. 마음 같아선 동네가 통째로 마을기업이 되면 좋겠어요.”
지금이야 동네목수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가지로 체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마을사람들 스스로가 온전히 동네목수를 운영해가기를 기대한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을 맡아 하기 어렵기에, 그때까지만 지원하고 싶은 바람이다. 장수마을사람들이 곧 동네목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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