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길을 묻다·길을 가다 ]

사랑은 전부 안는 거야. 그래야 진짜 사랑이지

김선미

장화순 전 진광고등학교 교장



올해 둘째 아이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 경찰차가 진을 치고 어깨띠를 두른 이들이 손님을 맞고 있어 무슨 사고가 난 줄 알았다.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강당에 갇혀 있는데 밖에서 학교폭력예방 어쩌구 하는 문구를 완장처럼 두르고 있는 어른들이 오히려 폭력적으로 보였다. 그 옆에는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국회위원 예비후보들이 부지런히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졸업식은 2년 전 같은 학교를 졸업한 큰 아이 때보다 길었다. 외부인사 축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사만 하고서 수행원들을 데리고 식장을 나가버리는 국회의원 때문에 내 아이 졸업식이 모독당한 기분이었다. 국회의원이 빠져나간 다음 단상에 올라간 구청장이 "여러분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물으니 누군가 "아니요!"라고 외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아이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구청장은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꼭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일장 연설을 했다. 어떤 이야기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안는 걸 보니 역시 별 재미없었던 것 같다. 졸업식은 어른들의 기우와 달리 너무도 얌전히 끝났다. 소녀들은 지루한 졸업식을 잘 견디고 나서 참새 떼 마냥 재잘거리며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었다. 그 발랄하고 예쁜 아이들의 웃음이 서글퍼 보인 것은 왜일까. '왕따' 문제로 자살하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국가가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울적한 겨울을 보냈다. 봄은 유난히 더디게 오는 것 같았다. 봄은 꼭 남쪽에서 오는 것일까. 서울에서 길을 떠나며 문득 든 생각이었다. 원주 봉산동에서 반백 년 넘게 붙박이로 살고 있는 장화순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북한산 바위들은 눈을 말끔히 씻어 버렸는데, 원주 치악산의 눈은 히말라야 만년설마냥 흰 정수리 위에서 아직 빛나고 있었다. 원주는 서울에서 남동쪽에 있다. 하지만 1천282m의 치악산은 836.5m의 북한산보다 높다. 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따스한 바닷바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추운 땅이다. 이렇게 기후는 복합적인 자연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오늘 우리 아이들과 학교 현장에서 이상기류들이 생겨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전에 원주에서 '맹물회'라는 모임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냥 한 달에 한 번씩 교장선생님께 맛난 것 사드리고 싶어 모인' 제자들이라고 한 소리가 기억에 남았다. 늘 만나고 싶고 맛난 게 있으면 먼저 가져다 드리고 싶은 '교장선생님'은 어떤 사람일까.

치악산 서쪽자락 봉산동은 신령한 기운이 모이는 곳인지 당집에서 내건 대나무 깃대가 십자가보다도 많은 동네다. 그 깃대들 사이에 뿌리내린 장화순 선생은 천주교 원주교구가 세운 진광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서른일곱 살이던 1973년부터 1997년 정년퇴임 때까지 이십오년도 넘게 이 학교 교장을 맡았다. 이전까지는 원주 대성고등학교의 교감이었고, 대성고등학교 전신인 성육고등공민학교 시절부터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 과목을 가르치며 한 평생을 교사로 살았다. 서울대학교에서 지질학을 공부하던 장화순은 전쟁이 나자, 군에서 병기부대 교관으로 사병들을 가르쳤고, 제대 후에는 학업을 이으면서 절반은 고향에서 자신보다 서너 살 어린 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이십대를 보냈다. 그때부터 줄곧 스스로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이 평생의 업이 된 사람이다.

"요즘 사람들이 내 얘기 싫어할 거예요. 다 내 자랑으로 들릴 테니까."



그는 남쪽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흔들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 양지바른 집이다. 길 건너편에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손수 지은 토담집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부모와 형 내외가 한 살림을 하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곳으로 분가했다. 원래 본가와 한 마당을 썼는데 지금은 두 집 사이를 가로 질러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이 '무위당로'다. 그렇다. 장화순 선생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세 살 아래 동생이다. 내가 그이를 처음 뵌 것도 무위당의 어린 시절과 가족사를 취재하기 위해 선생의 건너편 본가를 드나들면서였다. 일찍이 생전의 무위당을 만난 일이 없는 내게 교장선생님은 형과 함께 붓글씨를 배우고, 봉천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어탕을 끓여 먹던 아득한 추억 그리고 서울에서 전차를 타고 다니며 공부하던 학창시절과 전쟁이 나자 형과 함께 원주까지 피난 내려오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교장 선생님은 꼼꼼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미학을 전공하던 예술가 형과 달리 수학을 좋아하고 지질학을 전공한 동생의 기질적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물고기가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는 형과 달리 '고기는 내가 잡아올 테니 형님은 들어가 공부 하세요' 하던 활달한 이다. 형과 똑같이 새로 빤 옷을 입혀 내보내도 돌아올 때는 혼자 새까매져 와 어머니 일감을 더해주던 개구쟁이. 그래도 자기가 개울에 나간 날은 온 가족이 어탕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특히 할머니가 좋아했다던 분이다. 내게는 생전에 뵌 적 없는 무위당 선생이 너무도 완벽한 인격으로 여겨져 현실감이 없는데, 어린아이 같은 맑은 표정의 교장 선생님은 참 편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무위당의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원주사람들에게는 그냥 영원한 '교장선생님'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그가 교사생활을 시작한 성육고등공민학교와 대성학교는 모두 형인 무위당이 집안의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였다. 무위당은 5·16쿠데타 직후 평화통일을 주장한 죄로 옥살이를 했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재단 이사장 자리마저 빼앗기고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평생을 보냈다. 지금 집 근처에 있는 파출소가 당시 장일순을 감시하기 위해 일부러 생겼다고 할 정도였다. 선생은 그런 형을 늘 곁에서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옆집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쭉 홀로 남은 형수와 이웃하며 살고 있다. 파수꾼이자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 노릇까지 그의 몫이었다. 전쟁 중에 장교 시험을 치러 자원입대한 것도 집안에 먹고 살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이를 위한 장일순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동안, 무위당은 장일순이라는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무위당을 살아 있게 하고 그를 믿고 따르며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수많은 제자와 후배들. 그들 모두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분명 실재하는 커다란 무엇으로 무위당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 중심에 오롯이 장화순 교장이 있었다. 예수나 부처가 단지 한 사람의 생물학적 인격이 아니라 그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많은 이들의 상징체계가 된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아침나절 아내의 병문안을 다녀온 길이라고 했다. 얼마 전 골목길 빙판에서 미끄러져 병원신세를 진 지 꼬박 일주일째라고 했다. 아내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차 병원 마실을 다닌다고 했다. 집안 가득 햇살이 환히 비추는 데도 적막하다싶은 것이 아내의 빈자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교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달래 '교장선생님'이 아닌 것 같았다. 보통 교장이 자기 자랑을 시작하면 학생들은 하품부터 나오겠지만 그는 좀 달랐다. 자랑이라고 처음 시작하신 게 아침마다 교장실로 가기 전에 학교 주위에 쓰레기 줍는 이야기다.

"지금도 신기하게 여겨지는 게 아침마다 쓰레기 담을 비닐봉지 하나가 꼭 내 앞에 나타나더란 말이에요. 하늘이 시켜서 그런 것처럼 말이야" 하면서 아이처럼 웃는다. 이 말을 들으면서, 순간 이렇게 깔끔한 교장 밑에서 교사나 학생들이 피곤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인위적으로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못하게 해요. 여름에는 교실 천정이나 복도에 거미줄이 있잖아. 난 그것도 못 치우게 했어요."

그가 정년퇴임 10년 전쯤,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했을 즈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장학사가 와서 학교 구석구석 거미줄이 많은 것을 보고는 왜 아이들한테 청소를 시키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야간자율학습이라고 도교육위원회에선 교장에게 다 맡긴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강제로 시켜 대학진학률 높이라는 거잖아요. 근데 교장이 와서 밤에 모기를 잡아줄 건가, 선생들이 일일이 잡아 줄 거도 아니잖아요. 거미가 모기를 잡아먹는데 그걸 왜 치워요."

평소 장 교장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던 장학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교실 바닥에 얼굴이 비치도록 윤이 나게 왁스 걸레질을 하고, 창문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닦아내느라 단축수업까지 하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거미도 좋고 우리도 좋잖아요. 모기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선생은 세상에 화내고 살 일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학교에 늦게 오는 애가 있으면 나는 '어디 아프냐'고 묻지 왜 늦었냐고는 하지 않았어요. 출석률 좋은 학급을 표창하는 것도 못하게 했으니까. 그래도 한 달치 통계를 내보면 결석이나 조퇴가 거의 없는 반이 있어요. 그러면 내가 선생님들한테 묻지. 이 반 애들은 건강이 좋은가 봐요 하고."

당시에는 한 반 학생이 60명이나 되는데, 지각도 있고, 결석도 있고 조퇴하는 학생이 생겨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아픈 학생에게 조퇴를 못 하게 하고 참으라고 하는 선생들을 나무라는 쪽이었다. 수업에 빠지면 손해라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 텐데 알아서 하도록 해야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규칙에도 반드시 예외를 인정하고 양해해줄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나는 딸아이 졸업식장에 경찰이 출동한 일이 떠올랐다.

"학교에는 당연히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어요. 학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문제 학생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는 오히려 문제 자체보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문제를 키운다고 했다.

"이 세상은 말이지, 모든 것이 법대로만 살 수가 없다고. 법을 어기는 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럼 사고가 났을 때 원인이 뭔가를 알아내 잘 이해하고 지도해야 되는 거지. 무조건 죽일 놈으로 몰아 처벌하는 건 잘못이야."

어느 순간부터 문제 학생을 품고 가르치려는 노력보다는 처벌과 보복에 급급한 세상이 되었다. 그는 설령 학교에 문제가 생겨 신문에서 법석을 떨어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기자들도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해 기사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했다. 연일 학교폭력과 따돌림, 학생들의 자살이 신문 지면을 어지럽힌다. 학교가 앓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세상이 병들었는데 학교만 정상이라면 그것도 이상한 일 같았다. 그는 이런 자극적인 기사에 호들갑을 떨기보다 단 한 명의 아이들이라도 보듬어 안는데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교장 재임기간 중에, 학생들 생활기록부에는 좋은 말만 쓰라고 교사들을 독려했다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게으르지만 정직하다 이런 식으로 좋게 써주라고 했어요. 아이를 지도하는데 꼭 필요한 기록은 남들 안 보게 학교 안에만 남겨두면 되잖아요."

이렇게 자애로운 이라도 교장 노릇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유신정권 아래 교육자로서의 소신을 지키는 일은 어떠했을까. 한 번은 장학사가 와서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교육 실적이 전무한 기록들을 뒤져보더니 "선생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그래도 학교를 이끄시는 분이 정부나 문교부 교육방침을 따르는 척이라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소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후배뻘인 장학사를 이렇게 달랬다.

"그게 사람으로 할 도리는 아니야. 그렇게 알아. 자네가 지금은 장학사지만 이 시대가 지나가면 내가 왜 그랬던가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내가 미리 자네한테 그런 부담을 안 주는 거야."

나중에 박정희가 죽고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장 교장을 만나면 장학사는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곤 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다독였다. "다 잊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옛날 일은 다 지나간 거야. 마음에 둘 필요 없어."

상부지시만 따르다보면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나쁜 일을 부역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가까운 역사에서 무수히 보아왔다. 그는 비록 상부의 지침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 앞에서 유신체제에 대해 욕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유신체제 때문에 밥 먹고 사는 애들이 많잖아. 걔들이 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냥 정직해라, 성실하게 살아야한다. 그러면 되는 거야."

학생들이 학교에 와서 부모의 잘못 때문에 고민하지 않도록 보듬고 가야하는 것도 선생의 도리라는 뜻이었다. 선생은 학생과 학부모가 밥을 먹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모시고 받드는 게 마땅하다고도 했다. 밥집을 하는 후배에게 '자네 집에 밥 자시러 오는 사람이 자네한테는 하느님이여'라고 했다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일화가 생각났다.

"내가 한번은 지학순 주교님한테 엉뚱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갑자기 그가 재미난 이야기가 생각났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혼자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학생이 원하지 않는 학과에 담임교사들이 대학간판만 보고 지원하게 하는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이 내세우는 원칙이 교사들의 경쟁심을 완전히 누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사장인 지학순 주교에게 건의 했다고 한다.

"학교가 전부 우수한 학생만 떠받드는데 주교님이 하시는 학교만큼은 입학시험을 치러서 위에서부터 뽑지 말고 밑에서부터 성적이 낮은 애부터 뽑는 학교를 만드시면 어떻겠어요."

당시 고교입시 부활을 공약으로 내건 교육감이 당선돼 원주 시내 고교평준화가 해제 되었을 때 일이다. 학교 운영은 교장한테 맡겼으니 교장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지 주교의 답이었다. 무위당 선생이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있던 대성학교에서 교감으로 있던 그를 천주교회에서 세우는 새 학교로 부른 이도 바로 지학순 주교였다. 안정된 곳에서 개척자의 심정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을 텐데 고민은 없었을까. "주교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가야지"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베드로를 부른 예수가 생각났다. 그런데 선생의 세레명을 물으니 그 역시 베드로라고 했다.

"매주 열리는 직원회의에서 한 달 동안 그 문제 가지고 토론을 했어요. 계속 갑론을박 하다 보니 선생들이 안 거야. 우리가 너무 일류 대학만 고집하니 교장이 어깃장을 놓는다는 걸."

결국 교사들은 교장에게 통사정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성적만 좇는 교육은 지양할 테니 학생선발은 지금처럼 하자고. 대신 사회에서 설움을 받는 아이들을 학교가 품어 함께 가르치자고. 그 뒤로 그의 학교에서 만큼은 학생들의 적성이나 지향과 무관하게 무조건 소위 일류대학에만 보내려는 시도는 멈추었다고 한다. 진광학원은 가톡릭교회에서 세운 학교이면서도 종교수업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학생과 학부모의 자립을 위한 신용협동조합 교육을 실시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협동조합 운동의 싹이 진광에서부터 움터 오른 배경에도 장 교장이 있었다.

"맡은 아이들을 더 향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조를 가지고 쌀이라 우기지 말고, 우리가 받은 아이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기르자는 거야."

'참을 찾자, 옳게 살자, 사랑하자'가 진광고등학교의 교훈이었다.

"결국 사랑 안에 모든 게 다 들어 있거든. 사랑은 전부 안는 거야. 그래야 진짜 사랑이지. 사랑하는 자식에게 독약을 먹일 수는 없잖아."

교장 선생님 입에서 나온 사랑. 이 지극히 당연한 말이 왜 이리 낯설게 들렸을까.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생님, 교사를 부모처럼 극진히 모시고 섬기는 학부모와 학생. 떠올려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런 선생에게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궁금했다. 그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가깝게는 형님이지." 그리고는 "할아버지 존경하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할머니 어머니를 존경하지. 먼데서 찾을 거 없어"라고 했다.

어느덧 해거름이 다되었다. 집안에 들어섰을 때 창문 맞은 편 벽에 걸린 액자를 환히 비추고 있던 햇살이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내려와 거실 바닥 위로 뒷걸음질 쳐 슬그머니 내빼고 있었다. 벽에는 조한알과 무위당, 각기 다른 호를 쓴 한글과 한자 서예작품 두 개가 걸려있었다. 생전에 난을 치고 글을 써서 주위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던 '형님'이었다. 그 중 ‘守則十戒(수칙십계)’라는 글은 무위당이 동생에게 준 유일한 작품으로 암 투병 중에 쓴 것이었다. 천주의 십계명을 지키고 살라는 유언인 셈이다. 형이 말하는 천주는 무엇인가. 옆에 나란히 걸린 한글 서예 속에 이런 답이 있었다.

"조석으로 끼마다 상머리에 앉아 한울님의 큰 은혜에 감사하자 하늘과 땅과 일하는 만민과 부모에게 감사하자 이 모두가 살아가는 한 틀이요 한 뿌리요 한 몸이요 한울이니라."

이 액자는 교장 선생의 아들이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 제가 글이 너무 좋아서 사가지고 왔어요"하며 집에 들인 것이라고 했다.



해가 거의 저물었다. 아무조건 없이 우리를 비추던 무한한 사랑, 문득 봄은 태양이 우리를 돌보는 다른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봄. 자리에서 일어서며 선생에게 봄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저 텃밭에 씨 뿌리는 거 보고, 만나자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면 되지. 뭘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무위당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하는 말이었다. 아내가 손뜨개로 짠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털모자를 쓰고 다시 병원으로 가려는 선생과 함께 집을 나섰다. 등 뒤로 우리를 돌보던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그의 집 너른 마당으로 이내가 몰려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가 충주에 있는 처가에 선을 보러 가서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원주에서 는 충주까지 가려면 강에 다리가 없어 버스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는 혼인이 성사될지 걱정하며 신랑감에게 의사를 묻는 장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찌 사람을 고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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