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12년 봄 살림,살림

[ 제철살림 ]

사람마다 몸에 맞는 밥이 따로 있다

장영란


새해 초 우리 집에 작은 공동체가 하나 생겼다 사라졌는데 그 실체는 '감기공동체'. 남편이 감기를 옮아왔고, 그 덕에 작은애가, 그리고 남편이 나을 만하니 나까지 옮았다. 마침 집에 큰애가 없을 때라 우리 셋이 서로서로 돌봐주면서 맘껏 아플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감기를 앓아 보니 그새 감기가 참 진화했더라. 열이 위로 치솟고 그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삭신은 쑤시고. 누워 자려고 해도 온몸이 결리는 고통, 다들 잘 아시리라. 그럴 때는 만화가 최고. 허영만의 《식객》을 읽기 시작했다. 글자도 크고, 한 대목이 길지 않으니 몸 아플 때 읽기 참 좋았다. 그 많고 많은 내용 가운데 가장 맘에 와 닿은 것은'밥상의 주인은 밥이다'였다.

누구나 밥에 관해 진한 추억이 있으리라. 처음 논농사를 짓던 해가 떠오른다. 산기슭을 따라 기찻길처럼 길쭉하게 다랑다랑한 논 네 다랑이. 모두 합해 오백 평이 될랑 말랑한 논이지만 남편은 거기서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새벽부터 논에 문안인사를 드리러 간 거다. 아침 먹고 다시 갔다가, 점심 먹고 밭일을 마치고는, 해 지기 전에 다시 저녁 문안 인사를 다녀왔다. 논에 오리를 넣고 나서부터는 아예 거기서 산다. 그래서 나는 논에 뭔 일이 많은 줄 알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일이 많았다기보다 마을 어른들이 농약, 비료 안 한다고 온갖 걱정을 해 주시니 남편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거둔 나락. 뭐든 처음이라 방아 찧는 것도 첫 행사 치르듯 법석을 떨어야 했다. 그 햅쌀로 첫밥을 지었던 저녁. 우리 손으로 처음 농사지은 밥을 먹는데 밥에서 향기가 나더라. 그때야 알았다. 햅쌀, 그것도 햇살과 바람에 자연 건조한 햅쌀은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고소한 밥내에 싱그러운 향기가 섞여 있다. 밥알도 윤기가 자르르 돌고.

그 뒤 해마다 논농사가 손에 익어가면서 논에서 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논에서 들이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햅쌀에 대한 감동도 줄었다. 그만큼 밥에 대한 애정도 데면데면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으로 쌀 씻어 밥을 안치곤 한다. 밥에 대한 애정이 줄어든 자리에 반찬 고민이 자리 잡았다. 오늘은 무슨 밥을 지을까가 아니라 무슨 반찬을 해 먹을까로.

오늘은 해가 안 나고 흐리니 가장 햇살을 많이 담은 곡식인 수수와 옥수수를 섞어 밥을 지어먹고 내일은 구수한 팥밥을 지어먹게 팥을 삶아둬야지. 이렇게 밥에 집중을 하면 밥은 여기에 삶을 뿌리내리게 해준다. 농사도 더 열심히 지어야 하고 농사지은 걸 알뜰히 먹는 길을 찾는다. 대신 반찬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가면 시장을 봐야 할 듯하다. 이것도 사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듯하고… 봄을 맞아 심기일전, 지금 여기 삶에 더 충실하자는 뜻에서 밥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단순하면서도 온갖 걸 품에 안는 요리

우리말에 '짓는다'는 말이 있다. 이 '지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걸 마련할 때 쓴다. 옷 짓고, 밥 짓고, 집 짓고. 농사지어 보니 밥을 짓는 일에는 집을 한 채 짓는 만큼 온갖 손길과 여러 사람들의 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부엌에서 밥을 짓는 일은 단순하다. 쌀 씻어 물 잡은 뒤 전기밥솥에 넣고 단추를 누르면 끝! 아무리 간단한 빵도 만들려면, 밀을 가루 내고 물만이 아니라 소금이나 효모를 넣고 숙성을 하고 구워야 하지만 밥은 쌀에 물만 넣고 끓이면 된다.

이리 간단한데 '밥하기 귀찮다', '밥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이 왜 들까? 밥이 주인공 자리에서 점점 뒤쳐지기 때문이 아닐까? 갓 지은 밥. 그래서 고소한 내가 나는 따스한 밥. 이 밥을 한 입 먹으면 밥만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먹는 밥은 전기밥솥에서 보온 상태로 대기 중이었던 밥. 주인 자리에서 밀려난 초라한 존재다.

생태유아공동체에서 여는 영양교사 연수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몸에 좋다는 혼합곡을 준비해 놓고 밥 지을 때 열심히 섞는데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신다. 그곳의 아이들 급식식단은 밥보다는 반찬 중심으로 짜여있다. 밥은 늘 같은 잡곡밥이니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오늘 점심에 뭐가 나올까' 관심이 많다. 먹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아이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나라면 '오늘 반찬이 뭘까' 만이 아니라 '오늘 무슨 밥이 나올까' 기대할 텐데…

밥 하나를 지어도 철에 맞는 밥, 체질에 맞는 밥, 날씨와 어울리는 밥이 있다. 잘 아는 대로 보리밥이나 밀밥은 찬 기운이 많은 데다 하지 무렵에 거두니 여름이 제철이다. 찹쌀, 찰기장, 차조처럼 찰기 있는 곡식은 따뜻한 성질이 있어 몸이 찬 사람이나 추운 겨울에 좋다. 팥은 내리는 작용이 있어 가끔 먹으면 약이지만 날마다 먹으면 안 좋다. 몸이 더운 사람한테는 검은 서리태가 맞지만 몸이 찬 사람한테는 그렇지 않다. 내 생각에는 아이 키를 크게 하려면 수수밥을 먹이는 게 좋을 듯하다. 사람이 기르는 곡식 가운데 가장 키가 큰 곡식이 수수니까. 여름에는 감자를 놔서 감자밥을 지으면 별미고, 가을에는 무를 채 썰어 무밥을 지으면 맛있다. 또 가으내 은행을 몇 알씩 넣어 밥을 지어먹으면 식구들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 겨울 별미는 잘 익은 김장김치를 넣고 만든 김치밥, 단맛이 든 고구마를 썰어 넣고 고구마밥…, 이런저런 밥이 있지만 물론 주인공은 언제든, 누구한테든 잘 맞는 멥쌀이다. 멥쌀만큼 온갖 것을 다 받아들여 품에 안는 요리 재료를 아시는가? 그것도 물만 넣어 짓는 단순한 요리 중에서 말이다.

밥에 대한 관심과 정성을 다시 모으기 위해 가끔 별미 밥을 지어본다. 호두를 까서 성기게 으깨 넣고 간장으로 밑간을 해 호두밥, 하얀 찹쌀에 잣을 까 넣고 잣밥. 바다에 놀러갔다가 톳을 따서 지어먹은 톳밥도 기억이 나고, 통영 사시는 분이 들려준 멸치밥도 궁금하다.



방아가 찧어져 쌀알이 주르르 나오는 그 순간

가을에 가장 큰일은 논에 벼 타작이다. 논에 벼를 거두고 나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 벼를 타작하면 마당에 검은 망사 망을 깔고 거기 나락을 얇게 널어놓고 말린다. 가을 햇살과 바람에 말리는 거다. 바닥에 깔린 나락 사이를 고무래로 중간 중간에 뒤적여 고루고루 말리면 햇살과 바람이 좋으면 삼일쯤 말린다. 황금빛 나락을 마당 가득 널어놓으면 든든하면서도 얼마나 가슴 졸여지는지 모른다. 나락을 펼쳐 놓았다가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면 불이 난 것처럼 온 식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당에 펼쳐놓은 나락을 모아 비를 안 맞게 하느라 야단법석을 떨곤 한다. 또 집에서 먼 논은 논 근처의 길에서 말리는데 비가 오면 어디 비그을 데도 없으니 노심초사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며 나락이 너무 마르지도 않게 그렇다고 축축하지도 않게 말린 뒤 광에서 재운다. 나락이 너무 마르면 쌀알이 부스러지는 게 많고, 덜 마르면 방아 찧을 때 껍질이 안 벗겨진 뉘가 많기 때문이다. 사오일전까지 논에 서 있던 벼를 거두어 포대에 담고 방아를 찧으러 가면 정미소가 북적거린다. 우리야 논이 작아 거기서 나오는 양도 적지만, 할아버지들은 경운기 가득, 이웃 아저씨는 트럭으로 가득 나락 포대를 싣고 정미소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정용 정미기라는 게 있기는 있다. 하지만 이 기계는 아주 영세한 공장에서 나와, 방아를 찧으면 아무래도 쌀알에 상처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가정용 정미기는 응급하게 조금씩 방아를 찧을 때 쓰고 가을에 햅쌀을 거두었을 때는 정미소로 간다. 가을걷이를 하면 지인들에게 쌀 주문을 받는데 보통 20kg 주문을 한다. 아주 밥을 많이 먹는 집은 40kg 주문하고. 그런데 주문 내용이 복잡하다. 작년에는 현미를 찾는 집이 늘어났다. 전에는 현미가 아무리 좋다고 설득해도 싫다는 집이 많아 중간 타협안으로 오분도미로 보내드렸는데 말이다. 이렇게 주문을 받다 보면 어르신께 드린다고 백미를 보내달라는 주문도 꼭 끼어 있다. 산골 우리 동네 정미소는 다 냇가에 있다. 이 작은 정미소들은 기계가 백미에 맞춰져 있다. 현미를 뽑으려면 기계에서 중간을 끊고 쌀을 받아야 한다. 현미는 나락의 겉껍질인 왕겨만 벗겨낸 뒤 받아낸 쌀인데 아무래도 겉껍질이 안 벗겨진 뉘가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괜찮다고 해도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은 자기 일에 자존심이 걸려있는지 뉘가 나오면 참지를 못하신다.

여러 번 깎아 백미로 만들어 버리면 아무 상관이 없을 일을 부러 만드니 우리를 보는 눈초리가 곱지 않다. 게다가 양이라도 몇 십 가마 확 찧으면 봐주련만 현미 두어 가마, 백미 한 가마에 오분도미도 따로 찧어 달라고 하려면 손님인 우리가 눈웃음을 팔아야 한다. 그나마 들판에 큰 정미소는 우리처럼 적은 양은 아예 찧어 주지도 않으니 동네 작은 정미소가 남아 있는 게 감사하다. 어찌어찌 방아가 찧어져 쌀알이 주르르 나오면 참으로 감격스럽다. 그걸 다시 무게를 재서 포대에 담은 뒤, 택배를 부른다. 햅쌀 밥맛을 알기에 하루라도 빨리 배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택배 송장을 적고 택배차 안에 쌀 포대를 실으면 한 해 농사도 막을 내린다.





 

잘 씹어 먹는 비법, '밥 따로 반찬 따로'

그럼 우리는 어떤 쌀을 먹을까? 아이들은 오분도미를 가장 좋아해 아이들이 밥을 하면 오분도미로 짓는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현미의 구수한 맛을 잊지 못해 현미밥을 짓는다. 또 백미도 나름 쓰일 데가 있다. 술을 빚는다든지, 콩나물밥과 같은 별미 밥을 해 먹는다든지 할 때. 현미는 통째로 먹기에 영양도 완전하지만 밥 짓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씹어 먹는 데 힘이 든다. 백미는 쌀의 중요한 쌀눈을 다 깎아낸 것으로, 달걀로 치면 노른자를 다 버린 셈이다. 그래서 그 중간 지점으로 쌀눈은 살아 있지만 씹어 먹기 적당한 오분도미가 있다.

현미냐 백미냐도 중요하지만 나는 얼마나 잘 씹어 먹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밥 한 숟갈을 먹을 때 몇 번을 씹어 먹을까? 현미는 쌀알이 살아있어 탱글탱글해 물도 잘 안 스미고 낱낱이 씹어주지 않으면 으깨지지 않는다. 그런데 밥 한 숟갈을 채 열 번도 씹지 않고 꿀꺽 삼키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현미밥을 먹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으깨지지도 않은 현미 쌀알이 우리 몸에 얼마나 흡수될까? 백미의 나쁜 점 역시 제대로 씹어 먹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백미는 너무 부드러워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만 해도 꿀꺽 넘어간다. 백미 밥을 먹는 사람을 가만 살펴보면 제대로 씹어 먹는 사람이 잘 없다.

밥을 잘 씹어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여기서는 밥을 제대로 씹어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걸 이야기하고 싶다. 누구는 팔십 번, 누구는 백이십 번을 씹으라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그렇게 오래도록 씹을 수가 없다. 그 전에 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니까.

한번이라도 더 씹으려도 터득한 비법이 '밥 따로, 반찬 따로'다. 밥하고 반찬을 함께 먹을 경우, 여러 번 씹으려고 해도 쉬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다. 국물이 있는 반찬이라면 더욱 빨리 넘어간다. 한데 밥을 먹을 때 밥맛을 음미하며 밥만 씹으면 밥을 여러 번 씹을 수가 있고, 낱낱이 씹기 좋다. 양쪽 어금니에 반씩 나눠 씹으면 이 건강도 좋아진단다. 반찬은 밥을 한 숟갈 다 씹어 삼킨 뒤 반찬만 먹는다. 밥 따로 반찬 따로. 이렇게 밥 먹는 습관을 바꾸니 이제는 가게에서 국밥을 사먹을 때도 밥 한 숟가락에 사십 번은 넘게 씹는다. 그런데 오랜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밥숟가락을 입에 넣기가 바쁘게 내 손은 벌써 반찬을 집을 때도 있다. 반찬을 집어 들고 밥이 다 씹어지기를 기다릴 때는 마치 도 닦는 기분이다. 제대로 씹어 먹으려면 밥맛을 즐겨야 하리라. 밥 따로, 반찬 따로 먹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비빔밥이나 국밥, 덮밥, 볶음밥을 잘 안 해 먹게 된다. 이런 밥은 아무래도 밥 따로가 안 되고 밥맛보다는 반찬 맛이니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자급하는 곡식이 쌀이다. 식량 자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쌀이 우리 구명줄이고, 환경 차원에서 보면 환경지킴이다. 그 쌀로 만드는 가장 단순한 요리, 밥. 이 밥이 주인 자리를 되찾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빈다.
 

장영란 님은 무주에서 자급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떠가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여러 사람과 나누거고,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씁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자연달력 제철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 먹어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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