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2011년 겨울 살림,살림

[ 시골 살림 길잡이 ]

자연에서 스스로 자라게 하라

전희식

몇 달 전 필리핀에 갔다가 귀국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무척 피곤한 상태로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자마다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저가 항공을 타고 보니 좌석이 비좁았지만 등을 붙이고 눈을 감자 바로 잠이 든 것인데 불행히도 나는 오래 자지 못하고 깨어났다. 바로 뒤에 앉은 승객이 두 발로 내 등받이를 얼마나 걷어차고 뻗대는지 칭얼거림으로 봐서는 애 같은데 발힘은 장사라서 일어서서 확인해 보니 송아지만한 열네 살 소녀였다. 그 옆에 앉은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애를 달래느라 먹을 것도 쥐어주고 달콤한 말로 뭔가 협상을 시도 하지만 소녀는 막무가내로 집어던지고 발버둥을 쳤다. 영어해외연수를 다녀오는 건지 단순한 주말여행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모습은 자연히 내가 목격했던 필리핀 현지의 어린이들과 비교가 되었다.

야생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
마닐라 교외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아홉 살짜리 소년은 부모가 운영하는 코딱지 만 한 식당에서 새까만 손으로 역시 새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손님 사이를 다람쥐처럼 누비며 음식 시중을 들고 있었다. 북부도시 '바기오'의 시내에서는 열두세 살 남짓 되는 소년 소녀들이 택시를 타려는 손님들에게 접근하여 몇 명인지 확인하고는 차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면서 택시를 잡아주고는 팁을 요구했다. 조류 따라 떠내려와 쌓인 해변가 쓰레기 더미에서 재활용품을 주워 모으는 애들도 있었다.

당시 이들을 볼 때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 보따리는 집어 던져놓고 다음날 학교 갈 때까지 만져 볼 틈도 없이 꼴을 베거나 소를 먹이고, 나무하러 다니던 어릴 적 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개울을 건너고 산등성이를 타면서 집안 살림의 한 귀퉁이를 옹골지게 도맡아서 살던 활기 넘치던 초등시절. 중학생이 되면서는 소로 쟁기질도 하던 그때. 집에 모내기라도 하는 날이면 햇감자를 삶아 지게에 지고 새참 내가는 것을 자기 일로 당연시 했었다.

지금은 재벌 2세가 아니더라도 부모 자가용으로 등하교 하는 아이들. 갑부 자식이 아니라도 늘 밥상에 고깃국이 오르고 군것질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명절 아니고도 언제든지 운동화나 새 옷을 사 입고 새 양말을 신는다. 요즘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조선시대로 따지자면 왕세자도 이만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자연과 멀어져 버렸다. 야생성이 사라졌다. 자급능력을 잃었다.

흙을 만지며 자연을 가까이 하는 삶이 중요한 것은 무엇과도 교감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는 데 있다. 흐릿한 호롱불 켜 놓고 아랫목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이불을 잘못 펄럭이면 호롱불이 춤을 추다가 꺼져버린다. 그 순간 온 천지를 감싸고 있는 짙은 어둠의 세계와 만난다. 완전한 밤의 장엄함을 보게 된다. 대자연의 숨결을 듣는다. 가느다란 호롱불을 끌어당기다가 머리카락을 그슬려 먹을 때도 있다. 빛의 소중함과 어둠의 위대함을 동시에 체험하는 순간이다. 궁색했지만 거침이 없었다. 부모가 해 주지 못하는 것들을 자연이 거의 다 해결해 주었다. 먹을거리도 철따라 온갖 것이 주변에 늘려 있었다. 놀 거리도 흙과 돌과 나무와 병뚜껑이면 되었다. 나무 한 토막과 납작한 돌멩이 몇 개를 가지면 여럿이서 몇 시간이고 잘 놀았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지금보다 훨씬 풍부했고 그것이 비현실적이라서 더 신비하기까지 했다.

부모 스스로 모범이 되고 자연 속에 방목하기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자라게 하는 것은 부모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옛날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서 그랬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을 포기하고 자연으로 아이를 안내 해야 하니 힘들 수도 있다. 집안일을 거들게 하고, 자기 밥값 하는 것을 학교 숙제하는 것보다 먼저 하게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부모 자식 간에는 괴담 수준의 고언들이 많다. '자식은 전생의 빚쟁이'라느니, '전생의 부모가 이번 생에 자식으로 태어났다'느니 하는 말 등은 그만큼 자식으로 인해 부모가 속을 끓인다는 뜻일 것이다. 부모 속 끓이는 대부분은 사실 부모가 자청한 경우가 많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도 그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곁에 두고는 자식 고생하는 꼴 못 보고,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자식위해 쓰지 않고 못 배기는 게 부모 심정이니 일찌감치 멀리 떼어 놓으라는 뜻 아닐까 싶다.

자식을 방목하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방치와 방목은 다르다. 풀이 있고 마실 물이 있는 웅덩이나 냇가를 찾아 소떼를 안내하는 것이 방목이다. 억지로 물을 먹이지 않는다. 목마르면 마실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기다려주고 믿어 주는 것이 자식 키우기의 전부가 아닐까 한다.

자식에게 쏟는 관심과 돈 때문에 부모 자신의 삶이 거기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모범이랄 수 없다. 자식이 책을 가까이하고 예술을 알며 사색을 즐기게 하고 싶으면 부모가 그렇게 살면 된다. 자기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기를 바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되 스스로 그 조건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다. 욕망과 능력의 균형을 배우는 것만큼 큰 공부가 없다. 아이들은 흉내 내면서 배운다. 잔소리 듣고 자기를 교화하지는 않는다는 게 만고의 진리다. 사실 많이 베풀면 많이 간섭하게 된다. 부모의 베풂이 자식 삶의 간섭 수준이 되면 서로 불행하다. 18살만 되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나라의 모든 교육과 학제가 재편성되어야 옳다고 본다.

대학 가기보다 자생 능력 키우기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필자가 귀농해서 산 17년 동안 가장 잘했다고 여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늙으신 우리 어머니를 시골로 모시고 와서 살 수 있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둘 다 대학에 안 보낸 것이다. 물론 쉬운 자리에서 가볍게 하는 말이다. 대학은 안 보냈다기보다 자기들이 안 간 것이다. 맹세코 대학가지 말라고 강요 한 적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학은 꼭 가야한다고 압박을 하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대학 안 간 덕분에 정말 널널하게 산다. 일 년에 천만 원씩 두 녀석 등록금 마련하려면 등골이 휘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평생 대학을 안 가겠다고 결의한 것은 아니다. 그냥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나가는 공산품처럼 중학교 나오면 고등학교 가고, 고등학교 나오면 아무 개념도 없이 대학에 가는 대열에서 빠져나왔을 뿐이다. 정말 대학 공부가 필요할 때는 그때 가면 될 것이다. 지금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그 속에서 사람관계와 물상의 이치를 익히고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을 하나씩 쌓아가는 중이다.

옛날에는 삶의 현장이 커다란 학교였다. 수학 공식이나 꼬부랑 외국말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가장 먼저 배웠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을 해결 하는 것이 가장 큰 공부였다.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장만하고 철 따라 거기에 맞는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 중요한 공부다. 그래서 열서너 살만 되면 스스로 밥벌이를 했다. 5년제 소학교만 나와도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요즘 이게 뭔가. 대학을 나와도 밥 할 줄도 모르고 김치 담글 줄도 모른다. 모든 것이 교육자본의 음모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교육자본은 인간의 기초교육 기간을 획기적으로 늘이는 데 성공했다. 대학 나와서도 취직도 안 되고 어중간하니까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밥벌이 못하는 박사가 지천이다. 교육자본은 정권과 결탁하여 자격증과 졸업장을 무수히 만들어 내서 그것에 매달리는 풍토도 만들었다. 불황일수록 이 자격증, 저 학위를 따 놔야 할 것처럼 부추겼고 사이버 대학을 만들어 정원도 없이 수많은 학생을 모집하여 쓸데도 없는 공부를 하게 한다.

마천루를 쌓고 밤을 낮처럼 밝혀 흥청망청 하는 지금의 문명은 6천5백 년 전 공룡처럼 한 순간에 쓰러질 수 있다. 퓰리처 상 수상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말한다. 지구상에서 위대했던 과거 문명의 붕괴는 자연의 경고를 외면한 데 있다고. 현대 문명에 대한 자연의 경고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문명 이후에는 어떤 삶이 등장할까? 모든 방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는 지역 규모의 자급농경체제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재화는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자생 교육이다. 굳이 현대문명 이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생 능력을 갖추는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 준다. 다른 생명체를 살육하지 않고 이웃을 약탈하지 않는 삶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보내거나 집에서 같이 살기
두 아이가 중 고등학교를 다 대안학교를 다닌 것이 대학에 목매지 않게 된 과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들이 다닌 학교 네 곳이 모두 구석진 시골에 있는 학교였다. 시골에서 자라고 시골에 있는 학교로 가서 학력 인정도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놀고, 공부하고, 일했다. 어느 학교건 농사는 기본이었다. 자연과 가장 밀접하게 교감하는 것이 농사다. 대안학교는 그래서 농사를 정규 과목으로 정한다. 영어와 수학은 없어도 국어와 철학과 농사는 있다. 학생 수는 적지만 만나는 세상은 넓고도 크다. 그 속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에 대해 책임지는 힘을 기른다.

귀농해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유기농산물이 비싸서 서민들이 사 먹기에 부담스럽다는 일부의 시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유기농업은 공공의 성격이 강하다고. 자연을 약탈하지 않고 공익을 해치지 않는다고. 그런데 대안학교에 대해서는 망설이는 경우가 있는 걸 봤다. 비싸다고. 귀족학교 아니냐고.

열네 살된 큰 아이를 지리산 어느 절에서 막 개교한 대안 중학교로 떠나보낼 때는 시·군 단위 모든 중학교에 의무교육이 실시되는 해였다. 등록금은 물론 책이랑 학용품까지 공짜였지만 우리 아이가 가는 학교는 입학기여금이 자그마치 백만 원이었고 매월 등록금과 생활비는 60만원이었다. 나라에서 한 푼도 지원되지 않으니 학생들이 이렇게 내도 선생님의 월급은 6-70만원 수준이었다. 학부모는 한 달에 두어 번 학교에 가서 주말 당번도 서야 했고 각종 회의에 참석해서 학교 운영도 맡아야 했다. 금전적 부담도 부담이려니와 시간과 공간의 과도함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입학식에 가서 아이를 떼어 놓고 돌아오면서 지리산 정령치에서 다짐 했던 게 있다. '세계의 공민' 하나를 후원하는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내 피붙이가 아니라 세계의 공민 하나를 양성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우연히 내가 낳은 아이일 뿐이라고 말이다. 좀 생뚱맞은 발상이지만 이것이 거액을 들여 대안교육을 받게 하는 내 선택에 대한 합리화였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아이의 교육과정이 부모의 자기 쇄신을 촉발했다. 모든 학부모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 말들이다. 아이는 공부하고 부모는 돈 대는 그런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고 학교의 각종 모임과 수련프로그램, 식구총회와 학부모 회의는 부모들의 의식 성장에 크게 작용했다.

귀농하여 생태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이 농사일을 거의 안 한다. 자가용으로 학교까지 태워다 준다. 공부하느라고 집안일 도울 겨를이 없다. 도시 아이들과 꼭 같이 학교와 컴퓨터와 휴대폰 사이에 끼어 산다. 시골에 살지만 농사의 농자도 모르고 사는 게 시골 아이들의 현실이다.

반면에 대안학교마저 안 가고 그냥 집에서 부모 일 거들고 살면서 그런 아이들끼리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 공부하는 경우도 많다. 이른바 홈스쿨러들이다. 외국 홈스쿨러들과의 내왕도 빈번하다. 옛날에 비해 열린 교육의 장도 많아졌고 정보 나눔의 통로도 넓어져서 홈스쿨 하기 좋은 조건이다. 부모의 삶을 익히고 지혜를 이어받는 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이런 학부모들과 귀농을 준비하며 자녀교육을 고민하는 분들이 다음 달인 12월 3-4일 양일간 대전 대철회관에서 '귀농 자식농사 한마당'을 연다. 필자가 일하는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주관한다.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면 도시보다 모든 것이 수월해진다. 자연 속에 풀어 놓으면 자연이 알아서 보호 해 주고 키워 준다는 게 필자의 경험이고 신념이다. 아주 오래 전 우리 집에서 '보따리학교'를 할 때 멀리 울산에서 7살짜리 꼬마가 혼자서 기차와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전라북도 구석진 곳의 우리 시골집까지 찾아 왔다. 보따리학교는 절대 부모가 데려다 주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 아이는 오는 동안 여러 어른들로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았고 용돈까지 얻었다. 용돈 몇 만 원이 어린아이에게 큰 복일 것이나 그보다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큰 믿음과 사랑을 확인 한 것은 그에 비할 바가 안 된다.

그 아이가 엊그제 대만으로 출국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15살 소녀가 되었다. 워크나인(walk9)이라는 동아시아 생명평화를 위한 순례단이 되어 떠난 것이다. 이 단체는 원래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취지로 2007년 일본 전국을 순례하고 2009년에는 한국의 전국토를 100일간 순례했는데 이번에는 대만으로 순례길을 잡은 것이다. 자연 속에 아이를 풀어 놓는 것을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가? 그것을 살펴보면 별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것들이 발견될 것이다.

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인 전희식 님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지켜드리자는 생각에 전라북도 장수의 산골에 내려가 함께 살며 그 일상을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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