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 2012년 가을 살림,살림

[ 제철살림 ]

나물 말리는 계절, 나물 무치는 행복

장영란

 

 

철마다 바뀌어 밥상에 올라오는 나물에서 가을이 느껴진다. 꾸덕꾸덕하게 마른 애호박나물에서 바람의 감칠맛이 나고, 보랏빛이 진해진 가지나물에는 햇살의 기운이 담긴다. 여기에 손맛을 더하니 언제 먹어도 새로워 질리지 않는다.

 

제사가 없는 집에서 자란 나는 결혼 후 시댁의 제사문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한발 물러서 “예예” 하며 시키는 일을 했지만, 그것도 연차가 올라가니 편치 않았다. 그러다 제사 일에 내 자리가 생기면서부터 많이 편해졌다. 바로 나물 무치는 일이다. 시골에서 살다보니 이른 봄 냉이부터 시작해 철철이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인 나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그날 싱싱한 나물 반찬 한두 가지를 하지 않으면 밥상을 제대로 차린 것 같지 않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시댁 또한 나물 반찬을 즐기는 터라 어머니는 이런저런 나물거리를 푸짐하게 마련해 놓으신다. 손수 농사지으신 참깨로 참기름도 짜놓으시고 깨소금도 새로 볶아놓으시니 이걸 조물조물 무치는 손길이 어찌 흥겹지 않으리오. 이렇게 나물 무치는 게 손에 익으니 어느덧 제사나물이 내 손으로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나는 제사나물이 참 좋다. 양념을 여러 가지 넣지 않고 간장으로만 간을 해서 참기름에 깨소금만 넣은 나물들은 맛이 담담하고 강하지 않아 서로 잘 어울린다. 차례를 마치면 큰 양푼에 제사나물들을 넣고 제삿밥을 비벼 온 식구가 나눠먹는데, 나물을 즐겨 먹지 않는 아이들도 제삿밥만큼은 맛나게 먹는다.

 


계절 따라 어떤 재료든 완전식품으로 만든다

 

나물 재료는 채소 잎과 줄기, 뿌리만이 아니라 나무 순, 산이나 들 그리고 바다에서 자라는 풀까지 뭐든지 다 오케이다. 먼저 나물거리를 물에 살짝 데쳐 숨을 죽인 뒤, 물기를 꼭 짜 한입에 먹기 좋게 손질한다. 그러고 나서 간장(때로는 된장이나 고추장)으로 간한 뒤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무치기만 하면 된다. 물론 무채나물처럼 날채소를 소금에 절인 뒤 양념에 무치는 생나물도 있고, 기름에 들들 볶거나 들깨를 갈아 국물이 자작하게 만드는 볶음나물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건 데친 채소를 장류로 간해 무쳐 먹는 무침나물이다.
나물이 우리 몸에 얼마나 좋은지 한번 생각해 보자. 채소를 날로 먹는 샐러드는 싱싱하게 먹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 접시를 먹어도 실제 먹는 양은 얼마 안 된다. 나물요리하듯 살짝 데치면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또 날로 먹으면 아삭거려 좋지만 다양한 채소를 먹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쓰거나 독성이 있는 나물도 물에 우려내거나 소금물에 데쳐서 길들여 먹는다.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노인까지 누구나 먹을 수 있으며, 콩나물처럼 날로 못 먹는 채소까지 맛나게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날채소는 많이 먹으면 몸이 차지므로 몸이 찬 사람이나 추운 겨울에 권장할 만한 음식은 아니다. 그래서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더운 계절에 주로 생나물을 해 먹고, 추운 겨울에는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어 찬 기운을 중화한다.
대량사육으로 기르는 육식보다 유기농 신토불이 채소를 권장하는 웰빙 정신에 맞는 요리법으로 나물만한 게 또 있을까? 채소를 골고루 그리고 듬뿍 먹게 하면서도 콩을 주원료로 하는 발효식품인 장류로 간한다. 여기에 참기름이나 들기름 한 방울과 고소한 깨소금으로 마무리하니 채소를 완전식품으로 만들어 주는 요리법이다.

 

 


어머니 지구를 느끼며 나는 더욱 평화로워졌다

 

서점에 갔다가 세계요리책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책, 구리하라 하루미의 《전하고 싶은 일본의 맛》을 만났다. 일본인이 세계인에게 전하고 싶은 첫 번째 요리가 뭘까? 채소를 데쳐서 일본식 양념인 가다랑어 국물이나 맛간장에 담가먹는 ‘오히타시’라는 이름의 반찬, 바로 나물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뿐만 아니라 독일, 스페인 등 서양에도 나물과 비슷한 음식이 있다고 한다. 세계 곳곳에 나물요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우리나라처럼 흔히, 그리고 온갖 재료로 요리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중함을 모를 뿐 아니라 밥상에서 점점 외면하고 있으니,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 과연 나물이 몇 가지나 남아있을지 걱정이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지구를 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고 ‘가이아 여신’이라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어머니 지구’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대대로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어머니 지구를 우리 인간들이 몹시 괴롭히고 있으니 언제 꿈틀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지구의 마음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나 기도를 하면서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어머니 지구에게 전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대립이 아닌 소통을, 독재·독점이 아닌 민주주의를 바라는 흐름에 요즘 일어나고 있는 채식의 물결 또한 속할 것이다.
동물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 수 있다. 거기 견주면 식물은 주어진 그 자리에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백 년 한살이를 한다. 화려하고 독특한 맛의 별의별 음식이 우리 욕망을 자극하지만 돌아보면 어느새 단순한 나물 반찬이 그리워진다. 젊어서는 한없이 번거로워 보이던 나물요리도 손에 익으니 쌀 씻어 밥하듯 일상이 되었다. 나물을 맛나게 무쳐먹으며 내 몸도 지구별도 평화롭기를 빈다.

 

 

가장 중요한 손맛, 어떻게 낼까?


① 일단 자주 해 먹어 손에 익어야 한다.
② 신선한 제철재료를 쓰고, 되도록 한끼 먹을 만큼만 해서 즉석에서 다 먹어버리면 좋다. 한여름에는 풋오이를 먹다가 찬바람 부는 가을에는 늙은 오이를 즐기듯.
③ 양념이 맛을 좌우한다. 참기름이나 들기름은 공장에서 화학용매를 넣어 분해한 것이 아니라 동네 방앗간에서 재래식으로 짜낸 것이 좋다. 깨소금도 참깨나 들깨를 볶아 준비해 놓는다. 양념 가운데 나물의 감칠맛을 좌우하는 건 장맛이다. 나물은 조선간장으로 무쳐야 맛나는데, 조선간장으로 자연의 감칠맛을 더한 맛간장(2011년 봄호 기사 참고)을 만들어 두면 나물 맛을 손쉽게 살릴 수 있다. 때로는 된장, 고추장, 어간장(액젓)으로 나물을 무치면 같은 나물이라도 색다른 맛이 나고, 특별히 궁합이 잘 맞는 나물거리와 양념도 찾게 된다.
④ 봄부터 가을까지 싱싱한 채소로 해 먹는 나물은 적당히 데치는 게 중요하고, 겨울에 해 먹는 묵나물은 적당히 불려 잡맛을 잘 우려 없애는 게 중요하다. 특히 묵나물을 요리할 때에는 미리 멸치와 다시마로 낸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나물거리를 볶듯이 익힌 뒤 간하면 깊은 맛이 산다.

 

 

* 철따라 나물 말리기

무덥고 습도가 높은 한여름이 아니라 봄과 가을이 나물을 말리는 제때다. 추석이 지나 무더위가 물러가고 찬바람이 불면서 맑은 날이 이어질 때 가을 나물을 말리자. 나물은 처음 이삼일이 중요한데, 맑은 날이 이어질 때 아침 일찍부터 말린다. 나물을 말리는 데에는 햇살뿐만 아니라 바람도 중요하다. 바람이 위아래로 통하도록 채반을 고여 놓는 게 좋다. 다 마르면 속이 들여다보이는 밀폐용기나 투명한 비닐봉지에 이중으로 담아 보관해야 찾아먹기 좋다. 이렇게 채소를 말려 두고두고 먹는 것을 묵나물이라 한다. 시장에서 파는 묵나물은 건조기에 말린 것이다. 건조기에 말리면 편리하지만, 자연건조한 나물은 햇살의 기운을 듬뿍 담고 있어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봄에 말리는 채소 - 고사리, 취

끓는 물에 소금을 한 움큼 넣고 데친 뒤 바로 널면 더운 수증기가 날아가며 잘 마른다. 고사리와 취는 말리는 첫날이 중요한데, 중간중간 이리저리 뒤적이고 모아주어야 고루 마를 뿐 아니라 보관하기도 쉽고 나중에 먹을 때도 부드럽다. 시골 할머니의 묵나물이 똬리 모양인 건 그래서다. 첫날 어느 정도 앞뒤로 골고루 말린 뒤,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로 옮겨 시나브로 말리면 때깔이 좋다.

 

가을에 말리는 채소 - 애호박, 가지

더운 기운이 가신 10월 가을볕에 널어두면 잘 마르고 햇살을 듬뿍 담아 영양도 좋아진다. 애호박은 싱싱할 때 생으로 납작납작 썰어 볕에 넌 뒤 뒤집어가며 말린다. 애호박은 말리기가 까다로운 나물거리로, 잘 말리면 빛깔도 하얗게 빛나며 맛도 좋으나 마르는 과정에서 비가 오면 금방 곰팡이가 핀다. 그래서 시중에 파는 애호박 오가리는 건조기에서 말릴 수밖에 없다. 햇살에 잘 말린 애호박 오가리는 귀하디 귀한 예술작품이 아닐 수 없다. 가지 역시 마르다 비가 오면 애를 먹는다. 그래서 며칠 그대로 시들거리게 놔두었다가 가지가 생기를 잃으면 그때 먹기 좋게 길쭉길쭉 썰어 말린다.

 

 

초겨울에 말리는 채소 - 무말랭이

11월 김장무를 약간 길쭉하고 납작하게 썰어 말린다. 이때 소금에 살짝 절인 뒤 물기를 빼고 펼쳐 말리면 좋다. 처음 무를 말리는 이삼일은 무가 얼지 않을 만한 날을 잡는다. 무청을 시래기로 말려서 먹기도 하는데, 말린 시래기는 질겨서 이가 약한 사람에게는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무청을 소금물에 절인 뒤 보관하는 방법이 있다. 이걸 더 쉽게 하려면 소금에 절인 무청을 김장김치 우거지로 두둑이 덮었다가 먹으면 된다. 김장 우거지인 무청을 먹으려면 맹물에 담가 짠 맛을 우려낸 뒤, 된장국을 끓이거나 볶아먹으면 탱탱한 무청 맛을 볼 수 있다.

 

장영란 님은 무주에서 자급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떠가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생각이 서로 통하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씁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자연달력 제철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 먹어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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