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살림이 읽은 책 ]

인간, 50조 개 시민세포로 이루어진 협력공동체

최성각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 브루스 H. 립턴, 이창희 옮김, 두레, 2010

이 책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순전히 내 자력으로 만난 책이다. 주중에 시골에 있다가 주말에 귀경하면, 별일 없는 동네의 지하책방에 들르곤 한다. 20년쯤 전에는 술집에 들렀을 것이다. 술집과 책방이라? 어감은 책방이 더 방정(方正)하게 전달될지 모르지만 어스름녘이면 가실 줄 모르는 갈증에 겨워 술집에 들르곤 하던 젊은 날이 여러 측면으로 볼 때 지금보다 더 건강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몸이야 당연히 더 건강했을 것이고,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술집에서 '술'과 '사람'을 만나겠다는 의지로 그곳에 들어섰을 테니, 얼마나 진실하고 건강한 태도인가. 한 일도 없이 나잇살이나 먹고선 주말에 침침한 눈을 껌벅이며 양서보다는 잡서로 그득찬 책방이나 기웃거리는 모습은 사실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번 겨울 어느 주말에 또다시 책방에 들렀다가, '과학' 코너에서 만났다. 서평으로도, 광고로도, 누군가의 소개도 없이 오로지 책방의 좌대에서 우연히 만난 뒤, 나는 곧바로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이 도발적인 이단 생물학자의 자서전 같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유전자(DNA)가 알고보니 당신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투로 개제했지만, 이 책의 원제는 '믿음의 생물학'(《THE BIOLOGY OF BELIEF》)이다. 우리 출판계는 원제를 다소 과장하거나 부러 왜곡함으로써 책의 매출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곤 하는데, 그런 자극적 노력으로 과연 소기의 실효를 얻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 또한 유인(誘引)의 의도가 짙은 제목을 붙였지만, 정독하고 나면 책의 내용이나 주제로 볼 때 '믿음의 생물학'이라는 원제가 올바르게 붙여진 제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브루스 H. 립턴은 세포생물학자다. 일곱 살 때 저자는 현미경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현미경 속에서 '헤엄치는 짚신벌레'를 본다. 그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춤추는 짚신벌레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그런 게 어쩌면 운명인지 모른다. 왜 어떤 어린이는 처음 본 현미경 속의 짚신벌레에게 그토록 빠지는지, 그것은 설명불가의 일에 속한다. 태어나서 세포를 처음 본 저자는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한테 현미경을 사달라고 조른다. 꼭 냄새나는 위인전 같다.

어쨌거나 세월이 흘러 그는 대학원생이 되고, 광학현미경보다 수천 배나 더 강력한 배율 100,000배의 전자현미경으로 세포를 이루는 분자 구조의 틈새를 살펴본다. 그는 그 신비로운 세계를 우주여행에 버금가는 인적미답의 내부세계를 향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일곱 살 때 처음 본 광학현미경이 세포도 감각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세포생물학도가 된 대학원생에게 전자현미경은 생명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분자들과 대면하게 했다. 그는 세포의 미세한 구조와 행동을 상호연결하면 자연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대학원 재학 중, 박사학위 후 연구과정, 의대교수가 된 이후까지 그는 깨어 있는 시간 내내 현미경으로 세포의 분자구조를 탐색하는 데에 몰두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세포들의 움직임, 즉 '세포들의 삶'에 목적이 있다는 확신을 일곱 살 이래 한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할 일을 일찍 찾은 그는 행운아였다. 이 세상에 평생 할 일을 못 찾고 헤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행운은 노력으로 얻는 게 아니다. 행운은 그냥 행운으로 다가올 따름이다. 이 사람의 경우도 그랬지 않은가.

생명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전통적인 입장은 무엇일까? 생명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고, 동전의 어느 쪽이 나왔느냐의 문제 정도로 간주한다. "신(神) 따윈 필요없어!"가 찰스 다윈 이래의 생물학자의 모토였다고 한다. 다윈 자신이 신을 믿었건 안 믿었건, 그 문제와 관계없이 다윈은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신의 개입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다윈은 인간의 형질이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유전된다고 봤다. 이 '유전적 요인'이 한 개체의 삶의 특징을 지배한다고 추정했다.

다윈의 후예들은 미친 듯이 생명을 분자수준까지 분해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50년 전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유전자의 기본구성 물질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와 기능을 밝혀냈다. 언론은 "생명의 비밀 풀려!"라고 환호작약했다. 생물학자들도 유전자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생물학적 삶을 통제하는 DNA 메커니즘이 분자생물학의 핵심 도그마가 되었다. 오래 끌던 '선천 대 후천 논쟁'은 선천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후에 DNA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뿐 아니라 감정과 행동까지도 통제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유전자에 결함이 있는 상태로 태어나면 불행해진다"는 식의 유전자 만능론, 유전자 결정론으로까지 나아갔다. 그것이 바로 주류 생물학의 중심원리였다.

저자 립턴이 반기를 든 곳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는 유전자가 생명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는 근거로, 유전자는 스스로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스위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좀 과학적으로 말하면 유전자는 스스로 발현되지 않으며 환경속의 그 무엇인가가 유전자의 활동을 촉발해야 한다는 뜻이다."(25쪽)

중심원리를 비판하자 립턴은 생물학계에서 곧바로 '이단자'로 몰렸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주류 생물학자들 앞에서 그는 유전자 만능론(결정론)을 비판했고, 거물 생물학자들은 고함을 지르며 광신자들처럼 분노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인간이 유전자의 희생물이 아니라 운명의 주관자로서 평화, 행복, 사랑으로 넘치는 삶을 창출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몸에는 50조에 이르는 단세포가 있는데, 이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의 메커니즘을 알려줄 뿐 아니라 어떻게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도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세포의 의인화', 혹은 '세포처럼 생각하기'라고 표현한다. 주류 생물학계에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그런 의인화가 바로 생물학의 기본 바탕이라고 확신한다. 사람은 하나의 개체라기보다는 50조개에 이르는 단세포 시민들(세포들)로 구성된 상호협력 공동체라는 것, 세포 하나하나가 아메바 같은 모양으로, 생존을 위해 상호협력 전략을 발전시켜 왔고, 인간은 곧 집단 아메바적 의식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평생 현미경으로 세포만 들여다보던 립턴이 결국 알아낸 것은 무엇인가? 거듭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지배하는) 호르몬과 신경전달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라는 게 이 책의 핵심주장이다. 인간의 믿음은 어디에 주소를 두고 솟아나는 것인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몸속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선연하게 해결되지 않은 이 난공불락의 질문에 대한 인류의 해답은 머리(뇌), 심장(가슴), 혹은 배(腹), 피(血液) 등이다. 그런데 이 책은 세포 속에 마음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재미있고 놀랍다.

믿음(마음)이 어떻게 생명체(몸)를 지배하는가, 그것을 그는 혈관 내벽을 이루는 세포인 혈관내피 세포에 관한 연구로 접근한다. 배양한 세포들을 살펴보았더니, 세포들은 주변환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맞추어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립턴이 영양분을 넣어주면 세포들은 영양분을 향해 달려왔다. 독성물질을 떨어뜨리면 세포들은 이 자극성 물질로부터 멀리 도망쳐서 스스로를 보호했다. 세포들이 생각이 있어 선택하고, 때로는 기피한다는 이야기다.

립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연구 성과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히스타민과 아드레날린을 배양접시에 동시에 떨어뜨렸을 때 나온 결과였다. 관찰해보니 중추신경계가 분비하는 아드레날린 신호가 국소적으로 방출되는 히스타민 신호를 압도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공동체의 질서가 여기서 드러났다. … 다세포 생물에 적용되는 원칙, 즉 마음(중추신경계가 분비하는 아드레날린)이 몸(국소적으로 분비되는 히스타민에 반응하는)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단세포 차원에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79~180쪽)

거두절미한 인용이라 잘 전달될 리가 없을 것이다. 립턴이 이 실험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무엇일까? 인간은 우리 몸속의 50조개의 생각하는 '똑똑한 세포'와 함께 두려움 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생존하는 게 목표인 다윈이즘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되는 문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모든 것은 저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불행히도 이런 사고방식의 희생물로는 병든 지구, 노숙자, 미성년 노동자 등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 이들은 이 투쟁에서의 패자인데, 다윈이즘에서는 승자도 결국 패자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문외한이 과학책을 소개하는 일은 역시 어렵다.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최성각 님은 7년째 서울과 시골을 들락거리는 두 곳 생활을 하면서 거위도 키우고 닭도 치고, 헌 집에서 나온 목재로 오두막을 짓기도 합니다. 《날아라 새들아》, 《달려라 냇물아》,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등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풀꼿평화연구소 소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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