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시상에 부러울 게 읎어!

김성희

"대한민국에서 제일 나은 김" 생산하는 김형호 씨



"겨울바다는 항시 춥지라." 그의 목소리는 범상했다. 마치 자신과 무관한 남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입춘이 지났지만 바늘이 찔러대듯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그는 보트의 조종간을 잡고 날카로운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갈퀴처럼 거친 손이었다. 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투박한 손. 오랜 노동이 빚어놓은 정직한 손이다. 거칠 것 없는 바다 위를 질주하다보니 맞바람은 어쩔 수 없이 그는 눈을 가늘게 찌푸리게 만들었다. 한평생 그 바람에 단련되었을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별일 없어 보였다. 그의 집 앞에 펼쳐진 연안바다는 문전옥답이나 마찬가지였다. 갯벌 위에 버팀목을 꽂아둔 그의 김 양식장을 둘러보려 함께 나선 길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지주식 김양식을 하는 사람이다. 김발에 포자를 달아주기는 하지만 지주식 김을 길러내는 것은 지구에 생명을 불어넣은 그 바닷물이고, 햇살과 바람이며 이미 자연과 인공의 구분조차 무의미한 이 바닷가 사람들의 거친 땀방울뿐이다. 땅에 유기농 농사가 있다면 바다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지주식 김양식이 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바람은 살갗을 파고들 것처럼 모질었지만 그 안에 둥글고 뭉툭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만약 이 찬바람을 11월에 맞았다면 마음은 더욱 조바심을 쳤을 것이다. 작년에 겪은 모진 겨울에 비하면 지난겨울은 그래도 비교적 순탄했다. 혹독한 추위가 끝없이 이어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든 구제역 파동도 없었다. 다만 겨울가뭄 때문에 사람들은 애를 태웠다.

바다로 나서니 육지의 지형이 더욱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의 집과 김 가공공장이 있는 해남군 북평면 남전리에서 한 굽이만 더 돌아 내려가면 땅끝마을이다. 행정구역상으로 해남군이지만 군청이 있는 읍내에서 50㎞ 가량이나 남쪽으로 뚝 떨어져 있다. 땅끝. 워낙 큰 섬이라 뭍처럼 여겨지는 완도가 바다 건너 내다보이고 그 섬까지 모두 다리가 연결돼 이제는 육지의 끝에 다다라 품게 되는 어떤 비장감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땅끝에 서서 /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 새 되어서 날거나 / 고기 되어서 숨거나… / 혼자 서서 부르는 / 불러 /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 저 바다만큼 / 저 하늘만큼 열리다 /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 한 오리 햇빛 / 애린 / 나" - 김지하 <애린> 중에서

1986년 겨울이었는지 이듬해 봄인지. 포천군 일동 버스터미널 옆에 있던 서점에 서서 이 시를 읽은 기억이 있다. 입대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무렵인데 무슨 일 때문인지 외출을 나온 길이었다. 심야에 보초를 설 때 말고는 호젓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는 도통 없는 군대생활에서 나도 역시 암담한 그 시대를 견디고 있었다. 시를 읽으면서 '그렇구나, 시인은 이렇게 대신 앓아주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땅끝 가까이에 와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깊이 가라앉아있던 추억들을 길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해남을 향해 달리다 보면 한동안 평탄하던 남녘의 들판 너머로 무등산과 월출산이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솟구쳐 있어 감탄하게 된다. 이 산들을 이어가며 뻗어가던 호남정맥은 해남으로 들어와 두륜산으로 솟았다가 그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땅끝 마을이 있는 곶을 향해 달마산 줄기를 길게 밀어 내려놓았다. 그가 사는 마을은 그 산줄기를 바람막이처럼 등지고 있는 바닷가다. 바다 건너로 완도가 길게 바다를 막아섰고 남쪽으로 띄엄띄엄 떠 있는 백일도 횡간도 보길도 같은 섬들이 첩첩이 시아를 가로 막고 있어 바다라기보다는 아늑한 호수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있으며, 미네랄이 풍부한 뻘이 형성돼 있다. 좋은 김을 생산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큰 태풍이 와도 여긴 잔잔해요. 산 우에 나무가 뽑혀도 말이여, 새벽에 일어나 집 앞에 나오면 달빛 아래 잔잔한 바다가 기가 막혀. 시상 부러울 게 읎어."



그는 이 마을에서 1955년에 태어나 이제껏 살았다. 군대생활을 한 잠깐 동안 그리고 채 1년이 안 되는 동안 서울의 구로공단과 택시운전을 잠깐 한 것을 빼고는 57년 동안 국토의 최남단, 이 바닷가 마을에서 붙박이로 산 것이다. 바닷가에 아무렇게 놓여있는 돌들이나 멀리 올려다 보이는 달마산의 암봉들처럼 그는 이 동네에 부는 바람과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 속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섞여 있다.

"이 동네가 전부 김해 김가 우리 일가친척이제. 조상대대로 살았응게, 650년도 더 됐다고 허고. 처음에는 어떻게 왔는지 몰러. 유배를 왔능가." 이 지역사투리에서 "그렇지"는 "그라제"가 된다. 어떤 질문에 대해 표준어로 '네'라고 대답하면 그 의미는 여지없이 명료하다. 그러나 '그렇지'라고 하면 어떤가. 던져진 질문을 스스로 다시 한 번 되씹는 느낌도 있고, 추임새를 넣듯이 상대방의 의중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보다는 '그라제'가 훨씬 더 정겨운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화란 본래 의중을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것일 텐데, 이렇게 밀고 당기면서 미세한 감정을 주고받는 이런 식의 말맛이 너무 매력적이다.

2010년 통계에 보면 전라남도의 면적은 1만2천㎢, 남한 전체 10만여㎢의 12%가량으로 경상북도와 강원도 다음으로 넓다. 서울의 스무 배가량이나 된다. 인구는 1990년 250만7천439명으로부터 꾸준히 줄어 2010년 174만76명에 불과하다. 서울인구 1천만 명에 비하면 17.5%에 불과하다. 땅은 스무 배 넓고 인구는 5분의 1이 채 안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막한 들판과 바닷가 마을에 드문드문 살고 있는 나이든 사람들이 서울과 인근에 복닥거리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있다.

"5톤 트럭으로 한 차 올려 보낼 때마다 운송비 70만 원씩 들고, 일 하는 사람들 인건비나 이웃사람들이 내는 김값은 바로바로 현금으로 내줘야 하니까. 벨로 남는 건 읎어."

남전리 앞에 펼쳐진 바다는 그냥 놀리고 있는 빈곳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위성사진으로 그 동네를 검색해보면 가지런히 쟁기질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바다에 온통 김양식장이 들어차 있는 모습을 조금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해남 저쪽 황산면에서도 지주식을 하고, 여기하고 해남에는 두 군데밖에 읎제. 완도, 고흥 저쪽서도 한다등만 바다가 틀리제. 그 주변에서 모두 산 처리를 하는데 지주식을 하더라도 여그하고는 김이 다를 수밖에…"

이런 천혜의 조건 때문인지, 그의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계속 김양식을 해왔다고 한다. 그의 말로는 250년도 더 되었다고 하고, 실제로 김을 제일 먼저 양식한 곳도 이곳이라고 하는데, 자료에 따라서는 1640년 무렵 전남광양이라는 곳에서 김여익이라는 이가 시작해 이름도 김이 되었다는 설도, 1870년경 완도군 약산면에서 정시원이라는 사람이 시작했다는 설도 있어 확인이 어려웠다.

그의 집과 가공공장이 서있는 바닷가는 그의 기억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계속 김을 말리던 '건장'이었다고 한다. "전부 일본으로 수출했지. 송죽매동이라고 등급을 매겼제. 제일 낮은 등급이 동이여."

그의 김밭은 매년 9월 20일경부터 10월 10일경까지 김발에 포자를 붙이는 '채묘(采苗)'를 한다. 지주식 김은 채묘를 하고 난 뒤 25일가량 자라면 15㎝에서 30㎝까지 자라난다. 물속에서 자라는 부류식이 2주면 채취가 되는 것에 비하면 더디고 생산량도 적다. 이렇게 길러 어민들이 채취한 김은 김형호 씨가 운영하는 신흥수산에서 120㎏에 13만 원씩 매입한다. 이것을 세척하고 숙성시킨 뒤 말려서 팔려나가는 묶음으로 완성해, 한창 나오는 때에는 100장 한 묶음씩 하루 3500속가량 내고 있다. 인건비와 운영비 등이 많이 들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김 가공을 통해 신흥수산은 속당 300원가량 이문을 남긴다고 한다. 일 년에 20만 속 정도를 내고 있으니 자신이 김을 통해 한 해 6~7천만 원가량 소득을 올린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값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오른 게 없다. 옛날 100장 한 속에 4천 원이었던 것을 지금 한 속에 6천 원에 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싸졌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니 1970년대, 어린 시절에 김은 귀한 음식이었다. 식구가 많기도 했지만 김 한 톳을 사면 겨우내 아껴 먹고, 손님이라도 오면 상위에 올라가 있었다. 기름 발라 구운 김은 계란말이만큼이나 귀한 도시락 반찬이었다. 설날 떡국에 구운 김을 부셔 고명으로 올리면 은근하게 퍼져오던 향기에서 남쪽바다를 떠올리곤 했다.

"그라제, 김 한 장에 계란 한 알 안 바꾼다고 했응게."

살얼음 살짝 낄 때 김이 제일 잘 자라
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해조류임에 분명하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 보면, 김은 홍조식물문 보라털과에 속하는 한자로는 해의(海衣) 자채(紫菜)라고 한다. 검붉은 색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요즘은 많이 쓰는 해태(海苔), 바다에서 나는 이끼라는 이 말은 일본식 표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파래를 이렇게 불렀다.

한국 사람 가운데 김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한국 김에 열광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 시장은 꾸준히 확대돼 2000년에 13만t(1003억 원)에서 2010년도 23만6천t(2천306억원)으로 증가했고, 수출도 2000년 2천900만 달러에서 2010년 1억500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고 한다. 2011년에는 1억5천만 달러가량을 수출했다고 한다.

김 양식에는 서ㆍ남해안 5천 여 가구가 참여하고 있으며 양식 면적은 5만7000㏊ 67만 책가량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전라남도가 71.7%를 차지하고 있다. 전라북도 11.7%, 충청남도 9.2%, 경기도 4.6%, 부산시 1.7% 등에서도 하고 있지만 그 양은 많지 않다. 김은 전라도,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의 산물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김을 양식하는 데는 김발을 스티로폼 같은 부유물에 매달아 물에 담가놓는가, 뻘에 박은 버팀목에 매달아 두는가에 따라 부류식(浮流式)과 지주식(支柱式)으로 나뉜다. 지주식은 버팀목을 박을 수 있는 얕은 바다에서 할 수밖에 없는 반면 부류식은 지형의 영향을 덜 받는다. 생산성은 부류식이 월등히 높아 우리나라에서 나는 김의 90%가량이 모두 부류식으로 길러지고 있다고 한다.

지주식은 200년도 더 전부터 이 마을에서 하던 양식법이고 그가 사는 이 마을 앞바다는 어쩌면 세계에서도 이 방식으로 김을 길러내는데 가장 유리한 지역일 수 있다. 그러니 일부러 바다에 산을 뿌려가면서까지 하는 부류식 양식에 눈을 돌릴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

"김발에 살얼음이 살짝 낄 때가 김이 제일 잘 자라제." 양식장을 둘러보고 부두로 돌아오면서 그가 말했다. 이 때문에 김을 거두자면 '항시 추운 겨울바다'를 견딜 수밖에 없다. 김형호 씨는 자신이 내는 김에 대해 "대한민국에 이런 김은 없으니께"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좋은 김을 낼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이웃들이 일체 다른 가공을 하지 않고 정성을 들이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기질이 풍부한 뻘 위에 적당한 조수간만의 차, 그리고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 같은 천혜의 조건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부류식 김은 김발이 24시간 내내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 지주식 김처럼 햇빛에 장시간 노출될 수 없기에 아무래도 영양상태가 부실하고 풍미도 덜하다고 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몇 차례 언론보도가 되기도 했듯이 내내 물에 잠겨있는 김발에 이 지역 사람들이 '꼽'이라고 부르는 이끼가 끼고 파래나 따개비가 엉기기 때문에 부득이 산을 써서 이들을 떨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산을 뿌리면 파래와 이끼같은 녹조류는 죽지만 홍조류인 김은 살아남는다. 새우나 따개비 같은 바다생물들도 견딜 수 없다. 대신 김은 잡티 없이 말끔하게 관리할 수 있다. 햇빛에 드러난 적 없으니 빛깔은 더욱 검다. 짙은 검붉은 색을 사람들은 고급 김으로 여긴다. 이에 비해 지주식 김은 바닷물이 빠질 때마다 하루 8시간가량 ‘살얼음이 끼는’ 찬바람 속에 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낮에는 햇빛을 받고 광합성도 한다. 그나마 정부에서 권장하는 유기산을 쓰면 별 문제가 없지만 이는 산도가 낮아 효과가 덜하다. 그래서 일부 어민들은 몰래 금지된 염산이나 심지어는 공업용 폐산을 뿌려 겉으로만 말끔해 보이는 김을 생산한다.



김형호 씨는 스무 살 때부터 자기 양식장을 운영해왔다. 만으로 37년이 된 것이다. 전에는 소나무나 대나무를 그대로 뻘에 박아 버팀목으로 썼다. 양쪽에 버팀목을 박아 그 사이에 그물모양의 김발을 매달아 김이 자라게 한다. 대나무 버팀목은 한 개에 2천 원이지만 이것은 한해 지나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최근에는 대나무 위에 플라스틱을 뒤집어씌운 것을 쓴다. 한 개에 1만5천 원 정도 하지만 10년 정도는 그대로 쓸 수 있다고 한다.

버팀목에 매달아놓은 김발 40m를 1척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마을사람들이 골고루 가구당 30~40척씩 했으나, 이제는 다들 늙어서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비교적 젊은 주민들 15가구가 300척씩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김형호 씨도 양식을 포기하는 노인들 것을 인수하다보니 이제 600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두에서 바로 보이는 가공공장으로 실려 온 김은 1차로 가로 세로 4m 깊이 3m쯤 되는 세척조에서 24시간 동안 민물로 세척을 한다. 물은 5km 떨어진 산위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다. 이러한 대형세척조가 모두 6칸이 있다. 세척이 끝난 김은 물과 함께 파이프를 통해 실내에 있는 가공공장으로 옮겨진다. 제일먼저 거치는 과정은 이물질 제거기를 통과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김에 붙어있는 조개껍질이나 뻘 등이 모두 걸러진다. 그 다음 거치는 과정은 절단과 숙성이다. 민물에 섞인 채 잘게 절단된 김들은 여섯 시간 가까이 작은 수조에 담긴 채 숙성을 거치면서 풍미가 깊어진다. 이것은 김형호 씨가 어릴 때 저녁때까지 세척을 마친 김들을 항아리에 담아 밤을 나게 하던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다. 숙성을 마친 김들은 다시 한 번 민물로 세척을 거친 뒤 물과 고르게 섞여 김을 우리가 흔히 보듯 종이 모양으로 성형하고 건조하는 건조기 안으로 옮겨진다. 김형호 씨의 표현대로 "조폐공사만 돈을 찍어내는가. 이것도 전부 돈이제" 하는 말에 딱 맞게 김발위에 고르게 뿌려져 전기 열로 건조된 뒤 쉴 새 없이 얇은 종이모양으로 밀려나온다. 거의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고 마지막에 띠지로 김을 묶는 일만 사람들이 모여앉아 한다. 필리핀에서 이웃으로 시집온 새댁을 비롯해 마을 사람 네 사람과 김형호 씨 아내와 처형까지 함께 어울려 이 일을 같이 한다. 기계는 24시간 돌아가며 사람들은 여섯 시간마다 교대를 한다.

그와 그의 아내도 똑같이 일을 한다. 김형호 씨는 일을 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취미도 없다고 했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내와 등산 다니는 일이 참 좋다'고 했다. 달마산에 오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내려와서는 함께 산채비빕밥을 사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와 함께 산 지 30년이 된 아내 허경자 씨는 본디 나주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차안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 야, 고생요? 말도 못하게 했지라" 하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얹혀살던 형님 댁에서 보리쌀 석 되와 함께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얻어 분가를 하면서 그들은 한동안 생계가 막막해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다 북평면 남총장과 완도장, 해남장으로 팔러 다녔다. 지금도 노동은 끊이지 않지만 결혼해 수원에 살고 있는 딸이나 군대에 갔다 와 뒤늦게 여수 수산대학에서 해양생물학을 공부하고 있는 아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막내 시동생까지 가족들 모두가 걱정 없이 산다고 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요즘이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이나 남부러울 게 없다고 했다. 새벽에 잠깨 집 밖에 나서서 맡아지는 바다 내음이 그렇고, 내키면 뻘에 나가 마음대로 잡아오는 낙지나 바지락 같은 갯것들이 그렇고, 장어가 먹고 싶으면 장어를 잡고, 짱뚱이가 먹고 싶으면 그것을 잡으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지금의 삶에 더없이 만족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 대가없는 일이 없듯 그가 누리는 행복 역시 모질고 호된 고통이 길러낸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배운 게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누군들 뾰죽 하게 많이 배워 보람된 일을 하고 있을까 싶어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또 그 말을 했다.

"학교라고는 다녀본 일이라고 읎어. 훌륭하게 농사짓는 분들 찾아가서 좋은 말 듣고 그런 건 열심히 했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는 장형과 형수 밑에서 설움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아무리 촌이라 해도 대개 초등학교들은 다녔는데 동무들이 학교에 갈 때 그는 소를 뜯기러 들로 다니거나 밭일을 거들어야 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을 가슴 아파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가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동생은 군에 간 동안이었다. '이제 너희들 다 키웠으니 세상에서 할 일은 다 했다'며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것이 젊은 날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는 내가 반미치광이가 되야부렀어. 술만 취하면 산 우로 올라가. 아침에 눈 뜨면 어머니 묘지 앞이여."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자신이 이를 악물고 남들보다 잘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신이 겪은 고통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에게 고통을 준 형님 때문에 자기가 지금처럼 부러울 게 없이 살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고맙다고. 빈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말도 못하게 미웠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나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제. 그래서 더 잘 해 줘부러. 그러니까 형님도 나중에는 고맙다 하등만."

"솔찮이 맛있게 묵그만 잉.", "아 야 어지간히 묵었는가?" 이야기를 마치고 남촌리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자 그의 어린 시절 친구가 아는 체를 한다. 이 지방 사람들이 하는 '아 야~' 이 말도 재미있었다. '아, 여기', '그 뭐시냐' 이런 의미일 텐데, 김형호 씨의 마을 사람들은 말을 시작할 때 어지간하면 '아 야' 가 먼저 튀어나왔다. '맛있어요'도 '아야 겁나게 맛있어라.' 이런 식이다. 서로의 눈빛과 표정을 읽으면서 말에 추임새를 넣어가며 그들이 대화를 하는 모습은 정겹고 따뜻했다.

바다에서 떨다 따뜻한 방에 들어앉은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들려준 신산스런 어린 시절이 이제 다 지나가고 그에게 허락된 행복한 일상이 다행이다 싶어 그랬는지, 김이 올라오는 밥그릇을 열어놓고 뜨거운 생선찌개를 퍼 올리는데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반미치광이가 돼 몸부림쳤다는 대목에서는 눈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나는 넘 말 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남 욕하고 욕심을 내세우면 몸에 병이 오등만. 그래서 아들한테도 그라제. 무조건 져라. 그래야 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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