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특집] 소, 牛여곡절

[ 소몰던 이야기 ]

개밥별 아래 송아지 배내똥

글. 김홍성 사진. 최수연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72년 봄부터 가을까지 나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3리의 목장에서 2백 마리 쯤 되는 한우를 방목하며 지냈다. 대부분 암소였고, 송아지들이 더러 있었으며, 암소와의 교미를 위해 묶어 놓고 기르는 종우가 두 마리 있었다. 종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화가 이중섭이 그린 소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그 놈은 US 마크가 찍혀 있는 군용 탄띠로 목둘레를 했다.

목장은 덕재고개 남쪽 비탈에 인공으로 조성한 목초지에 있었으며 고개 북쪽의 안덕재는 미군 비행기 사격장이었다. 고개 위에서 안덕재를 바라보면 울음산에서 뻗어내린 능선들 사이의 움푹한 골짜기에 풀도 나무도 없는 하얀 민둥산들이 보이는데, 이 민둥산들은 미군 비행기들의 타격 목표물이었다. 워낙 폭격을 해대니 풀이나 나무가 자랄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 들판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미군들의 비행기 사격은 한 달 중에 1주일 정도만 했다. 그 1주일 동안은 목장 주변의 목초지에서 소들을 방목했고, 사격이 끝나면 소들을 몰고 사격장 안으로 들어가 방목했다. 소들은 목장 주변의 인공 초지보다는 드넓은 사격장의 풀밭에 나가기를 좋아하였다. 인공 초지에서는 시무룩하던 놈들이 사격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개를 넘을라치면 흥분해서 앞을 다투느라 말처럼 뛰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만, 사격이 시작되고 미군 비행기가 날아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목장 주변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소들은 커다란 눈을 치뜨고 하늘의 비행기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소들은 동트기 전부터 배고프다고 아우성쳤다. 우리 목동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아 김나는 새벽밥을 먹었다. 철조망 위로 턱을 쳐들고 '음머어, 음머어' 보채는 소들에게 목동들은 수저를 흔들며 야단을 치기도 했다.

"이 놈들아, 니들 눈에는 이 수저가 안 보이냐? 사람 배부터 좀 채우자."

아침밥을 먹고, 점심 보따리를 허리에 차고서 소떼를 몰고 덕재고개를 넘어서면 소들의 잔등에 아침 햇살이 비껴 소털이 더욱 붉었다. 호미 날보다 더 긴 혀로 풀을 훑는 소리는 참한 농부가 낫으로 꼴 베는 소리처럼 들렸다. 가끔 뜸부기가 날아올랐다. 한 달에 한번 씩 일주일 동안 미군 비행기들이 날아와 천둥벼락 같은 불질을 해대는 사격장이건만 산 밑에도 없는 뜸부기가 살았다.

사격장이 되기 이전의 그곳 안덕재는 한적한 산촌이었다. 논이나 밭이 은근히 넓어서 옛적 주민들은 제법 포실하게 살았을 것 같다. 하루는 옛날 집터의 샘가에서 점심을 먹고 놀다가 오래된 놋숟갈을 주웠다. 감자를 하도 깎아서 그런지, 누룽지를 하도 긁어서 그런지 수저 왼쪽만 많이 닳아버린 그 놋숟갈은 한동안 내 전용 밥숟갈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군 비행기 사격장에 들어가 소를 방목한다는 자체가 놀라운 발상이었다. 드넓은 분지에 소 떼가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는 풍경은 얼마나 평화스러운가. 방목을 나갈 때는 종우와 너무 어린 송아지, 그리고 금방 송아지를 낳을 것 같은 암소도 목장에 놔두고 나갔다. 배가 크게 부른 암소의 가랑이를 잘 관찰하면 송아지를 낳을 날이 가까운 암소들은 젖이 부풀고 가랑이에 이슬이 비치기 때문에 그걸 보고 송아지 날 것을 알았다.

만일 미처 못보고 새끼 낳을 암소를 방목장에 데리고 나가면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런 암소는 혼자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하여 어딘가에 숨어서 송아지를 낳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찾아갈 때까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격장은 사방이 30리 씩 된다는 광활한 분지였다. 분지를 둘러싼 사방의 산에서 내려온 수많은 능선들이 크고 작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서 과연 어느 골짜기에 숨어들어 새끼를 낳았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우선 소들이 머물었던 곳을 중심으로 찾아 봐야 했다. 어느 날, 우리가 이 골짝 저 골짝을 뒤지며 어미 소와 송아지를 찾아 낸 시각은 다행히 아직 해가 남아 있을 때였다.

서너 그루의 버드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라며 우거진 옛 집터 같은 곳에 소들이 있었다. 어미 소는 편안히 앉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고, 갓 난 송아지는 어느새 일어서서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었다. 뒤뚱뒤뚱 걸음마 연습을 하다가 송아지가 똥을 쌌다. 그 똥은 어미 뱃속에 있을 때 생긴 배내똥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송아지 배내똥은 냄새가 없다. 주물러도 손에 묻지 않고 밀가루 반죽처럼 뭉쳐진다. 까맣고 말랑말랑하고 보드랍다. 박 씨는 배내똥을 뭉쳐서 나에게 내밀었다. 종기 난데다 고약처럼 붙이면 금방 낫는다면서 여드름에도 좋을 거라고 했다. 박 씨가 어미를 몰아 앞장서고 내가 송아지를 안고 그곳을 빠져 나왔을 때는 어느새 서쪽 하늘에 개밥별이 떠 있었다. 개밥별은 우리가 저녁을 먹고 마을로 막걸리 사러 갈 때 서쪽 산 위에서 나타나는 별이었다.

박 씨와 내가 교대로 송아지를 안고 걸었던 길은 삼십 리 밤길. 밤이슬 내리는 등때기며 목덜미는 써늘해도 송아지를 안은 가슴은 따스했다. 박 씨가 교대를 해 주느라고 내 가슴에서 송아지를 앗아 가면 가슴이 갑자기 써늘해졌다. 어미는 마음이 안 놓이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음머 음머 울었고, 송아지도 배가 고픈지 음메 음메 보챘다. 갈 길이 바쁘지만 송아지를 잠시 어미 곁에 내려주면 송아지는 어미젖에 주둥이를 쿡쿡 박아가면서 젖을 빨았다.

그 다음 날부터 며칠은 그 어미 소와 송아지를 목장에 놔두고 방목을 다니다 얼마 후부터는 어미만 방목에 데리고 나가게 되었는데, 이 어미가 종일 안절부절 하더니 저녁이 되어 목장으로 돌아갈 때는 무리의 맨 앞에 섰다. 그리고 목장 넘어가는 고개로 접어들자 냅다 뛰면서 '음머어, 음머어' 새끼를 불렀다. 목장에서 그 소리를 들은 송아지가 고개 위에 나타나더니 '음메, 음메' 하면서 득달같이 어미에게 달려왔다. 달려 와서는 어미젖을 빠는데 어찌나 격렬하게 빠는지 어미 소가 뒷다리를 움찔거릴 정도였다.

나는 사실 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짐승인지라 다루기가 쉽지 않고 심하게 다루면 뒷발질을 해댔다. 게다가 똥이고 오줌이고 아무 데나 싸는 놈들 아닌가. 하지만 갓 난 송아지를 품에 안고 밤길을 걸어 본 후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밤에 목부들과 호롱불을 켜놓고 화투로 뽕을 치다가 오줌 누러 나가보면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소들이 조용히 엎드려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갓 난 송아지와 어미가 무리들의 한가운데 있었다. 다른 송아지들과 배부른 암소들이 그 곁에 있고, 새끼와 무관한 젊은 암소들이 제일 외곽을 둘러싸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것들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있었던 것이다. 방목하는 암소들은 자연스럽게 위험으로부터 약한 것을 보호하려 그렇게 무리지어 있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을 가둔 감옥 얘기를 들어보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는 사나운 자들이 차지하고 순한 자들일수록 냄새 나는 변기통 쪽에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데 짐승들을 가둔 이 노천 울타리 속에서는 약자들이 보호되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새끼를 가진 어미 소들의 새끼 보호 본능이 어미 소들을 사납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미 없는 송아지들은 구석으로 몰려 있어야 마땅한데 그 놈들도 안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암소들끼리 모여 살면서 본능적으로 발휘되는 집단 모성 때문이지 않았을까.

날마다 소들을 몰고 방목을 다니면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전체 무리에 속하지 않고 따로 노는 소수의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 놈들은 방목장으로 나갈 때는 대충 섞여서 나가지만 일단 방목장에 나가서 자유로운 몸이 되면 어느새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이놈들을 잘 감시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한눈을 팔다가 길이 좁아지는 덕재 고개 밑에 와서야 그 놈들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여태 오던 길을 되돌아서 사격장 안을 헤매며 그놈들을 찾아야만 했다. 해가 능선으로 넘어가 버린 스산한 길을 되짚어 걸으며 우리는 심한 욕을 해대곤 했다.

그러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이 고약한 놈들은 하나같이 다 사연이 있는 놈들이었다. 뿔이 삐뚤어진 놈은 난산으로 태어나 어미 없이 자란 놈이었고, 앞 다리를 조금 저는 놈은 풀 베러 온 동네 애들이 장난으로 던진 낫에 발목 인대를 다쳤던 놈이며, 그도 저도 아닌 놈들도 최소한 먼 고장에서 자라다 트럭으로 실려 온 지 얼마 안되는 놈들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그들은 주류에서 소외되었고, 소외된 놈들끼리 유유상종으로 작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놈들의 미운 얼굴을 하나하나 익혀 가면서 내 자신과 내 친구들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 놈들과 특별한 정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그 도깨비 같은 꼴통들을 감시하고 찾아 나서는 일에 내가 자주 나서곤 했다.

한밤중에야 이놈들을 간신히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그 날은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었다. 소들을 새 풀밭으로 이동 시키느라 사격장 한가운데로 난 길로 소들을 몰고 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나더니 목장 쪽 고개 마루 위로 두 대의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사격 훈련이 있기 전에 이처럼 헬리콥터들이나 비행기들이 나타나 정찰을 하고 가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신경을 안 썼다. 그런데 그 헬리콥터들이 기수를 내리고 우리를 향해 낮게 접근하더니 우리의 머리 위에 굉음을 쏟으면서 벼락같이 스쳐갔던 것이다.

이 바람에 소들이 놀라서 양쪽 비탈로 갈라져 냅다 뛰기 시작했는데, 건너편 하늘에서 선회한 헬리콥터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양 쪽 산비탈로 갈라진 소들을 향해 기관총을 쏴댔다. 한순간 아찔했지만 그것은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이었다. 헬리콥터의 굉음만 들어도 놀라는 소들은 머리 위에서 쏴대는 공포탄 소리에 놀라 꼬랑지를 바싹 치켜들고 이리 저리 제멋대로 갈라져서 뛰었다.

나는 그 때 헬리콥터의 뻥 뚫린 문턱에 거치된 기관총을 붙들고 선 미군들의 얼굴을 봤다. 한 놈은 흑인이었고, 한 놈은 백인이었다. 한 놈은 껌을 씹고 있었고, 한 놈은 입 가장자리에 시거를 물고 있었다. 우리는 그 미친 미군 놈들이 손오공처럼 유유히 사라지는 하늘을 향해 증오와 저주를 담은 욕설과 함께 팔뚝질을 해댔다. 그리고 궁둥이를 털면서 소들을 찾아 나섰다.

뿔뿔이 흩어진 소들을 앞세우고 이 쪽 저 쪽에서 목동들이 모이기 시작한 때는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소들은 멀리까지 달아나 꽁꽁 숨어 있었기에 아직 많이 모자랐다. 나중에 박 씨가 한 떼의 소들을 몰고 합류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소들은 대부분 그 꼴통 소들이었다. 윤 씨와 나는 목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이르렀건만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사격장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보름달이 올라와 있었건만 산그늘 풀숲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앞장선 윤 씨와는 달리 나는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칡넝쿨은 소들이 좋아하는 풀이었다. 윤 씨가 어디선가 금방 싼 쇠똥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코를 큼큼 거린지 얼마 안 되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쇠 눈깔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뿔이 삐뚜름한 대가리 하나를 확인했다. 그 놈이 이 쪽 무리들의 대장이었다. 다행히 다른 소들도 모두 근처에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되새김질을 하며 앉아 있는 소들이 얄미워서 엉덩이를 내지르는 시늉을 하자 소들이 여기저기서 일어섰다.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는, 눈치가 빤한 놈들이었다.

"가자, 이 도깨비 같은 놈들아. 배고파 죽겠다."

윤 씨가 싸리 가지를 꺾어들고 달빛 속에 쳐들자 도깨비들이 걸음을 빨리했다. 나는 생각했다. 저 커다란 덩치에, 형형한 두 눈에, 뿔까지 달린 놈들이 사람에게 길들어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가축이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자정이 다 될 무렵에야 우리는 목장으로 돌아왔다. 다들 걱정이 돼서 자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막걸리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먼저 온 박 씨가 여우 고개 마을에 가서 받아 온 막걸리였다. 형제지간이나 다를 바 없었던 목장 책임자 전 씨의 부인, 즉 형수가 따뜻하게 데워준 막걸리가 뱃속에 들어가자 그토록 볶아대던 허기가 달아나는 것 같았다.

형은 아직 몇 마리가 모자란다고 걱정했으나 박 씨는 걱정 말라고 했다. 내일 사격장에 나가면 저절로 찾아 올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다 돌아왔다. 그러나 새끼 밴 소가 사격장에서 유산을 했다. 형에 의하면 그 암소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씹고 있어서 자세히 보니 태였다고 했다. 형은 암소 주변을 살폈고,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송치를 발견했다고 했다.

너댓 명에 달하는 목장 남자들은 그때 겨우 스무 살 새댁이었던 형수가 해주는 밥을 먹었다. 형수는 양양 쪽 산골 태생이어서 산나물이나 버섯을 잘 알았다. 우리는 형수가 직접 캐 오는 산나물국에 산나물 반찬으로 고봉밥을 먹었으며, 항고에 꾹꾹 눌러 담아 주는 점심을 보자기에 싸서 둘러메고 사격장으로 나갔다.

밤에는 형네 방에 둘러앉아 막걸리 내기 뽕을 치며 떠들썩하게 놀다 잤다. '뽕이요!' 하면 웃음소리가 나고, 낙장불입이니 뭐니 해서 시끄럽기 마련이다. 그날도 그러다가 오줌을 누러 나왔는데 짙은 안개 속에 소 같은 것들이 뛰어 다니는 게 보였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소 마당을 바라보니 소 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안개 속에서 꼬리를 빳빳이 쳐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들이 우리 소인 것을 알았다.

동이 트도록 안개 속을 헤매며 소를 찾았다. 일부는 마을까지 달아나서 남의 집 밭을 망쳐 놓아 변상해야 했다. 훗날 마을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지역에는 표범의 일종인 개호주가 산다고 했다. 개호주란 주로 개를 잡아먹기 때문에 붙은 이름. 마을 노인들은 여우 고개 부근에 있던 사당에서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는데 새마을 운동을 하느라고 사당을 헐고 산신제를 지내지 않게 되자 산신령이 노해서 개호주를 보내 설치게 한다고 했다. 박정희가 직접 만든 새마을 노래 가사에도 들어 있듯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는 일은 그렇다 쳐도 마을 동구의 오래된 느티나무 당목들이 잘려 나가고, 서낭당도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헐려나갔다. 휴전이 되면서 남한 땅이 된 삼팔선 이북 지역처럼 토착민은 적고 이주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특히 심했다. 여우 고개는 바로 그런 지역이었다. 게다가 군 작전 지역이기도 했으니 서낭당이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그해 가을, 나는 대학 입시를 위해 학원에 다니느라고 목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 목장은 몇 년 후에 없어졌다. 사격장의 일반인 출입 통제가 강해진데다가 사료 값은 급등하고 소 값은 급락하는 파동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때는 광우병이니 구제역이니 살처분이니 하는 단어는 아직 생기기 전이었으니 '사격장의 소떼'는 그나마 낭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김홍성님은 산책과 도보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20세기 말에 네팔로 이주하여 설산을 벗하고 살다가 근년에 귀국해 춘천에 머물고 있습니다. 1972년 고향인 산정호수 인근 명성산 기슭에서 목동으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시집《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산문집《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 《천년 순정의 땅 히말라야를 걷다》, 《꽃향기 두엄냄새 서로 섞인들》을 펴냈습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