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살림이 만난 고집쟁이 ]

평화에 미치다

김세진

카약이 바지선 가까이로 접어들었다. "가까이 오면 위험합니다. 나가십시오. 해군 관할 지역입니다. 업무 방해로 연행될 수 있습니다." 경고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크레인이 있는 바지선이 육중한 철재 몸통을 내보이며 서 있었고, 해경이 엔진소리를 내며 막아섰다. 노를 저어 그 사이를 비집고 가는 플라스틱 카약은 너무 약해 보였다.

위축된 마음을 감추려 심호흡을 하는데 순간, 바람이 불었다. '해군기지, 결사반대'라고 쓰인 노란 깃발이 카약에 꽂힌 채 꽤나 경쾌하게 나부꼈다. 큰 배 사이에 작은 배가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명랑하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제주 강정 앞바다에 떠있는 카약의 성가신 움직임은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런 식의 시위는 처음인지라, 집시법을 적용하기도 곤란하다고 한다.

송강호 박사는 그가 일하던 국제 평화 단체, 사단법인 '개척자들'에서 사용하던 카약 몇 개를 제주도에 가져왔다. 오키나와 해상 시위에서 슬기를 얻었다. 카약은 몸체가 가벼워서 암초에 걸릴 위험이 없고 연약한 그 모양새가 평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공사 차량 바퀴에 드러누우면서 목숨 걸고 시위했던 주민들은 해상에서도 시위할 힘을 얻었다.

입춘을 앞두고 눈보라가 치던 2월의 어느 날도, 주민들은 테트라포드(방파제나 강바닥을 보호하는 콘크리트 블록, 일명 삼발이)를 옮기는 공사를 방해하기 위해, 차가운 바다 속으로 들어가 삼발이 위에 서서 저항했다. 사정은 급박해졌다. 해군은 4월 총선을 앞두고 구럼비 바위 발파 허가를 받기 위해 공사를 강행하고 있었다. 송강호 박사의 시위도 거칠었다. 지난해 크레인이 있는 바지선 위에 올라갔다가 관계자들이 밀치는 바람에 3미터 아래로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다. 거침없는 그를 주민들은 동학농민군의 '접주' 같다고 했다.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누구나 서로 존중하는 평등한 세상을 위한 동학농민운동, 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것과 닮았다.



맨발에 덥수룩한 머리, 단추를 잘못 끼워 입은 사나이
과연 접주는 행색도 평범찮았다. 덥수룩한 머리,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하고 셔츠 첫 단추는 두 번째 단춧구멍에, 두 번째는 셋째 단춧구멍에 채웠다.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면, 송강호 박사는 강정의 일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하는 과정에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설명회나 토론회, 투표도 없었다고 한다. 마을주민 1970명 중 찬성 의견을 가진 87명만이 모여 박수치는 것으로 유치 결정을 한 것부터 일은 잘못되기 시작했다.

그는 늘 맨발을 하고 다닌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스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그런다고 했다. '평화에 미치광이'가 되는 게 그의 꿈이란다. 이미 오랜 시간 평화 운동을 해 온 그가 그렇게 얘기하는 게 새삼스러웠다. 그는 1990년대부터 르완다,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으로 주저 없이 달려갔다. 처음에는 여행을 하다 여정에 착오가 생겨서였다. 어느 교회의 전도사였던 그는 1992년 청년들과 함께 필리핀 여행 도중, 예정에 없던 피나투보를 지나게 되었다. 화산 폭발 때문에 논밭이 용암에 잠기고 지붕이 날아가고 화산재가 쌓여 있었고 시체들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극단적인 고통이 있는 현장을 그는 처음 보았고, 바로 그곳에 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어떤 것, 준비한 어떤 공연도 쓸모가 없었다. 그는 현장에 함께 있던 청년들과 약속했다. 후에 전쟁의 현장에 가자고.

199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에게 편지가 왔다. 르완다에 전쟁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장학금이 끊기고 박사 논문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약속대로 청년 세 명과 함께 현장에 갔다. 투치족과 분쟁 중이던 후투족 아이들을 만났을 때 특히 충격을 받았다. 밤중에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물어보니, 어른들이 "투치족 눈은 뽑아"라고 매기면 아이들이 "씹어 먹세"라고 받으며 노래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른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분노를 갖게 하는 것은 제2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는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가르치는 '평화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00년부터 그는 개척자들을 통해 동티모르에서 평화 학교를 열었다. 이산가족을 서로 이어주고 마을 간에 화해도 도모했다. '개척자들'은 전쟁통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지진을 겪은 파키스탄과 아이티, 쓰나미가 휩쓴 아체, 핵사고가 난 일본에도 급히 달려갔다. 그들은 피난촌에서는 피난민 천막에서, 다른 현장에서는 현지인들과 같은 집에서, 현지인들이 받는 월급만큼의 돈으로 생활한다. 그런 생활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한국에서부터 훈련한다. 연차, 나이에 상관없이 매달 30만 원을 받으며 공동체로 생활한다. 언제, 어떤 환경이 되어도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세계화라고 생각해서다.

그게 몸에 배어서인지 지난겨울 경기도 양평에 있는 개척자들의 공동생활 공간 '샘터'가 불에 탔을 때도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직접 지은 공간이라 눈물 흘리며 아쉬워하면서도 불에 타 버린 물건들을 '버려야 할 것을 버리게 된 계기'라고 덤덤히 말했다. 샘터의 화재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구호 물품을 보내왔는데, 이들은 하루 만에 이제 적당히 모였으니 그만 보내라고 통보했다. 그러더니 구호품으로 받은 옷가지를 사이즈에 맞게 나눠 입었다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지 않는 훈련이, 위기 상황에 진가를 드러낸 것 같았다. 송강호 박사와 강정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도라 씨는 당시 화재 현장에 있었는데, 소방차를 불러야 하는 순간에 119가 생각나지 않고 해양 긴급 구호 전화인 122만 머릿속에 맴돌아 당황했다고 했다. 자신들의 집이 불에 탄 상황에서도, 이들은 어김없이 강정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친 것 같은데, 미치광이가 되고 싶다니….



전쟁의 광기에 맞서기 위해 미치다
광기,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또 죽이는 전쟁의 광기, 그 때문에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 총을 든 군인은 맹수와 같기에, 이들을 제어하려면 노련한 조련사와 같은 용기와 지혜도 필요하다고 했다. 전쟁을 막는 일은 녹록치 않다. 전쟁터나 전쟁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지금 강정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해군기지가 들어서려 한다. 하루걸러 사람들이 연행되고, 주민들끼리 서로 욕하고, 이웃끼리 가족끼리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사는 일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과 활동가 200여 명이 공사를 방해했다고 사법 처리를 받았고 손해배상으로 3억 원, 벌금만 2억 원이나 청구 받았다.

해군기지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제초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주민도 있다. 지난 2009년 <서귀포신문>이 강정마을 주민 110명에게 정신심리설문(BSI)을 했는데, '자살을 생각'한 주민이 전체 44%, 실제 '자살을 시도하거나 계획했다'는 사람도 34.7%나 됐다. 공사 현장에서 발생하는 비산먼지 때문에, 이 마을에서 많이 기르는 만생종 감귤인 천혜향이 썩어가 생계가 막막해진 주민도 여럿이다. 송강호 박사 말대로 "찬성하든, 반대하든 강정마을 주민들 모두가 피해자"다.

"해군기지 공사 현장에서 일하시는 어떤 분이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계시는 거예요. 생계를 위해, 가족 때문에 일해야 하는 거죠. 가슴이 짠했습니다. 그분도 피해자예요. 정말 슬프고 비참한 건 피해자들끼리 싸운다는 거죠. 해군이 악착같이 마을을 분열시키고 있어요. 해군의 영향력을 단절하지 않는 한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불이 났을 때는 무엇보다 불이 난 원천을 차단해야 하죠. 가스통의 문을 닫아야 불이 꺼집니다. 지금 해군이 불화의 원천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고 만나는 걸 방해하고 있어요. 해군기지 건설을 막아야 합니다."

쇠사슬을 목에 감은 심정으로, '구럼비의 전사'된 마음으로
'해군기지를 막기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은가', 그는 이런 질문 앞에 선 때가 있었다. 경찰이 중장비를 이끌고 들이닥쳤을 때다. 해군기지 반대 농성 천막을 철거하고 공사를 강행하려고 해서, 그는 급한 마음에 몸에 쇠사슬을 감았다. 그런데 하필 그게 목에 걸렸다. 쇠사슬은 비닐하우스 철골과도 묶여 있어 철골을 무너뜨리면 그도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험한 상황을 보다 못해 활동가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그의 다리 한쪽씩을 붙들었다. '이렇게 죽으면 자살했다고 하겠지, 일부 기독교인들은 저 사람, 자살했으니 지옥 갈 거라고 할 거야. 그런데 나는 정말 이 일에 목숨 걸 각오가 되어 있나. 이 일로 죽어도 좋은가?' 일찍이 쉰 이후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했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은 그를 다시 한 번 결단하게 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수백만 명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다. 막을 수 있다면 한 목숨 바칠 수도 있다.'

죽음을 결단한 사람은 무섭다. 해군도 긴박감을 느꼈는지 그를 특별 대우했다. 지난해 10월, 해군 해난구조대(Ship Salvage Unit, SSU. 심해 잠수병) 두 명이 그에게 따라 붙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한 시간씩 교대했다. 그들은 수심 30미터 되는 곳에서 "여기는 카메라로 찍을 수 없는 곳입니다. 장난 좀 칩시다"라고 말하더니 그의 옆구리를 무릎에 끼고 목과 머리를 잡아 눌러 물을 먹이고는 오리발을 빼앗았다. 수면 밑에서 그를 주먹으로 치면서 위에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송강호 씨. 진정하십시오. 여기는 해군 관할 지역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살펴보니 물 위에서 다른 해군이 이들을 카메라를 찍고 있었다. 만약 송강호 박사가 수면 위에서 폭행을 하면 그 장면을 담으려고 의도적으로 안 보이는 곳에서 가격하는 것 같았다. 다급한 상황이라, 해경에게 수신호로 SOS를 요청했으나 다가오지 않았다. 뭍에서 지켜보던 활동가가 알아챌 정도로 신호가 분명했는데도 더 가까이 있던 해경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급해진 활동가가 다섯 번이나 전화해, 해경에게 구조 요청을 했으나 그들은 대응하지 않았다.

다음 날 수중카메라를 들고 바다에 뛰어든 그에게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왔다. 그가 착용하고 있던 오리발을 빼앗아 내던지기도 했다. 그의 손에 있던 카메라도 빼앗아 바다에 던져 버렸다. 카메라는 그들의 폭행에 대한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바닷가라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면 똑같은 위치를 찾기 힘들어, 자리를 지키면서 해경에게 카메라를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해경은 '사유물이라 찾아줄 수 없다'며 자리를 뜰 수 없는 그에게 '먼저 서류를 접수하라'고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늘 가지고 다니는 나침반으로 위치를 대략 확인한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산소통을 매고 다시 찾아온 그 곳에서 마침내 카메라를 찾아냈다. 영상을 인터넷에서 본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했고, SSU는 철수했다.

그는 공무집행 방해로 현재 징역 8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인 상태다. 한 번만 더 연행되면 최소 8개월 실형을 받는다. 형을 사는 것은 무섭지 않다. 다만, 급박한 상황에서 지금 이 일이 8개월이나 발이 묶일 가치가 있는 절박한 일인가를 매 순간 고민할 뿐이다. 그는 매일 새벽 6시, 구럼비 바위로 헤엄쳐 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용기를 달라고, 두려움을 없애 달라고 무릎을 꿇는다. 잘못 하면 상처 주고 다치게 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지혜롭기를 구한다. 각지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인천, 목포, 부산, 장흥, 평택에서 배를 타고 제주를 거쳐 서귀포 강정에 모이기를, 수천 대의 자전거가 몰려 와서 공사 차량이 움직일 수 없게 되기를, '구럼비의 전사'들 1만 명이 모여 평화의 노랫소리 가득하기를 꿈꾼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서 여행하려 했다. 그는 지난해, 개척자들을 탈퇴하고 안식년을 얻었다. 어느새 후배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내 말이 옳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완고한 모습을 발견했고, 개척자들이 그의 것인 양 인식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스스로에게 놀라서다. 걸어서 여행하면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손으로, 발로 만나고 싶었다. 티베트 난민들을 껴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 잃은 사람들과 함께 울고 싶었다. 그렇게 걷다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는 남쪽 제주에 잠시 들렀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강정은 아름답지만 조용했다. 굴복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뭔가 어쩔 수 없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이곳에 남아 평화의 싸움을 하기로 결심했다. 강정에 평화가 오면 그는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또 다시 벚꽃이 필 때쯤, 기별이 들려오면 좋겠다. 그가 훌쩍 서쪽으로 떠났노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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