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2011년 겨울 살림,살림

[ 말글살림⑤ ]

입성 하나는 흔한 세상이지만

박남일

빈 들녘을 훑어 불어온 바람 끝이 예사롭지 않다. 두툼한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 할 때다. 장롱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 옷상자를 연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손이 가는 옷이 없다. 집집 장롱마다 넘쳐날 만큼 '입성'하나는 흔한 세상이라지만, 정작 때가 되면 마땅히 눈에 드는 옷이 없어 고민이다.

'입성'은 옷을 속되게 이르는 우리말이다. 옷을 부르는 말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임금의 옷은 특별히 '곤룡포'라 하고 격식을 갖춘 양반의 옷은 점잖게 '의관'이라 했다. 하찮은 백성의 옷은 '입성'이라 했다. 이 말에는 '아무렇게나 몸에 입힌 천 조각'이라는 멸시의 뜻이 스며있다. 마치 머슴의 밥을 '입시'라 부르던 것처럼.

신분에 따라 입성이 갈리던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거꾸로 입성에 따라 신분이 갈린다. '얼마짜리냐'가 문제다. 게다가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어디에서 파는 옷인지도 관심사다. 간단히 말하면 '명품'과 '짝퉁', 그리고 '땡 처리'로 분류되어, 그것을 걸치는 사람의 지위를 포장하게 되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또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옛 사람이 좋다'는 속담도 있다. 제 입성이 문득 초라하게 느껴지면 얄팍한 지갑을 털어 새 옷을 마련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철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신상품 광고에 홀려 아무렇게나 욕망을 내지르다가는 큰코다친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핀잔을 줘도 된다.

"인왕산 호랑이는 옷 안 입어도 산다더라!"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
이즈막엔 여간해서는 제 몸에 딱 맞는 '맞춤옷'을 지어 입을 일이 별로 없다. 대신 공장에서 만든 기성복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처럼 미리 여러 벌을 지어 장에 내다 파는 옷을 '장내기옷'이라 한다. 또 맞춤옷이든 장내기옷이든, 새로 지어서 한 번도 빨지 않은 새 옷은 우리말로 '진솔'이다. '-솔'은 옷감이나 천을 두루 뜻하는 말이다. 옷감의 바느질 자리를 '솔기'라 하고, 활터에 세운 무명 천 과녁을 우리말로 '솔'이라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옛 농경사회에서 가난한 백성들은 줄곧 후줄근한 입성으로 지냈다. 다만 일생에 딱 하루뿐인 혼례날에는 평범한 백성도 고관대작 부럽지 않게 사모관대(紗帽冠帶)와 원삼(圓衫)족두리를 차려 입었다. 그 때문에 '옷은 시집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시집올 때 신부의 입성은 어땠을까. '우리말의 보고'라 불리는, 최명희의 장편소설 《혼불》에 그 생생한 그림이 있다. 소설가는 여주인공 '효원'의 치마 속 가장 은밀한 곳부터 야릇한 속옷 이름들을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고쟁이', '너른바지', '대슘치마', '무지기' 등 그 종류가 속옷만 무려 일곱 가지다. 느낌이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팬티'라는 물건의 우리말이 '속곳'임을 알 수 있다. 또 이름도 특이한 '대슘치마'와 '무지기'라는 속치마 때문에 다홍치마가 풍성하게 차오른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그토록 겹겹이 입은 모양을 소설가는 "그야말로 덩실한 그 차림 하나만으로 온 방안이 풍성하게 차오르면서... 서도 앉은 것 같고, 앉아도 선 것" 같다고 그렸다. 이쯤 되면 전통 여성 한복은 '하의 과잉 패션'이라 할 수 있다. 이즈막에 유행한 '하의 실종 패션'과는 극과 극인 셈이다.

그런데 풍성한 아래옷에 견주어 웃옷은 의외로 허술하다. 아무리 화사한 신부라 해도 연분홍 '속저고리'와 나비처럼 가벼운 '회장저고리'가 전부였다. 그 위에 걸친 '활옷'이니 '대대'는 장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겉에 두르는 치마의 가짓수도 끝이 없다. 그중 가장 화려한 치마는 길고 폭이 넓은 치맛단에 금박을 박은 '스란치마'다. 가장 서글프고 초라한 치마는 '몽당치마'다. 몹시 해지고 닳아져서 아주 짧아진 치마를 말한다. 머리에 쓰는 '쓰개치마'도 있다. 주름이 있으면 '주름치마', 주름이 없으면 '통치마'라 한다. 이밖에 무릎이 드러날 만큼 짧은 치마는 '도랑치마'다. 옛적에 여성용 작업복쯤 되겠다.

한민족이 백의민족인 이유
혼례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수천 년 간 한민족의 평상복은 흰 저고리와 치마가 기본이었다. 다만 더울 때는 홑겹으로 된 '홑저고리'를 추울 때는 겹으로 된 '겹저고리'를 입었다. 홑저고리를 흔히 '적삼'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겨울에 적삼'이라는 표현은 가난과 고난의 상징이었다.

남성들은 저고리에 '핫바지'나 '홑바지'를 입었다. 안쪽에 솜을 대어 지은 핫바지는 주로 겨울용이고, 홑겹으로 지은 '홑바지'는 여름용이다. 홑바지를 '고의' 또는 '잠방이'라고 한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가난한 가시버시가 도랑치마와 잠방이 차림으로 논일 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이처럼 평소 흰옷을 즐겨 입은 까닭에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역대 지배세력은 백성에게 흰옷을 장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흰옷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나라에서 흰옷 금지령을 내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오행설' 때문이었다. 조선은 오행 중 '목(木)'에 해당하므로, 이를 상징하는 청색 옷을 입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통치자들의 의도는 관철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흰옷을 벗고 싶어도 갈아입을 색깔 옷이 없었다. 그래서 번번이 금지령에 콧방귀를 뀌며 흰옷을 고집했다. 이처럼 백성이 흰옷을 고집해온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흔히 염료와 염색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민족의 염색기술이 뒤떨어졌다는 구체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민족성이 순수해서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도 한다. 그 기준으로 치면 색깔 있는 옷을 입은 민족은 순수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흰옷을 즐겨 입은 이유로는 여전히 미흡하다.

거기에는 뭔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잿물' 때문이었다. 볏짚이나 콩깍지 등을 태워 나온 재를 물에 담가 추출한 잿물은 천연 알칼리성 물질이어서 빨래 삶을 때 표백효과가 탁월하다. 게다가 섬유를 유연하게 해준다. 흙탕물에 범벅이 된 옷도 잿물에 삶아내면 하얀 진솔옷으로 거듭났다. 그처럼 잿물은 '꿈의 세제'였고, 덕분에 한민족의 입성은 늘 하얗게 빛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우리 조상은 굳이 '색깔 있는' 민족이 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
이즈막엔 이름도 모호한 온갖 옷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입성을 둘로 나누면 '든벌'과 '난벌'이다. 든벌은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이다. 난벌은 나들이 할 때 격식을 차려 입는 옷이다. '나들잇벌'이라고도 한다. 든벌과 난벌을 겸할 수 있는 편리한 옷도 있다. 이를 '든난벌' 또는 '난든벌'이라 한다. 요새 말로 '캐주얼'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재미있는 옷도 많다. 어린 아기들이 입는 옷 가운데 '롬퍼스(rompers)'라는 것이 있다. 위와 아래가 통짜로 달려 있어서 그것을 입은 아기는 한 마리 매미 같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롬퍼스를 '매미옷'이라 부른다. 모양도 재미있고 이름도 귀엽다. 원피스(one-piece)를 '달린옷'이라 부르는 마음씨 그대로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개구멍바지'도 있다. 오줌똥을 누기 편하게 밑을 터서 만든 사내아이들 바지를 말한다. 개구멍바지는 통풍이 잘 되어 건강에도 좋다. 여러 모로 실용적인 입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양새 자체가 해학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런 개구멍바지마저도 형제들끼리 물려 입었다. 이를 '옷물림'이라 한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형제 많은 집에서 옷물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막내둥이들은 진솔옷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적잖은 불만이 쌓이고 쌓였을 터다.

지금은 입성 하나는 흔한 세상이어서 옷물림도 낡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주택가의 재활용 수거함에도 멀쩡한 입성이 차고 넘친다. 백화점이든 거리의 옷가게든, 평생을 입어도 다 못 입을 예쁜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입성은 땀에 흠뻑 젖어 소금꽃이 하얗게 핀 작업복 아닐까,

박남일 님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등 우리말 관련 책을 썼습니다. 지금은 해남에서 우리말글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하면서 지역 생태환경을 지키는 활동도 거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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