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다시 본 이 물건 ]

차를 지니고 살기 불편한 사회를 만들자 - 자동차

이소영

나는 차가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여유가 넘치더라도 굳이 자가용을 굴리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소심한 저항이다. 그래도 큰 불편 없이, 별일 없이 그렇게 산다. 임신 7개월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더니 엄마 고집 때문에 뱃속 아이만 위험하다며 혀를 차던 사람들은 '저러다가도 출산 후에는 결국 차를 살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 아이가 올해 10살이 됐다. 사람들은 아직도 내게 '둘째가 없어서 버틴다'라고 잔소리를 한다.

사람들은 자가용을 필수품처럼 여긴다. 대기 오염, 도로 건설로 인한 자연 파괴 등 자가용의 폐해를 나열하며 딴죽을 걸면, 또 그 이야기냐며 오히려 핀잔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니 당연히 끌고 다녀야 한다는 게다.

맞다. 수긍할 부분도 있다. 자가용은 편리하고 쾌적하다. 가고 싶을 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부모님 밑에서 클 때는 주차장에 내려가 차에 올라탄 후 목적지에 사뿐히 내리기만 했기 때문에 나도 잘 안다. 그 편리성을 뒤로 하고 버스로, 지하철로 짐 가방을 싣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경험한 몸과 마음의 괴리는 가히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정도로 컸다. 자동차 때문에 삶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버스, 기차, 비행기, 배 등 모든 운송 수단은 분명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1800년대 말에 발명된 석유로 돌아가는 엔진을, 1920년대에 자동차 대량 생산에 활용하면서 거리는 순식간에 차들로 뒤덮였다. 지금 지구에는 8억 대가 넘는 자동차가 도로를 누비고 있다.

대부분의 운송 수단은 석유를 태워서 움직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각종 배기가스와 미세 먼지 등 공기 속 화학 물질들은 호흡 곤란, 가슴 통증, 천식, 폐암 등을 유발하며 지구온난화를 가중시키고 있다. 대기오염이 모두 차량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온실가스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절반은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나온다. 여기에 오토바이와 화물차까지 합치면 배출량의 3/4을 차지한다. 자가용을 적게 이용한다면 도로를 점령한 자동차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매년 13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교통사고도 감소할 것이다. 대기오염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런 간명한 방도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가용을 너무나 좋아해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을, 석탄과 석유로 만든 도로에, 석유로 돌아가는 자가용을 끌고, 보행자들에게 탄소 배출 가스를 마시게 하며 달린다.

최근에 '하이브리드카'가 판매되고 있다. 연비도 높고 대기오염도 줄이는 앞서가는 차라는 광고는 '자가용 없이도 잘산다'는 데 자부심을 품고 있는 우리 가족마저 귀를 쫑긋하게 했다. 차량을 움직이는 더 나은 방법이 계속 개발되고 자동차 업계들도 시민환경의식을 고려하기 시작했나 보다. 주변에는 '앞서가는 하이브리드카'로 갈아타는 이들이 늘고 있다. 외국에서는 석유를 대체할 바이오연료 개발도 한창이다. 바이오디젤과 바이오에탄올로 대표되는 바이오연료는 동식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 바이오디젤은 동물지방 혹은 대두나 야자유 같은 식물성유를 이용하고 바이오에탄올은 알코올의 일종으로 옥수수나 풀, 나무 등 식물로 만들 수 있다. 이제 비싼 석유에 대한 걱정도 없어질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바이오연료가 석유에 비하면 재생가능연료이기는 하다. 하지만 운행 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와 아산화질소가 문제다. 또 바이오연료로 쓰기 위해 더 많은 곡물을 경작해야 한다. 곡물 생산을 위해 농지를 만들어야 하고 이로 인해 삼림이 파괴되고 생물다양성이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이러한 대규모 공장식 농업은 배기가스를 발생시키고 소농들은 소외시키는 등 다양한 문제를 연쇄적으로 일으킨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을 가축사료로 쓰는 것을 문제 삼아 육식을 감소하자는 마당에 곡물을 재배해 자동차 연료로 사용한다는 것도 큰 논란거리다. 히이브리드도 마찬가지다. 배기가스를 방출하지 않는다는 전기 엔진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고 전기는 어차피 화석연료나 핵연료를 이용해 만들고 있다.

전기를 재생에너지로 만들면 문제가 적겠지만, 현재 소비 수준 정도를 감당하기 위해 재생에너지시설을 건립하는 데 드는 전력에너지를 상기해 보면 과연 이것이 진정한 대안인가 싶다. 효율성이 증가하면 소비가 증가한다는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의 역설'이 옳다. 연비가 높은 자동차가 개발되어 판매될수록 사람들은 차를 더 많이 몰게 된다. 대안기술도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소비 수준과 생명 인식 수준으로는 대안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동차산업이 친환경이라는 옷을 입은 것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실천보다는 돈으로 도덕적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소비자를 꾀는 장사꾼의 술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자가용은 개인,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그 한 사람의 편리만을 위한 교통수단이다. 도심 한가운데에 닦은 넓디넓은 도로, 그 위를 달랑 한 사람을 태운 자가용이 달린다. 그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보행자들을 육교나 지하도로 다니게 하는 건 얼마나 부당한가. 위험성을 감안하여 고속도로에서 보행자 보호를 위해 설치하는 육교와는 다르다. 인도에다 버젓이 주차를 감행하는 그 편리한 이기심을 보라. 게다가 그 인도는 큰 아파트 단지와 대로변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도 않다. 보행자우선도로라는 미명 하에 인도를 설치했지만, 골목골목에 나 있는 길은 매우 어그래시브한 자가용들 차지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외국학자가 인도구분이 없는 길을 걷다 난폭하게 지나치는 차 때문에 놀라며 '어떻게 사람이 걸어가는데 차가 저렇게 어그래시브하게 차가 지나가냐'던 말이 너무도 적절하다싶어 그대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차가 이렇게 많지 않던 예전에는 걸어 다녔잖아. 그때는 공기도 참 좋았고 사람들도 건강했는데 말이지."

이도저도 다 문제라고 지적만하니 슬슬 짜증도 나겠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대안을 말해보자. 짧은 거리는 자전거를 타거나 걷자,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어 재미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보다 백배는 더 저렴하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버스나 기차를 타자. 환경을 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자동차를 꼭 타야만 한다면 나눠서 타자. 비싼 차로 신분을 증명하려는 것은 촌스럽다. 어쩔 수 없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한다면 대형 고급세단이 아니라 소형하이브리드카를 타자. 이렇게 조금이라도 지구에 덜 해로운 방식을 선택하자. 지당한 말이지만 근본적인 인식이 변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합리적인 소비실천들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는다. 도심의 대로변이나 아파트단지만 벗어나면 인도가 거의 없고 자동차전용도로는 넘쳐나는 나라. 자동차가 인도를 점령하고, 자전거를 타려면 4대강가에 조성했다는 인공도로에 가야하고, 그나마 환경 부담이 적다는 철도마저 더 빨리, 더 자주 서울로만 오고가게 만들어 놓은 게 우리 현실이다. 노인이나 어린이, 자가용이 없어 대중교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교통약자'들이 누려야 할, 안전하게 보행할 권리를 묵살해 버리는 이기심. 자동차 중심으로 배열돼 있는 문화와 규범에 우리는 부지불식간 길들여져 있다. 자동차산업에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이들이 조장하고 강요한 문화들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기차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럿이 함께 타기 때문에 더 바람직한 교통수단이라고, 자가용 대신 활용하자고 제안하기도 민망하다. 한국철도의 대표주자 KTX는 자가용만큼이나 모순덩어리다. 설계 당시,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지 않고 밀어붙여 발생한 도롱뇽소송은 일례일 뿐이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철도를 이용한 "고객님은 오늘 소나무 10그루를 심으셨다"지만 실제로 나무가 심겨질 것 같지는 않다. 백 번 양보해서 나무를 심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해 주고 싶지만 그러기도 어렵다. 1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고속철은 사람들을 더 자주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철도가 자동차에 비해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여준다는 말은 맞지 않다. '전국 한 시간 반 거리의 시대'를 명분으로 지역 상권도 흔들어 놓았다. 이전까지 기차는 작은 역을 통해 마을과 마을을 이었고 대량수송을 담당해, 친환경교통수단으로 불릴 만했다. 이제 고속철을 타고 달리며 스쳐가는 작은 역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야속하게도 고속철은 10분을 단위로 쌩쌩 지나치며 작은 역마을 주민들을 더욱 소외시킨다. 이런데도 철도가 여전히 친환경 교통수단인가.

발칙한 상상을 해 보자. 도심 10차선으로 닦여 있는 도로를, 두 차선은 인도로, 또 두 차선은 자전거전용로로, 또 두 차선에는 공짜로 탈 수 있는 버스와 경전철로가 있고 남는 공간에는 온통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자. 골목길에는 텃밭이 이어져있다. 큰길뿐만 아니라 골목길이나 강변길에 자전거 길이 이어져 있고 이런 길들은 근처 마을로 연결되어 있다. 이 길은 둑을 따라서도, 기찻길을 따라서도 있고 숲속을 달릴 수도 있다. 강으로 끊어진 자전거 길은 작은 배로 건널 수 있다. 물론 도심에는 등하교와 출퇴근길이나 기차역, 관공서 등으로 이어진 자전거 길이 어디에나 당연히 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 있는 신호등은 보행자가 도로를 건너고자 할 때 단추를 누르면 곧장 초록불이 들어온다. 아예 신호등 대신 큰 등을 횡단보도 양쪽에 설치해 사람이 건너가면 무조건 차가 멈추게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이런 모습은 과연 꿈일까? 그렇지 않다. 유럽과 남미에는 시민들이 주도해 이미 이런 모습을 현실로 만들어 놓은 곳들이 있다. 브라질의 꾸리찌바, 아랍에미레이트의 마스다르, 벨기에의 하셀트, 오스트레일리아의 퍼스 같은 도시에서는 무료 대중교통 체계나, 한 개의 경레일전용로로 8 차선 자동차도로에 맞먹는 시민수송을 실현하고 있다. 도로 건설로 파괴될 뻔한 녹지를 보호했기에 도시병 앓던 아이들이 산촌유학 떠나지 않고도 신나게 살고 있다. 도시가 시골이다. 유럽에서는 횡단보도만 있고 신호등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이, 생명이 우선시되기 때문인데, 이 당연한 생각은 오랜 사회적 합의를 거치면서 교육을 통해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도 그렇게만 되면 오죽 좋겠냐고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우리 현실을 자가용이 있으면 불편하게 만들 수 없을까. 할 수 있다. 선택하기 나름이다. 그런 문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런 꿈을 꾸면서 나는 오늘도 소심한 저항을 하고 있다. 투덜대면서 딴죽을 걸고 민원도 넣고 여론몰이도 하면 된다. 나는 여전히 차가 없다.

이소영 님은 에코토피아를 꿈꾸는 살림꾼입니다.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부산대 생태유아교윤사업단 연구교수를 거쳐 지금은 고려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인드라망, 지금 여기의 에코토피아》를 썼으면 《비아캄페시나-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을 공동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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