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2011년 겨울 [특집] 명태, 밥상 위의 바다 / 핵 없는 사회를 위해

[ 명태와 사람들 ]

시린 바다로 다시 돌아올 명태를 기다리는 이들

김홍성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의 대포농공단지 안에 있는 영풍수산 사무실 벽에는 큼직한 통북어가 걸려 있다. 주둥이 끝부터 꼬리 끝까지 길이가 펼쳐 놓은 일간지의 가로 길이에 맞먹는다. 하도 커서 기념으로 걸어 두었다는 이 명태는 북양(北洋) 베링 해에서 잡혀 부산 감천항으로 들어온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원양어선으로 잡아온 명태를 '원양태'라 하고 동해 어민들이 근해에서 잡는 명태를 '바닥태'라고 했는데, 바닥태와 원양태가 같이 나오던 80년대에는 원양태를 알아주지 않았다. 원양태는 맛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머나먼 북쪽 바다
명태는 본래 회유성 어종이기 때문에 북양의 오호츠크나 베링 명태가 동해에 와서 잡히면 바닥태가 되건만 바닥태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착은 바탁태가 이미 고갈된 지금도 끈끈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바닥태, 즉 동해 명태가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역사가 그만큼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고 해마다 적어도 20~30톤씩은 잡혀서 명맥을 유지하던 동해 명태는 10여 년 전부터, 어쩌다 한 번씩 우연히 잡히는 정도여서 시중에서는 볼 수가 없다. 지난겨울까지 시장에 나오던 생태는 대체로 일본 홋카이도 근해에서 선어(鮮魚)로 수입되던 것인데, 지난봄 일본 원전사고 이후 그쳤다. 대신 러시아 생태가 부산 감천항으로 들어오고 있다. 따라서 2011년 11월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명태는 대부분 오호츠크해나 베링해에서 오는 것이다.

영풍수산은 1985년 창업 때부터 원양태를 사다가 코다리나 황태 또는 필레트(생선 척추 양면의 살을 한 면 씩 통째로 저민 포)로 가공하는 데 주력했다. 냉동 상태로 온 명태를 깨끗한 민물 속에서 자연 상태로 해동시킨 후 할복하여 내장을 분리한 다음 민물로 씻어서 반 쯤 말린 것이 코다리, 완전히 말린 것이 황태다.

오호츠크 해의 명태는 황태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쓴다. 산란기인 겨울철에 조업하기 때문에 알이 많이 들어 있으며 육질이 단단하다. 할복하여 내장을 분리한 후 다시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는 한겨울에 용대리 황태마을 덕장에서 말린다. 6월에서 10월에 조업하는 서베링해의 명태는 몸길이는 짧은 편이지만 살이 통통하고 희어서 북어채 등 가공용으로 쓰거나 찌개용 동태로 시장에 나간다.



영풍수산 사무실 한쪽 벽에는 수십 장의 옛날 흑백 사진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1960년 전후의 속초 포구 풍경과 어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다. 그중에는 바닷가에 설치된 덕장에 명태를 빼곡히 달아 맨 사진도 있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겨울철이 매섭게 추워서 그냥 바닷가에 널어 말려도 됐기 때문이다. 장전(휴전선 이북의 고성 땅) 출신 사진가 최구현 씨(90세)가 주로 찍었다는 그 사진들은 전설이 된 동해 명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돛을 단 목선들의 출항. 뱃나루에 서서 배웅하는 어민들. 주낙에 걸려 배로 올라오는 명태들. 포구에 쌓인 명태더미들. 명태더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명태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는 여인들. 초가집 '뜨럭'에 앉아 넓적한 상자에 사려 담은 주낙의 낚시코마다 미끼를 끼는 여인들……. 사진 속 1950년 대 여인들은 한복 차림이며 등에 아이를 업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어민의 자손인 영풍수산 대표 최상봉 씨(57세)는 사진의 풍경과 인물에서 깊은 감회를 느낀다.

"명태 잡을 때 소금에 절인 양미리나 꽁치 살을 칼로 잘게 썰어서 미끼로 썼어요. 우리 어머니도 저렇게 '뜨럭'에 앉아서 미끼를 끼셨습니다. 아버지가 배에서 내린 명태를 할복하고 씻어서 덕장에 널기도 했지요. 그 추운 겨울에 얼마나 손이 시렸겠어요. 저 사진의 산자락 끝이 우리 동네였습니다. 지금은 속초시 장사항이지만 그때는 고성군 토성면 사진리였어요. 토속 지명은 모래기였구요. 마을 사람 모두 바다만 들여다보고 살았던 시절이죠. 저런 사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그래도 깊은 정이 있었다. 또한 바다가 건강했다. 수많은 어종과 해조류가 풍부하게 공생하고 있었다. 명태도 떼 지어 몰려와 알을 낳았다. 알은 노가리가 되어 놀다가 대가리가 커지면 찬 해류를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산란기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오지 않는다. 학자들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명태는 한류를 따라 회유하는 어종이라서 수온에 민감하다. 수온이 0.2°C만 높아져도 찬물을 찾아 방향을 튼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동해에서 마주치는 차고 더운 두 해류에 교란을 일으켜서 산란하러 오는 명태를 쫓아 버린다. 명태가 알을 낳는 집이 되고 치어들의 요람이 되고 서식지가 되는 바다 밑 해조류의 푸른 숲이 허연 사막이 되는 백화현상도 명태가 오지 않는 원인이 된다. 오염된 강물이 유입되고, 버려진 폐기물이나 유독성 산업 쓰레기들이 쌓이고 부유하는 환경도 역시 명태를 쫓아버린다. 머나먼 북쪽 바다, 즉 북양이 아직 청정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명태 눈깔을 됫박으로 사다 식해를 담그던 함흥 사람들
명태의 주산지는 본래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와 함주군 퇴조(1982년부터 '락원'으로 바뀌었다) 일대였으며 어로 작업의 규모나 명태 가공 기술이 고성 쪽보다 앞섰다. 신포, 퇴조 등 북의 기술은 전쟁 중에 월남하여 고성 일대에 정착한 이북 피난민들에 의해 퍼졌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된 속초시 청호동의 '아바이 마을'은 피난민들의 집단 거주지, 즉 난민촌이었다. 작고 허름한 집들이었다. 7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로 큰 전축을 놓고 사는 집들이 많았다. 시계를 사러 시계방에 가서도 제일 비싼 것부터 찾았다는 얘기도 돌았다. 내 외가 쪽 지인 한 분도 '아바이 마을'에 정착하여 몇 년 전 임종 때까지 거기 사셨다. 그분의 고향은 함주군 퇴조. 명태로 이름난 고장이어서 처녀 때부터 명태 내장을 빼고 아가미를 뜯는 할복을 해 주고 삯으로 받는 알과 창자로 젓을 담아 팔았다. 한때 강릉에 정착했던 외가에 가면 맛볼 수 있었던 명란젓, 창난젓은 거의 그분의 솜씨였다.

외가의 큰집은 신포와 태조에서 명태 덕장을 꾸렸으며, 함흥 시내에서 건어물 도매상을 운영했다. 어머니와 이모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의 함흥에는 황태라는 말이 없었다. 그냥 마른 명태라고 했으며 코다리니 동태니 하고 따로 구분하지도 않았다. 겨울이면 수수 울타리 세우는 기둥에 큰못을 박고 명태를 두름(스무 마리씩 싸릿가지로 코를 꿴 단위)으로 걸어 두고 먹었다. 시장에서는 명태를 바리로 쌓아 놓고 팔았는데, 한 바리는 100두름, 즉 2천 마리였다. 가정에서 명태를 사러 시장에 갈 때는 함지를 이고 가서 두름으로 샀다. 요즘처럼 한두 마리씩 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시장에서는 마른 명태의 눈깔만 빼서 자루에 담아 팔기도 했다. 함흥 사람들은 명태 눈깔을 됫박으로 사다가 식해를 담았다. 요즘 많이 알려진 가자미식해와는 또 다른 맛이 났다.

이모는 삼팔선이 생긴 이후에도 한동안은 민간 사이에 남북 교역을 했다는 얘기도 했다. 밀무역이었는지는 몰라도 외가의 덕장에서 말린 명태가 배로 묵호항에 갔으며, 올 때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의류 등 군수품을 싣고 왔다. 군수품 중에는 버터나 살충제(DDT) 또는 모기향이나 초콜릿 등도 있었다.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학생들의 도시락 반찬이 명란젓 말린 것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도 여학교 시절의 어느 여름철에 하학 길에 과수원 둔덕에 앉아 점심에 먹다 남은 말린 명란젓 반찬을 손에 쥐고 뜯어 먹었던 일을 기억했다. 어머니와 이모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함흥 인근 신포와 퇴조 바다에는 명태가 흔했음은 물론 가공 기술도 발달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고장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런 일을 하며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월남하여 고성 일대에 정착하면서 명태 산업의 일익을 맡았다.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에 사는 한국현 씨(86세)는 아야진항을 거점으로 정치망 어업을 한다. 정치망 어업이란 그물로 집을 지어 놓고 그 속에 들어온 어종을 산채로 잡는 어업이다. 11월 초인, 요즘에 기다리는 어종은 방어, 삼치, 오징어, 연어 등인데 해가 갈수록 흉어라면서 속초항에서만 명태잡이 배가 하루 450척씩 나가서 만선으로 들어오던 때가 엊그제 같다고 말한다. 한국현 씨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이 들어와서 새로운 기술로 어업을 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배를 사서 어업을 시작한 분이라고 했다. 당시 교암리 마을은 자급자족하는 소농이 대부분이었고 고기잡이는 일종의 부업이었다. 기껏해야 선질꾼들이 등짐으로 영을 넘나들었을 뿐 유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많이 잡아도 팔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고개는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에 있는 사이령(샛령)이었다. 미시령과 진부령이 뚫리기 전까지는 유통의 중심지였던 교암리에는 장이 아래장과 위장 두 군데서 섰다. 한국현 씨의 부친은 교암리에 새집을 지었다. 자수성가한 것이다. 90년 전에 지은 그 집이 현재 한국현 씨가 사는 집이다.

한국현 씨의 부친은 겨울철이면 함경남도 신포로 가서 길이가 40발 쯤 되는 두 척의 노 젓는 목선으로 '수저망'을 치고 명태를 잡았다. 명태는 찬 해류를 따르기 때문에 물밑에 그물을 쳤다. 그래서 수저망이다. 신포 앞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기 때문에 수저망 어로가 가능했다. 아야진 쪽은 수심이 깊어서 수저망으로 명태를 뜰 수 없으므로 연승을 사용했다. 연승이란 굵은 줄에 낚싯줄을 잇달아 매단 것이다. 옛날 명태 중에 코에 낚시 바늘이 꿰어져 있던 것들은 연승으로 잡힌 것들이다. 일제 때 강원도 배가 함경도로 가서 명태를 잡으려면 강원도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수저망 어선에 한해서만 가능했다. 동력선의 발동기가 고장이 나면 원산에 가서 고쳤다.

한국현 씨는 서울로 유학하여 성남중학교를 다녔다. 겨울방학에 집에 올 때는 서울에서 기차로 원산까지 가서 원산에서 양양으로 가는 동해 북부선을 타고 교암리 집으로 왔다. 원산에서 신포는 멀지 않았다. 그래서 교암리 집으로 가기 전에 신포에서 명태잡이를 하는 아버지에게 들렀다. 동해북부선이 아직 개설되기 전에 서울 선린상고를 다녔던 한국현 씨의 백 씨伯氏는 원산과 속초 사이를 왕래하는 화물선을 이용했다.

한 씨는 신포의 덕장이 해안에 있었다고 했다. 신포는 속초보다 더 추운 지방이어서 명태를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할복해서 덕장에 걸었다. 그곳 덕장은 한 두름에 스무 마리였다. 고성은 한 번에 네 마리 정도를 덕장에 걸었는데 처음엔 해안에 걸다가 휴전 후 함경도 피난민들이 들어오면서 대관령이나 미시령 너머에 덕장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풍어 시대의 전설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명태 수요가 많아지고 유통이 활발해지자 속초를 포함한 고성 어민들의 명태잡이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불어 어민들의 형편도 조금씩 풀렸다. 강원도농어촌연구소 이사장이며 태영수산 대표인 윤의구 씨(70세)는 1964년에 거진읍 어업협동조합에 입사하면서 동해와 인연을 맺었는데, 바로 그 무렵이 명태가 가장 많이 잡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밤에 배들이 들어와서 부둣가에 쌓아 놓는 명태가 산봉우리들처럼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어디다 선을 긋고 임자를 구분해야 할지 애매할 지경이었지요. 밤새도록 할복 작업을 하다가 지치면 남은 것은 그냥 놔두고 들어가더군요. 다른 누가 가져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때 백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는데, 개가 백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 국내 명태 어획량의 7할이 고성 일대 15개 포구에서 잡혔다. 특히 동지섣달에 많이 잡혔다. 2월에 조금 잡히는 명태는 춘태라고 했는데, 맛이 덜했다. 당시 거진읍 일대에는 명태의 애(간)에서 추출한 기름인 간유 공장도 많았다. 간유는 요즘의 '오메가3'라는 영양제와 흡사한 것으로, 눈을 보호하고 밝게 해 주는 영양소를 다량 포함하고 있다하여 밤에도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먹었다.

거진 어촌계 대표 백용기 씨(58세)에 의하면, 1960년대에는 북한 수역인 원산 앞바다까지 가서 조업을 했으며 6~7톤짜리 소형 목선들이 한 해 겨울 명태를 잡으면 시내에 집을 장만할 만큼 벌었다. 집을 이미 장만한 어부들은 쌀을 가마니로 사다가 방에다 쌓아 놓았는데,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고 노는 바람에 가마니가 닳아서 구멍이 났더라는 얘기가 우스개로 돌았다. 부녀자들도 명태 할복으로, 한 해 겨울에 버는 돈이 이삼백만 원 씩은 되던 때였다. 그때는 거진읍 전체 인구가 2만 명이 넘었다.

2011년 5월 현재 현재 거진읍의 전체 인구는 7천790명. 그중에서 어민은 2천370명. 가구 수로 따지면 720가구다. 좋은 시절은 명태와 함께 다 사라진 것인가? 전체 인구가 삼분의 일로 줄었다. 어민들은 그보다 더 급속하게 줄었으며 지금도 계속 줄고 있다. 그래도 거진 어촌계는 전국 어촌계 중에서 가장 구성원이 많고 목소리도 크다.

"이제 거진 어민의 태반이 범법자가 됐습니다. 생계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산업법을 위반한 생계형 범법자들이지요. 남획을 막기 위해 삼중망을 금지하고 조업을 규제하는 대신 국가는 어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종은 어종대로 멸종하고 어민은 어민대로 비참해집니다."

백용기 씨가 언급한 삼중망은 작은 치어들까지 잡아들여 어종의 씨를 말리게 되는 세 겹 그물로 전 세계가 불법 어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생계를 잇기 위해서 불법인 줄 알면서도 삼중망을 사용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백용기 씨는 우리 해역이 흉어가 되는 또 다른 원인으로, 우리 수역에서 멀지 않은 북한 수역에서 1천 여 척에 달하는 중국 쌍끌이 어선(저인망 트롤의 일종)들이 현재도 무차별 남획을 현재도 벌이고 있는 실정을 꼽았다. 저인망으로 해저 표층부터 싹쓸이를 한 지가 이미 7년이니, 어종이 남아나겠냐고 했다.

고성 명태와 인제 황태, 축제로만 남은 이름
거진읍에서는 지난 10월 하순에 제13회 명태 축제를 열었다. 2010년 이전에는 '고성 명태와 겨울 바다 축제'였고, 올해에는 '고성 명태 축제'였다. 축제 명칭은 이렇게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축제의 심벌은 언제나 '고성 명태'였다. 축제 준비 위원회에서는 해마다 '고성 명태'를 잡기 위해 어민들을 독려하여 조업에 나서봤지만 지난 2008년 축제 때 수협에 위판된 명태는 5㎏, 2009년에는 22㎏에 지나지 않았다. 축제 준비 위원회는 이제 고성 명태 시대의 부활을 기원하고, '고성 명태'라는 브랜드 상품을 알리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축제의 방향을 틀었다. 이번 축제에 선보인 고성 명태는 러시아에서 속초항으로 직수입한 명태를 할복하여 고성 바다의 해양 심층수로 세척하고 해풍으로 건조하는 방법으로 특화되었다.

인제군 용대리에서도 매해 2월 하순에 '인제 황태 축제'를 연다. '고성 명태 축제'처럼 용대리 황태촌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산하는 '인제 용대 황태'라는 고유의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심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용대 황태 영농조합법인 이강열 대표에 의하면 '인제 용대 황태'는 2009년에 특허청 단체 포장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브랜드에 대한 보다 강력한 인증인 지리적 표시제에 의한 원산지 등록을 아직 이루지 못해 중국 등에서 수입한 황태와 똑같이 러시아 산으로 취급될 여지가 남아 있어 조합원들의 원성이 높다고 했다.

동해수산연구소에서는 2010년에 각 수협에 의뢰하여 알을 밴 살아 있는 명태 1마리당 10만 원의 포상금을 걸고 포스터까지 제작, 배포하여 현상수배(?)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몇 마리 잡기는 했으나 성질이 급한 명태를 살려서 데려올 수 없었다. 이에 연구소 직원들이 직접 찾으러 나서 보기도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살아 있는 명태에서 알을 채취하여 인공 부화로 치어를 키워서 동해에 방류할 계획이었던 동해수산연구소에서는 미국이나 알라스카에서 모어母漁를 들여온다는 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윤의구 씨는 말했다.
1970년을 전후해서 가장 많이 잡혔고 필자 자신도 예전에 오랫동안 안주로 즐겼던 노가리는 치어 수준에서 좀 더 자란 새끼 명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새끼 명태가 아닌 다른 어종의 성어라는 엉터리 분석까지 나오면서 저인망 트롤 어선들이 근해에서 명태의 씨를 말리는 일을 방치했다.

북양의 찬 바다에서 해류를 따라 동해로 내려와 산란하며 몽롱한 꿈에 젖던 명태.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려서 황태가 되고 코다리가 되던 명태. 포구마다 산봉우리처럼 연이어 쌓여 어민들의 돈이 되고 쌀이 되고 집이 되고 등록금이 되던 명태. 풍요와 다산을 빌면서 함께 노는 즐거운 축제의 상징이었던 명태. 그런 동해 명태는 이제 전설이 되고 말 것 같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분들은 장담했다. 어종의 서식 환경을 조성해 주면서 1~2년만 조업을 안 하고 보호해 주면 어장은 다시 살아나고 풍부해진다고. 다만 공생을 위한 소통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 문제라고. 그렇다면 명태는 어떨까? 한류를 따라 회유하는 생태를 지닌 어종인 명태도 돌아올 수 있을까?

2010년 2월 1일자 수산인신문(www.isusanin.com)에 의하면 한반도 주변 해역의 평균 수온은 1968~2003년 사이 0.7℃ 상승했다. 특히 1985년 이후 매년 0.06℃ 상승했는데 이는 전 세계 해수 온도 상승율(0.04℃)의 1.5배다. 이는 살기 좋은 수온(3~5℃)을 찾아 먼바다를 회유하는 명태가 언제 동해로 돌아올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북양에는 아직도 명태가 많고, 명태를 좋아하는 나라가 드물다는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중국이다. 러시아 쿼터를 중국과 나누는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냉동 명태를 러시아에서 사다가 필레트로 남부 유럽에 수출한다. 남부 유럽 사람들은 본래 대구 필레트 가공 음식을 즐겼지만 맛이 비슷하고 원가가 저렴한 명태로 원료를 대체한 것이다. 그런데 명태 필레트를 이용한 가공 음식이 중국인에게도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보통 생맥주집에서 기본 안주로 나온다. 윤의구 씨는 10억 인구의 중국 인민이 명태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면서 정부는 보다 현명한 외교를 통해서 명태 공급을 확보해야 한다고 윤의구 씨는 말한다. 명태는 이제 우리 어민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잡는 어종이 된 것이다.

김홍성 님은 산책과 도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20세기 말에 네팔로 이주하여 설산을 벗하고 살다가 근년에 귀국해 춘천에 머물고 있습니다.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산문집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 《천년 순정의 땅 히말라야를 걷다》, 《우리들의 소풍》, 《꽃향기 두엄 냄새 서로 섞인들》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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