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특집] 소, 牛여곡절

[ 소고기, 이렇게 먹어 왔다 ]

설렁탕, 불고기, 갈비, 꽃등심... 세월 따라 흘러온 소 요리

황교익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 식물과 동물을 같이 먹지만, 전반적으로 육식에 대한 열망이 더 크다. 이는 영양학적으로도 당연해 보이는 욕구이다. 동물성 식품에는 당장에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는 지방질과, 몸의 조직을 이루고 역시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는 단백질이 식물성 식품에 비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쇠고기 식용은 소 사육과 함께 시작됐을 것인데, 한반도에서 소가 사육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경남 김해의 유적지에서 소뼈가 나왔고 그보다 앞선 부족국가시대에 소를 길렀다는 문헌 자료는 있다. 또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의 관직명으로 우가, 마가, 저가, 견사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소 사육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므로 신석기시대 농경의 시작과 함께 소를 키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를 키웠다 하여도 쇠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형편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소는 논밭을 갈아야 하는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거나 병들어 죽은 소는 그게 일소였다고 하더라도 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먹을거리에는 으레 종교가 관여한다. 인간의 식욕은 근원적인 욕망인 탓인데, 종교는 인간에게 금욕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이 하잘것없는 것이라 여기게 하고, 결국에는 '한 단계 위에 있는' 종교적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전략을 쓴다. 그래서 육식에 대한 금기를 가지고 있는 종교들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득세할 수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종교에 의한 육식 금기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삼국시대에 우리 땅에 들어온 불교는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에는 국교로 자리를 잡았다. 고려에서는 모든 가축의 도살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면서 분위기는 다소 바뀌었다. 몽골은 초원의 육식 민족이었고 그 육식의 풍습은 불교국가인 고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육식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 설렁탕이다. 몽골에서는 쇠고기, 양고기 등으로 끓인 탕을 '슐루'라 하며 이 말이 변하여 설렁탕이 되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도 소 도살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농경과 운송을 위해 소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왕은 소도살금지령을 수시로 내렸다. 그러나 왕의 금지령이 한반도 전체에서 다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의 조리서에도 쇠고기 조리법이 등장하며 풍속화에서도 쇠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들이 등장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별식으로 쇠고기를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맥적- 불고기 역사에 대한 그 엉뚱한 오해
한민족의 쇠고기 음식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불고기이다. 한국 대표 음식이다. 한국인은 불고기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음식인 것으로 알고 있다. 불고기란 "쇠고기 따위의 살코기를 저며 양념하여 재었다가 불에 구운 음식, 또는 그 고기"를 말한다. 불고기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최남선의 《고사통》과 중국의 고서 《수신기(搜神記)》 등을 인용하며 고구려의 '맥적'에 그 전통이 닿아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엉뚱한 일이다. 먼저, 맥적부터 살펴보면, 최남선이 원전을 오독하여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한다. 1906년에 나온 최남선의《고사통》에는 맥적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중국 진(晉)나라 때의 책《수신기》를 보면 '지금 태시(太始) 이래로 이민족의 음식인 강자(羌煮)와 맥적(貊炙)을 매우 귀하게 안다. 그래서 중요한 연회에는 반드시 맥적을 내놓는다. 이것은 바로 융적(戎狄)이 쳐들어 올 징조이다'라고 경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맥적에는 대맥(大貊)과 소맥(小貊)이 있었으며, 한대(漢代)에서 이것을 즐겨 맥적을 중심으로 차린 연회를 맥반(貊盤)이라 하였다. 강(羌)은 서북쪽의 유목인을 칭하는 것이고, 맥(貊)은 동북에 있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을 칭한다. 즉 강자(羌煮)는 몽골의 고기요리이고, 맥적(貊炙)은 우리나라 북쪽에서 수렵생활을 하면서 개발한 고기구이이다."

그런데, 《수신기》의 원문은 이렇다.

"호상(胡床), 맥반(貊槃)은 적족(翟族)이라는 민족이 쓰는 용기의 이름이고 강자(羌煮), 맥자(貊炙)는 적족이 먹는 음식의 이름이다. 그런데 진무제 태시 연간부터 중원지구에는 이런 도구와 음식이 유행되었다. 귀족들과 부자들의 집에는 모두 그런 용기들을 갖추어 놓고 희사 때 귀빈들이 오면 우선 그런 용기와 음식을 상 위에 내놓는다. 이것은 서융(西戎)과 북적(北翟)이 중원지역을 침범할 징조를 미리 보인 것이다." (<수신기>, 중국 연변인민출판사, 2007)

《수신기》에는 맥적을 적족의 음식이라 적고 있다. 또 그 적족에 대해 뒤에서는 북적이라 다시 말하였는데, 저 적족 또는 북적이 한민족인지 또는 고구려 민족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수신기》는 역사 서적으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기원전 4세기경에 간행된 중국의 책인데, 그 안의 내용은 요즘으로 보면 '전설의 고향' 수준의 허무맹랑한 귀신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불고기라는 이름이 등장한 시기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일본에 우리의 불고기와 조리법 및 그 음식명의 구조가 유사한 음식이 있다. 야키니쿠, 즉 불에 구운 고기, 소육燒肉이다. 불(燒)+고기(肉). 불고기는 소육燒肉의 한글 번역일 수 있다. 일제시대 조선어운동을 하였던 원로 국어학자 고 김윤경 선생이 1965년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생소하고 듣기 어색했지만 벤또 대신에 도시락이, 돔부리 대신에 덮밥이, 야키니쿠 대신에 불고기라는 말이 성공한 것은 얼마나 좋은 예냐"고 말한 적이 있다.

쇠고기에 대한 '역사적 허상'은 맥적 이외에도 많다. 그 중에 맥적을 꼽아 길게 쓰고 불고기의 출발이 일제강점기 때의 일일 수 있다고 설명을 붙인 것은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음식애국애족주의'를 깨뜨려보자는 의도이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쇠고기 음식의 대중화는 일제시대부터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농수축산업을 개편하였다. 일제의 소 사육 정책은 그때까지의 한반도의 소 사육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한반도의 소를 일소로 보지 않고 고깃소로 여긴 것이다. 일제시대에 소 사육 마릿수는 급격하게 늘어 1930년대에 150만~160만 마리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의 한우 사육 마릿수가 200만 마리 정도인데, 그때의 인구와 경제사정 등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그 당시 자료를 보면 쇠고기가 돼지고기보다 쌀 정도였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쇠고기 일상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명을 근간으로 하는 '브랜드 쇠고기'가 그때에 이미 등장하였다. 평양우가 그것이다. 한반도의 소가 다 맛있는데, 그 중에 평양의 소가 특히 맛있다 하여 일본에서도 이를 실어갔다. 평양에는 평양우로 불고기를 굽고 평양우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는 냉면집이 번창하였다. 불고기 굽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란대에서 불고기 굽는 일을 금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쇠고기 공급 사정은 크게 나빠졌다. 혼란통에 소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소는 다시 조선시대 때처럼 귀한 것이 되었다.

해방 이후 쇠고기 음식의 역사는 소갈비가 주도하였다. 소갈비 역사는 경기 수원에서 시작하였다. 수원에 화성 발안 출신의 이귀성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제과'라는 일본식 제과점을 운영했다. 광복 후 그는 '화춘옥'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해장국(갈비우거지탕)을 냈다. 해장국집은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더 돈벌이가 될 만한 메뉴가 없을까 궁리했고, 그렇게 해서 1956년 소갈비구이가 탄생했다. 식당 한쪽에 화덕을 만들고 여기에 길이 17cm 남짓의 커다란 소갈비를 구워 양재기에 담아 냈다. 손님들은 목로주점의 그것 같은 기다란 나무탁자에 앉아 종이로 소갈비뼈 양쪽을 잡고 갈비를 뜯었다.

1956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나고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이다.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 소갈비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란 부자이거나 고급 공무원, 장군 정도는 돼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원보다는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와서 먹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몇 차례 다녀갔다고 하는데, 박 전 대통령이 오면 숯불 연기를 피워 다른 손님들의 눈길을 피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1980년대 들어 서울에도 유명 소갈비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강남 개발 붐이 일면서 소갈비를 굽는 '가든'이 생겼다. 서울의 소갈비집 주방장들은 대부분 수원 소갈비집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소갈비의 살을 바르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수원에서는 뼈를 중심에 두고 한쪽으로 살을 발라내었는데 서울에서는 살을 양쪽으로 바르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수원과 서울의 소갈비는 비싸 서민의 음식이 될 수 없었다. 가장이 보너스를 타거나 엄마가 곗돈이라도 타야 소갈비를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고급 음식이던 소갈비의 대중화를 선언한 갈비가 등장한 것은 1980년대였는데, 뜻밖에도 경기 포천군 이동면이라는 시골구석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동면에서 시작한 갈비이니 이동갈비란 이름을 달았다.

이동면은 군부대 지역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이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중반 미군이 부대를 옮기고 난 다음에도 한국군이 곳곳에 주둔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 한국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돼지갈비집들이 있었다. 그런데 장교들은 이 돼지갈비에 만족해하지 않고 소갈비를 찾았다. 장교들이라 해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 박리다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같은 양이라도 많아 보이게 하는 조리법도 필요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갈비뼈의 가운데를 세로로 잘라 댓수를 늘리는 방법이었다. 갈비 한 대가 두 대로 바뀐 것이다. 이를 쪽갈비라 이름하였다. 갈비의 길이도 줄였다. '소갈비 1인분 10대'라고 간판이 붙자 더 이상 소갈비는 비싸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이 이동갈비는 전국으로 번졌다. 그러나 1990년대 말 갈비가 아닌 다른 부위 살을 갈비뼈에 붙여 판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 인기는 주춤거리게 되었다.

갈비 전성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등심이었다. 특히, 마블링 잘된 등심을 최고의 쇠고기로 여기는 시대가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다. 이는 순전히 일본의 영향이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고기로 마블링 쇠고기를 선택하였는데, 메이지유신 이후에나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그들의 짧은 쇠고기 섭취 경혐으로는 그 기름 가득하고 부드러운 고기가 맛있었던 모양이다. 마블링은 오랜 쇠고기 섭취 역사를 지닌 서구에서는 없는 기준이다. 한국의 축산 관계자들이 선진국의 소 축산 경험을 배운답시고 일본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 마블링을 기준으로 하는 등급제이다.

마블링 잘된 등심을 얻기 위해 풀을 먹어야 하는 소는 억지로 곡물을 먹고 황소는 거세까지 당한다. 소만 그렇게 당하는 것이 아니다. 마블링 때문에 축산 농가는 사료 회사에 코가 꿰어 있다. 한국 소비자는 그 비계 덩어리의 쇠고기를 최고의 고기라며 먹고 있다.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소를 키웠지만, 한국인들은 아직 맛있는 쇠고기를 잘 모른다. 그것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숙성된 붉은 살코기의 진한 육향 대신에 간장 양념으로, 쇠기름 맛으로 범벅이 된 쇠고기를 맛있다고 먹어왔을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인은 쇠고기 맛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먹고 있는 쇠고기가 진정 맛있는 쇠고기인지 한번쯤 의심해 보라, 권한다.

황교익 님은 맛깔스럽고 날카롭게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맛칼럼리스트로, 스스로 악식가라 자처한다. '악식가의 미식일기'가 그의 블로그. 《한국음식문화박물지》, 《미각의 제국》, 《맛따라 갈까보다》, 《소문난 옛날 맛집》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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