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2011년 겨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내용 있는 밥 나누어 먹고 함께 쉴 수 있는 그날을 향해

김성희



부안 인구는 계속 줄어 이제 채 6만이 채 되지 않는다. 서쪽 바다로 툭 튀어나온 변산반도는 부안 읍내에서도 꽤 떨어진 곳이었다. 바닷가에 있지만 산세도 험하고 수려하다. 바다와 갯벌에서 나는 갯것이 풍부하고 들판도 비옥하고 드넓다. 고속도를 달리는 동안 어쩐지 조마조마하고 각박하던 심정이 변산으로 접어들면서 마음이 툭 트이고 안도감이 들었다. 이 땅의 기운이 사람에게도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 같은 이들이 이리로 유형을 왔던 일이나 부안군당 빨치산들의 활동 근거지였던 점 등을 떠올려보면 개인의 입신양명보다는 스스로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는 박해도 아랑곳 하지 않는 어떤 반골기질 같은 게 이 고장 사람들 유전자에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변산에 들어가는 길에 마주치게 되는 '세계 최장'의 새만금 방조제를 지날 때면 숨이 졸이기라도 한 것 같아 괜스레 창을 열고 바깥바람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괴한 방조제는 '세계 최고'를 갱신한 것 말고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농사가 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갯벌과 연안에 기대어 살던 셀 수 없는 생명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지역주민들은 세계최고 방조제 덕에 얼마나 더 윤택하고 행복해졌는지.

어찌 보면 무슨 수를 쓰던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과 뭇 생명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돼야 한다는 말은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일 것이다. 지난날의 부박한 시대정신이 새만금 물막이를 추구하고 시민들의 방조가 이를 용납했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것인가. 4대강에 뒤집어씌운 콘크리트나 거대한 부조리같은 세계최장의 방조제를 말이다.

변산에서 모항 방향으로 달리다 채석강에서 얼마 멀지 않은 지점에 이백연 씨가 사는 도청리가 있다. 그는 나고 자란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 한평생 마을을 떠나본 적 없지만 그는 농민운동이나 생태농업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3년째 한살림 호남지역 생산자대표를 하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내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어야 했다고 했다. 밖으로 다니기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집안 돌보는 일을 등한히 한 까닭이었다. 아들로는 맏이인 그는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위해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그런 처지를 달가워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때문에 특별히 고통스러웠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의 성정 자체가 그런 것 같았다.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들을 많이 겪었을 텐데, "그땐 다 그랬잖아요. 착실하게 농사 잘 지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다.

그를 두고 변산공동체의 윤구병 선생은 '이백연 씨는 학교는 초등학교까지만 다녔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세상 보는 눈이 정확하고 이치에 밝다'고 했었다. 짧은 만남을 통해 그의 됨됨이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뜻을 세우고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내용 있게' 더불어 살고 그것이 주변에 영향을 준 일만 생각해도 그는 한 세계를 이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무래도 1974년경 그의 마을로 이사 온 오건‧이준희 부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이백연 씨가 열입곱 살이던 그 해에 같은 마을로 이주해왔다. 1980년대에는 노동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을 목적으로 농촌으로 이른바 '농투신'을 한 사례들도 적지 않았지만 현장투신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 중반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변산의 도청리로 신혼부부가 이사한 일은 오건 씨의 부친인 소설가 오영수가 쓴 자전적인 소설《어린 상록수》에 잘 드러나 있다. 판화가 오윤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어쩐 영문인지 어릴 때부터 농사에 뜻이 있었고 지향에 따라 농대에 진학했으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뜻에 맞는 선배 동료들과 뜻을 실현할 농장 터를 물색하며 전국을 누빈 끝에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분들은 워낙 뜻이 있었던 분들이고… 한 마을에 살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교류를 했죠. 농대를 졸업하고 온 분들이라 새로운 농법도 처음에는 신기했어요. 예를 들면 그 때까지 우린 배추를 그냥 직파했었는데 모종을 길러서 밭에 내는 일 같은 게 그래요."

지금도 서울이나 도회지와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해도 모항에서 머잖은 도청리는《어린 상록수》에 묘사되기로도 부안읍에서도 백여 리를 들어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 오지였다. 이 외진 시골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던 청소년기의 이백연 씨에게 이들 부부와의 만남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한창 젊은 때니까 호기심도 강하잖아요. 그 분들이 하는 새로운 농사법이나 사회에 대한 인식이 모두 새로웠어요. 관심이 끌렸지."

혼수로 손수레와 자전거를 마련해서 이 마을로 살러 온 오건 씨 부부는 7년 동안 꽁보리밥만 먹으며 손수레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일구었다고 한다. 그는 '이웃에 사는 농민의 절반정도가 쌀밥도 먹고 텔레비전을 갖기 전에는, 쌀밥도 먹지 않고 텔레비전도 갖지 않겠다'거나 저수지가에서 돌을 주워 집 지을 준비를 할 때 이를 지적한 마을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두려운 일'이라고 일기에 기록했을 만큼 운동가의 자세가 철저한 이였던 것 같다.

그와의 인연이 계기가 돼 이백연 씨는 2박3일, 3박4일씩 수원에 있던 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으로 가 교육을 받았다. 강사로 나온 이들은 이우재, 장상환, 황환식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그는 그에 대해 "가슴이 뛰었다" 고 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개인의 이익보다는 추구하는 가치를 향해 망설임 없이 자신을 던지는 '문제적 농민'이 된 것이다.



아내 정복자 씨를 만난 것은 1983년이었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의 아내는 그 무렵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을 떠나 서울 인근 덕소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백연 씨와 같은 마을에 살던 어린 후배가 같은 공장에 다니고 있다가 '좋은 언니, 좋은 오빠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서울에 올라가 선을 보고 그 해에 결혼을 했다. 부부 사이에는 직업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는 큰 아들 이정현, 취업을 앞 둔 딸 이윤희, 군에서 제대해 복학을 앞두고 있는 작은 아들 이정우, 이렇게 삼남매가 있다. 호랑가시나무가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는 그의 집 마당에서 아내와 나란히 선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이백연 씨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옷매무세를 고쳐주었다.

삼십 년 가까이 함께한 이들 부부의 결혼 생활은 분명 평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5년 소몰이투쟁이나 2003년 부안 핵폐기장반대투쟁 같은 일에 이백연 씨는 늘 한복판에 있었다.

이제는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졌지만, 2003년 당시의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부안군 전체를 펄펄 끓게 했다. 인구 7만도 안 되는 그곳에서 무려 4천5백 명이 상경해서 집회를 했고, 부녀자들이 긴 머리를 삭발하는 광경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백연 씨도 그 일로 일 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그가 속해 있는 산들바다공동체 여성생산자 가운데 무려 여섯 명이 삭발에 참여했다. 그 당시 참여정부는 갖가지 논리로 주민들을 공격하고 핵폐기장 건설의 당위를 설명했다. 그 일에 앞장섰던 당시의 부안군수는, 핵발전이 안전하고 핵폐기물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전제 아래 어떻게든 지역에 돈을 끌어오고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나름의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보니 군민 전체가 일치단결해서 그 일을 막아낸 일이 부안군을 얼마나 자부심 넘치는 곳으로 만들었나. 일본이 후쿠시마 사고가 터진 뒤에 속수무책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잖은가.



농민운동가에서 생명농부로
농민운동에 열심히 참가하던 그가 유기농 농사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1980년 초중반의 사회적 움직임이 변산에 있는 그에게까지 작용한 것일 터다. 직접적인 계기는 정경식 씨와의 만남이었다. 정경식 씨는 풀무원농장에서 3년 동안 유기농업을 실습하고 1983년 변산으로 귀농했다. 그도 처음에는 오건‧이준희 부부의 농장에서부터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변산에서 유기농 농사를 시작할 무렵의 어려움은 정경식 씨가 한 귀농학교 강의 등을 통해 꽤 알려졌다. 가진 것 없이 자급을 목표로 농사를 시작한 그들의 논에서 잘 자라던 벼들이 벌레들 때문에 하얗게 죽어가자 아이를 엎고 뙤약볕 아래서 같이 일해 온 그의 아내는 당장 굶주릴 일이 두려웠다. 그래서 좀처럼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은 남편에게 '딱 한 번만 농약을 치자'고 눈물로 호소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굶기면서 무슨 유기농이란 말인가 하는 절망적인 생각에 그는 십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 농약을 사들고 왔다. 그러나 결국 해질녘 바람결에 춤추는 벼 포기들을 보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고 농약 치는 일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백연 씨도 그 무렵 그와 다르지 않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이야기에서도 자신을 대수롭게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냥 덤덤하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범상하게 이야기 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유기농업을 처음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에는 어디서 특별히 그에 대한 농업기술을 배울 곳이 없었다. 그저 귀동냥을 하거나 경험자들이 하는 좌담회 같은 데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유불리와 무관하게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인 그는 몇 해 연속으로 농사에 실패를 하면서 생계가 막연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추 천 근은 나와야 내년 농사 자금 마련하고 도지 내고 생활을 꾸려갈 텐데 한 10년 동안은 계속 이삼백 근도 안 나왔어요. 빚은 쌓여가고 어려웠는데, 10년쯤 지나니까 땅심이 살아나고 기술도 쌓여서 일정한 생산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농민운동가로 살아온 일이 후회되지는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뭐 대단한 운동을 한 건 아니고요. 그런 사람들 안 만나고 농민운동 같은 거 안 했으면 아마 돈은 많이 벌었을 것 같아요. 내가 어릴 때부터 일을 해 와서 눈치 빠르고 생활력은 강하거든, 허허."

그는 정경식 씨를 포함해 변산의 농부 예닐곱 사람과 함께 1980년대 말 전주 시내의 소비자들과 직거래운동을 시작했다. 1986년 12월에 한살림이 출범한 지 3년 쯤 지난 뒤였다. 전라도 지역에서 시작된 최초의 생협이었다.

"한울생협은 한동안 아주 착실하게 유지됐어요. 아주 탄탄했죠. 그런데 운영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시설도 필요하고 그렇잖아요. 생산이나 소비자의 규모는 더 이상 늘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자가 보기에는 조금 감당하기 어려운 투자도 일어나고 그러면서 경영이 어려워졌어요."

한울생협에 대해 회상하는 그의 표정에는 얼핏 회한이 비쳤다. 이웃들이 해주는 말에 의하면 그 무렵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직접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전주 시내까지 물품을 공급하러 매주 오갔다고 한다. 그런 그를 좀 말려달라고, 늙은 노모는 이웃의 친구들 손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시곤 했다고 한다.

그가 한살림을 만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이미 70년대부터 가톨릭농민회(가농) 회원이었고 오원춘 사건이나 함평고구마 사건, 쌀생산비조사사업 같은 가농의 이런저런 집회에서 가농의 회장이던 박재일 선생을 먼발치에서나마 늘 보아왔던 차라 한살림에 대한 신뢰는 굳건했다. 한살림은 이미 어느 정도 안정된 규모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살림에 물품을 내면서 어려운 사정은 조금 개선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울생협의 출발 때부터 관여했고 농사를 지으면서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직접 물품을 나르며 열정적으로 조직을 꾸려왔던 그에게는 한살림과 한울을 함께 결합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역에서 독자적인 생협을 꾸려간다는 자부심과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선발 생협에 흡수되는 형태의 합병에 대한 정서적인 반발이 컸기 때문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한울은 지역에 서로 가까이 있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밀접하게 결합돼 있으니까 아무래도 더 가족적이었죠. 그러나 한살림 소비자들과 교류하면서 보니까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말이나 행동거지가 수준들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그는 이렇게 한살림 사람이 되었고 지금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금의 한살림에 대해 "소비가 늘어나는데 비해 새로운 생산자는 늘지 않고, 해오시던 분들은 고령화 되다보니 개별 생산자들 생산규모가 커지고 친환경 농자재에 의존하면서 투입이 늘 수밖에 없잖아요. 이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또 생산자들 가운데 일부는 억대 공급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대개는 형편이 크게 나아진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변산공동체와 산들바다공동체
그가 다시 만난 소중한 인연은 아무래도 윤구병선생과 변산공동체의 식구들이었던 것 같다. 《뿌리깊은나무》의 초대 편집장이기도 했던 윤구병 씨는 1995년 충북대 철학과 교수직을 내던지고 '저소비 자급자족'을 지향하는 공동체생활을 변산에서 시작했다. 귀농운동본부가 설립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고 '자발적 가난' 같은 말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것도 그 즈음이었다.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단순히 재화를 쌓아놓고 호의호식 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의 한 흐름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는 변산공동체가 추구하던 농사와 교육이 일치된 대안교육에 대해 뜻을 같이 하고 큰 아들을 그곳에서 길렀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관행을 거슬러 대안을 찾아 실험에 나선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시행착오의 혼란과 예기치 못한 시련들이기 쉽다. 지금도 변산공동체는 진행되고 있고 최근에는 다시 공동체학교의 학생도 이십여 명으로 늘어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그의 큰 아들이 다니던 초창기에는 학생들도 학부모도 힘든 점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도 단지, "큰 애는 고등학교는 부안에 있는 일반고등학교로 갔어요. 아이는 그다지 재미있어 하지 않았어요. 농사짓는 집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학교에서 늘 농사를 하니께" 하며 웃고 말 뿐이었다.

도시 소비자들 가운데는 그가 이끌고 있는 산들바다공동체를 찾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변산이 자연 풍광도 넉넉하고 수려하지만 젊은 생산자들이 합심해서 꾸려가는 공동체에 늘 활력이 늘 넘쳐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니어링 부부가 살던 버몬트 주의 농장만큼이나 도시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대안 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폐교가 된 마포초등학교는 여름철이면 서울 수도권 지역 등에서 찾아온 소비자들로 늘 분주하다. 마포초등학교를 마을 공동체 공간으로 살려낸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한살림 생산자 조직인 산들바다공동체와 변산공동체, 그리고 지역의 유서 깊은 풍물패 '천둥소리' 등이 이 공간을 합심해서 운영하고 있다.

평생 농민으로 살아온 그에게 농사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그냥 맥없이 웃었다. 어제까지 무를 한 트럭 뽑아서 서울로 보냈고 오늘 할 일은 보여주기가 뭣하다는 말을 한다. 애써 기른 시금치를 갈아엎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여름동안 계속 비가 내려 애를 먹었고 실제로 고추 농사는 완전히 녹아버렸지만 그 뒤로는 날이 좋아 작물들이 기가 막히게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출하 일정이 맞지 않아 천 평은 족히 돼 보이는 제대로 자란 시금치와 알타리무를 그는 예취기로 무심한 표정으로 갈아냈다. 목이 잘려 널브러진 시금치들에서는 날것의 비릿한 냄새가 나 마음이 처연해졌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마음이 아려 한 보따리 뽑아서 서울로 가지고 왔다. 자식처럼 기른 유기농 시금치를 갈아내는데도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그는 무심한 사람일까.

"속상한 건 말할 수 없지유."

말끝을 은근하게 늘이는 그 지방 사투리로 말을 꺼내곤 잠시 허공에 눈길이 머문다. 하고 싶은 말이 열 가지 있어도 겨우 하나를 꺼내놓을까 싶게 말을 아끼는 그다. '뭐 좋은 얘기 겠냐'며 좀체 속내를 비치지 않았다. 졸라서 겨우 들은 사정은 이렇다. 여름내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그친 뒤로는 볕도 좋았고 기온은 예년에 비해 다소 높았다. 그래서 약정한 출하 시기보다 열흘 쯤 빨리 자란 게 화근이었다. 한살림에는 생산지별로 출하 일정이 나뉘어져 정해져 있다. 충청도 쪽 산지에서 시금치와 알타리무가 먼저 나간 뒤 11월 초순에 변산에서 나가야 하는데, 11월 초가 되었을 때 이미 변산의 시금치는 출하기준인 25㎝를 넘어서버렸다. 알타리무도 무의 지름이 3㎝를 넘어서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커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황토밭에서 뽑아 손톱으로 대충 껍질을 벗겨내고 와삭와삭 씹어 먹은 그 알타리무는 너무도 달고 시원했다. 이 잘 자란 유기농 시금치와 알타리무가 도시 회원들의 식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란 밭에 그냥 갈아엎어져야 하는 일이 너무 부조리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지혜가 부족한 때문인가, 체계가 엉성한 탓인가. 여름내 뙤약볕에서 땀을 흘려 자식같이 길러냈을 농부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밭을 갈아엎어야 했던 사정을 듣는 동안 내내 목이 탔다. 그는 잠시 들러 목이나 축이자며 마을에 있는 주막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농가 마당에 세워둔 컨테이너 박스에 차린 마을 주막이었다. 기쁠 희(喜)자 두 자를 새겨 넣은 옛 사기주발에 따라 마시는 막걸리가 갈증 난 목을 적셔주었다. 무심한 듯 옆자리에 있던 일행들이 모두 이백연 씨가 오랜 박형진 시인과 함께 활동해온 풍물패 천둥소리의 단원들이었다.

"농민운동에 문화랄 게 풍물밖에 없었지유. 이게 일과 놀이 조직운동의 문화적 요소가 딱 맞아 떨어지니께 이만한 게 없으유. 그런데 요샌 통 못 나갔네요."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께"


옆 자리에 앉아있던 천둥소리 단장님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투로 말을 했다.

"아따, 그렇게 말해버리면 내가 그냥 먹고 사는 일만 하는 것처럼 되는데 그런 건 아니고요."
"아, 이백연 이 동생은 한두 해 봐 온 게 아니잖여, 밤낮없이 얼마나 열심히 일 하는지 몰라. 그리고 뭐 그런 활동한다고 또 맨날 다니고, 그러니 제수씨가 얼마나 고생이야.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도망갔을 거여. 올해도 그러고 내년에도, 해마다 그 고생을 하는데, 이제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막걸리 잔을 두고 오가는 그들의 말 속에는 깊은 정이 뚝뚝 묻어났다. 오건 씨의 미망인이 된 이준희 씨도 "이야기로 쓸 만한 사람을 찾아왔네요. 처음 왔을 때 열일 곱 살이었는데 참 착했어요. 지금도 한결같지만: 하면서 이백연 씨를 바라보는 눈길에 정이 넘쳤다. 그 역시도 "나야 뭐 다른 거 재주도 없고, 그냥 하던 일을 꾸준히 한 거, 그거 말고는 내세울 게 없어요" 이렇게 겸손한 자기 평가를 했다. 올해 쉰다섯 살인 그는 예순이 넘으면 이제 농사를 더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그 대신 작은 쉼터를 만들고 그 집에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이 한두 가족씩 찾아와 쉬고 '내용 있는 밥'을 같이 먹으면서 기력을 찾아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게 하면서 자신도 쉴 수 있게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가 흘린 땀에 겪은 고생에 비할 때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합당한 보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얕은 셈으로는 그 계산이 안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사람인가. 그 각별한 사람들과 쌓아온 인연과 흔들림 없이 고향에 뿌리박고 주변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나누어주고 있는 그 일을 과연 돈으로 셈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니 새삼 숙연한 생각마저 들었다. 저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떠돌아다니는 세태에서, 그이처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외롭고 고된 일들을 감당하며 버텨온 사람들에게 의해서 세상이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을 농부 이백연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저러고도 제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룰 수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는 믿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종교도 신도 있을 수 없다."

소설가 오영수가 아들 내외가 이 마을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는 소설 속 구절을 변산을 떠나오는 차 안에서 나 역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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