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교육살림 ]

폭력 부추기는 사회, 작은 학교로 풀자

이시백

두 아이가 생각난다. 지우개를 씹어 먹는 아이가 있었다. 친구들이 괴롭힐 때마다 아이는 지우개를 씹어 먹었다. 그게 다른 아이들 눈에는 괴상하게 보여 더 놀림을 당했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화가 치밀어 지우개를 씹는다고 했다. 아이의 노트에는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의 목을 자르고 눈을 뽑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생김새도 훤칠하고, 심성도 고왔다. 초등학교 때 몸이 아파서 공부가 뒤처졌는데 그 뒤로 친구들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 한다.

일제고사가 있던 무렵에 많은 학교에서 성적순으로 교실 좌석을 배치했다.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공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뒤편의 쓰레기통 옆에 앉는 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바보라 불린 아이를 연극 동아리에 넣었다. 동아리에 들어와서도 아이는 겉돌았다. 무슨 역을 맡겨도 제대로 해내질 못했다. 아이는 소품을 맡아서 아주 조금씩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아이가 받은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질 것으로 바라는 것은 만화나 드라마를 지나치게 많이 본 어른들의 망상이다. 아이를 바보로 만든 건 누구일까.

선생님들에게 욕을 하던 아이가 있었다. 덩치가 커서 제 또래들을 툭하면 때리고, 돈을 빼앗거나 괴롭히던 아이였다. 웬만한 선생님들은 눈을 부라리며 대드는 아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내 반이 되었다. 몇 번을 타일렀지만 아이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날을 잡아 아이를 혼내 주었다. 친구가 겪는 고통을 알게 해 주겠다고 몽둥이를 들었다. 아이가 때린 것보다 더 아프게, 더 오래 때려주었다. 토요일 방과 후에 시작한 체벌이 점심때를 넘겼다. 중국요리집에 가서 짜장면을 함께 먹고 학교로 데려와 다시 때려주었다. 그 뒤로 아이는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양순해졌다. 내 교육이 아이를 바로잡았다고 흐뭇해했다. 

십여 년이 지난 뒤에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검은 양복에 깍두기 머리를 한 청년들이 거리를 지나갔다. 건장한 체격에 살기 띤 눈빛이 한눈에 조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내게 달려오더니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공손하게 절을 한다. 그 아이였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거리를 누비던 깍두기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참담해졌다. 아이가 내게 허리가 꺾어지도록 굽힌 절은 조폭 두목에게 향한 굴복의 의례였다. 나는 아이의 폭력을 바로잡은 게 아니었다. 아이는 내게 매를 맞으며 자신의 폭력을 반성하기보다 더 강한 폭력을 경외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체벌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학생부장이라는 악역(?)을 담당하면서도 체벌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가 내게 가르쳐준 교육 덕분이었다.

학생 인권조례가 학교 폭력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아이들의 폭력을 막기 위해 체벌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어른도 있다. 그런 분들에게 말한다. 폭력은 폭력으로 막을 수가 없다는 것. 매질로 아이들의 폭력을 굴복 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더 큰 폭력을 아이들 마음속에 심어준다는 사실을 호소하고 싶다. 깡패를 없애겠다고 만든 삼청교육대의 무자비한 훈련이 오히려 깡패들의 전투력과 조직력을 강화시켜 잔혹한 조직폭력배들을 양산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즘 학교 폭력 대책이라고 논의되는 것들을 보자면 교육보다는 보복에 가깝다. 가해학생들을 따로 모아 격리시킨다거나, 형법 연령을 낮추어 처벌하게 한다거나, 강제 전학이나 퇴학 시킬 수 있는 법령을 만들겠다거나, 생활기록부에 전과 기록처럼 남겨 대입에 반영하겠다는 방안들은 범법자에 대한 징벌과 다를 바가 없다.

한 자녀가정, 맞벌이를 하는 가정이 늘면서 아이들은 사회화의 과정이 부족하다. 온종일 빈집에서 컴퓨터를 끌어안고 지내던 아이들은 친구들을 만나도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친구 집에 놀러가도 만화책을 보거나 컴퓨터를 하며 따로 노는 게 흔한 풍경이다.

아이들은 개인화되는데 학교는 어떠한가. 정말 우리가 맞벌이를 그만두고, 예전처럼 할아버지와 삼촌과 고모가 한데 모여 살 수 있는가. 없다면 학교가 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학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운동장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부동자세로 교장 선생님의 재미없는 훈화 말씀을 듣게 한다. 이것이 쉬 고쳐질 것 같지도 않다.

개인화된 아이들에게 고작 시키는 것이 군대식 극기훈련이다. 청소년 수련이나 해병대 병영체험이 아이들을 하나로 '단결'시켜 준다고 믿는가 보다. 학교 행사 때마다 학생회장을 앞세워 '교오장 선생님께 경례!'를 호령하고 아이들이 일제히 ‘단결!’이라고 외치며 거수경례를 올리면 '단결'이 되는 줄로 아나 보다.

학교 폭력이 문제될 때마다 학교와 어른들이 벌이는 한판 쇼는 더 유치찬란하다. 온갖 위원회 투성이인 학교에 '학교폭력추방위원회'가 하나 더 생길 것이고, 일 년 내내 매달아 두어야 껌종이나 들어가 있는 '학교 폭력 신고함'이나 복도에 걸어두고, 아이들과 상담할 시간도 없는 선생님들을 밖으로 불러내서 우두커니 길거리에서 경관과 보초를 서게 한다. 어느 아이가 '학교 폭력 추방'이라는 띠를 두른 경관이나 선생님 앞에서 친구 돈을 빼앗고 때리겠는가.

이제 한바탕 언론에서 떠들었으니 꿍꿍거리며 머리를 맞댄 어른들이 펼쳐낼 대책이란 것도 그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정말 학교 폭력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인가. 있다. 다만 그렇게 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개별화된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운영비를 줄인다고 '두밀분교' 같은 작은 학교들을 한데 몰아 한 학교의 학생이 천 명이 넘고, 한 학년이 20반도 넘는 거대 학교를 만들어 놓았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학교는 오로지 성적과 시험을 준비하느라고 정신없는 입시학원이 되었다. 진학 상담은 해도, 진로 상담이나 아이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은 할 엄두도 못 내며, 삼 년 동안 선생님과 한 마디도 못 나눈 채 졸업하는 아이들도 없지 않다.

학교들을 쪼개 놓아야 한다. 남한산초등학교나 조현초등학교처럼 작은 학교들이 보여준 성과에 주목해야 한다. 거대한 규모의 본교 아이들보다 분교의 아이들이 인성이나 학업이나 우수한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아이들이 서로 가족처럼 여기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야, 거기'라고 묶어 부르지 않고 '철수야, 영희야'라고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작은 학교로 만들어야 한다. 개성이 강해진 아이들을 억지로 '단결'시키기보다는 아이들의 개성을 살리는 개별적인 교육을 마련해야 한다.

선생님들을 심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난롯가에서 잡담을 나누게 해야 한다. 잡담을 나누다 심심해서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게 해야 한다. 요즘의 학교들은 선생님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마저 주지 않는다. 양계장처럼 칸막이가 처진 교무실에 머리를 수그리고 컴퓨터만 들여다보게 만든 학교의 일과표는 마치 컨베이어벨트처럼 선생님들에게 단 십 분의 여유마저 주지 않는다. 수업이 끝나면, 종례를 해야 하고, 직원연수나 온갖 회의에 보충과 야자로 이어지는 일과표에는 선생님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심지어는 체력단련도 지정된 날에 일제히 운동장에 모여서 하는 학교도 있다.

이런 일과 속에서는 자살을 고민하던 아이가 찾아와도 상담을 할 시간이 없다. 아이를 앉혀 놓고 무슨 일인지 들으려는 순간 종이 울린다. '직원 연수가 있으니 선생님들은 회의실로 지금 즉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방송이 들려온다면 어쩌겠는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내일 하자.' 그 날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가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통을 호소하러 간 아이를 돌려보낸 교사는 모든 비난을 듣게 된다. 너무 바빠서 아이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고 하면 될까.

집 나간 아이를 찾으러 청량리 골목을 헤집고 다니고, 동해안 해수욕장으로 뛰어다니던 선생님들의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다. 선생님들이 무책임해졌다기보다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 게 요즘의 학교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사건이 터지면 모든 책임은 선생님에게 돌린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아이들과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풍경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입시도 좋고, 일제고사도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아이들과 선생님이 이야기 나눌 시간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들에게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며, 대학 입시로 일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승자독식의 서바이벌게임을 만들어놓은 채 아이들에게 서로를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서울대반, 심화반에 우열반으로도 모자라 기숙사까지 만들어 24시간 죽음의 경쟁을 시키면서 요즘 아이들이 공동체의식이 부족하다고 혀를 찰 수 있을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며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을 향해 '정신력이 약한 아이들은 살 자격이 없다'고 했던 교육 관료의 말이야말로 폭력적이지 않은가. 전교생의 모의고사 성적을 복도에 붙여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공개 망신을 주던 학교들이 이제 다시 초등학생들에게도 일제고사를 만들어내고는 학교 폭력을 아이들에게만 전가하는 그 뻔뻔함이야 말로 폭력적이지 않은가.

조폭세계보다 더 폭력적인 교육현장을 풍자했던 <두사부일체>라는 영화에서 보듯, 조폭세계보다 더 폭력적인 학교라는 곳에서 '네가 살려면 친구를 죽여야 한다'고 아이들을 잔인한 괴물이나 검투사로 길러온 이들은 누구인가.

초등학생들의 일제고사를 반대해 아이들과 수목원이나 공원으로 현장학습을 나간 선생님들을 파면시킨 이들에게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아, 이 세상에서는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구나, 힘을 가지면 저렇게 남을 누르고 괴롭히고 쫓아내도 되는구나', 혹시 이런 걸 시범적으로 가르치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야 말로 학교 폭력이 아니겠는가.

글은 쓴 이시백님은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장편《종을 훔치다》, 소설집《누가 말을 죽였을까》,《갈보 콩》,《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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