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2011년 겨울 [특집] 명태, 밥상 위의 바다 / 핵 없는 사회를 위해

[ 여는 글 ]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글. 이근우 사진. 속초문화원

명태는 분명 우리와 친근한 물고기다. 즐겨 먹는 생선으로 조기도 있고 갈치, 꽁치, 고등어, 오징어도 있지만 조기나 갈치를 노래한 가곡은 없다. 고래 고기를 즐겨 먹는 일본에서는 고래를 위한 제사도 지내고 비석도 세웠지만 고래를 위한 찬가를 짓지는 않았다. 우리는 즐겨 먹는 물고기를 위해서 찬가를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명태는 너무나도 친근한 물고기지만 오래전부터 있었던 물고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중기 무렵 기후 한랭화로 동해 바닷물이 차가워지면 갑자기 동해안에 나타난 낯선 물고기였다. 순식간에 이 물고기는 대구의 자리를 대신하였고, 일상적으로 음식상에 오르게 되었고, 심지어는 제사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와 친근해졌다. 그렇지만 지금 그 물고기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현재 우리나라 연안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회상할 수밖에 없다.

가곡으로 노래하다

명태 
       양명문 시/ 변훈 곡/ 오현명 노래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푸트의 왕처럼 미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가곡 ‘명태’는 1951년에 작곡되었고, 1952년에 부산극장에서 바리톤 오현명이 처음 불렀다. 그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으며, 당시의 음악평론가 이성삼은 <연합신문>에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하나”라는 평론을 실었을 정도다. 그렇지만 1970년 말에 와서 ‘명태’는 새롭게 주목을 받았고, 홍난파ㆍ현재명과 같은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서 탈피한 ‘명태’나 ‘쥐와’ 같은 작품은, 남성적이며 동시에 리얼리즘 가곡의 맥을 잇는 듬직한 산봉우리라고까지 평가받게 되었다. 이 시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명태’라는 시가 가진 사실성이다.

검푸른 바다 밑에서 명태는 주로 북태평양 지역의 대륙 사면 근처에서 산다. 경상북도 이북의 동해안에서 오오츠크 해, 베링 해, 일본의 야마구치 현에서 서식하는데, 산란을 위해서 조금 더 얕은 해안으로 접근한다. 가장 많은 모이는 곳은 강원도, 함경북도, 경상북도였다(1936년). 동해의 깊은 바다에서 활동하고 산란하므로, “검푸른 바다 밑에서”라는 시의 표현은 동해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동해에 대한 묘사로 ‘검푸르다’고 한 것 또한 사실적이다.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명태는 평소에는 50m 이상 깊은 수층에서 서식하는데, 수컷은 중층, 암컷은 저층에서 떼를 지어 다니며 생활한다. 가장 적당한 온도는 2~4℃이다. 이처럼 원래 냉수성 어류인 명태가 우리나라 해안에서 사라진 이유도 지구의 온난화로 냉수대층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양 출신의 시인인 양명문은 직접 명태잡이에 나서 보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어부로부터 명태의 습성에 대해서 자세히 들은 적이 있는 걸까? 명태가 떼를 지어 다니는 모습을 직접 보고 쓴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명태는 알에서 깨어난 후 5년이면 30~42cm로 자라며, 갑각류, 멸치, 정어리, 오징어 종류 등 닥치는 대로 먹기 때문에 성장이 빠른 편이다. “클 대로 컸을 때”란 산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라는 뜻이다. 대체로 몸길이가 40cm에 이르면 산란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알에서 깨어난 지 4~5년 정도면 산란하게 된다.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 치고,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이 부분은 명태의 산란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산란기의 명태는 로맨틱한 명태가 아니다. 산란기에 든 명태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알을 낳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해안 가까이로 알을 낳기 위해 몰려든 명태의 뱃속은 완전히 비어 있다. 알을 낳은 과정도 그냥 춤추며 다니는 것이 아니다. 수컷이 암컷의 아래쪽으로 내려가 몸을 뒤집는다. 그리고 수컷은 배지느러미로 암컷의 배를 붙잡다시피 한 상태에서, 수컷과 암컷이 함께 헤엄치면서 정자와 난자를 쏟아낸다. 몸길이 60cm인 암컷은 100만 개의 알을 쏟아낸다.  명태는 산란기가 되면 사랑하는 짝과 함께 헤엄치는 것은 맞지만, 먹이를 전혀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컷은 암컷의 배에 붙어서 거꾸로 헤엄을 치면서 게다가 부레까지 진동시키면서 소리까지 내야 하는 판이니 결코 녹록한 일은 아닐 성 싶다.

어떤 어진 어부의 시의 내용 중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이 아닐까? 모처럼 잡은 명태를 놓아 줄 어부는 없을 것이다. 어부가 그물에 걸린 명태를 놓아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어진 어부라고 할 수 있을까. 명태잡이는 주로 한겨울에 이루어진다. 해수 온도는 2~4℃라고 하더라도, 한겨울 함경도 지역의 바다는 영하 20℃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이롷게 추위와 맞서면서 조업을 하기 때문에 어부들은 단단히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털가죽으로 된 토시와 무릎가리개를 하고 신발을 신고 조업했다. 가죽은 주로 개가죽을 사용하였다. 게다가 갈고리가 달린 긴 막대기를 들고 명태를 찍어 올렸다. 개가죽으로 온 몸을 감싸고 갈고리까지 들고 있는 어부가 어질게 보이기는 애초부터 틀린 일이 아닐까?

그물에 걸리어 명태를 잡는데 흔히 쓰인 그물은 자망이다. 자망은 한 마디로 말하면 커튼 형태의 그물이다. 떼를 지어 다니는 명태들이 이 그물의 코에 대구리가 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그물에는 숨은 노하우가 있었다. 그물코의 크기다. 그물코가 너무 촘촘하면 아주 작은 고기는 잡힐지 모르지만 대구리가 큰 명태는 도리어 그물코에 끼이지 않아서 잡히지 않는다. 너무 커도 명태는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원산은 일제강점기부터 급속히 발전하여 동해안 최대의 항구로 성장하였다. 또한 마산, 목포와 더불어 항구 중에서 풍광이 수려한 곳으로 이름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원산을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에지푸트의 미라가 됐을 때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 몸속의 내장과 뇌를 들어내고 방부제를 넣어 만든다고 한다. 명태도 잡아서 본격적으로 건조하기 전에 내장과 알을 들어내기 때문에, 만드는 방법이 닮았다. 다만 명태의 내장과 알은 명란과 창난으로 가공되어 요긴하게 쓰인다는 점이 미라와 다른 점이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명태는 조선 후기부터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제사상에도 올리기도 하였다. 시인은 명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1935년의 명태는 약 2억4천만 마리가 잡혔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2천 만이라고 잡으면, 1인당 12마리 꼴로 명태를 소비한 셈이다. 이 부분에는 시를 쓴 양명문의 자화상이 투영되어 있다.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시절에 넉넉한 사람들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쐬주’에 ‘명태포’라는 조합은 요즘 같으면 환영받지 못할 것 같다. 독한 소주에 명태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는 건 빈한함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시인은 북어를 찢어서 고추장에 찍어 먹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태를 먹는 방법이 어찌 짝 짝 찢어 먹는 것밖에 없을까.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해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뿐만 아니라 외롭기조차 한 시인은 북어무침이나 명태찌개를 끓여 줄 사람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소주잔에 든 ‘쐬주’를 보면서 그저 명태를 찢어 먹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 시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신기하게도 일본에서도 지역에 따라서 '멘타이(めんたい)'라고 하고 명란(明卵)은 '멘타이코(めんたいこ, 明太子)'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밍타이(明太)’라고 하고, 러시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민타이(МИНТаЙ)'라고 한다. 시인이 예언한 대로 명태라는 말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남아 있다. 일본의 경우 명태는 북해도 지역을 제외하면 많이 잡히지도 않았고, 일본인의 기호에도 맞지 않아서 별로 즐기지 않았으므로, 과거에는 제대로 이름이 없었거나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조선에서 만든 명난젓에 맛을 들인 일본인들이 명태알이라는 뜻으로 ‘멘타이코’라는 말을 쓰게 되면서 지역에 따라서는 먼저 ‘멘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명태라는 시는 ‘어진 어부’라는 이미지를 제외한다면, 명태의 생태나 어획 및 소비과정, 그리고 그 이름의 확산까지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술을 즐기는 주당들 중에는 이 명태를 애창곡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가리’를 찢으며 술을 마시면 주흥이 도도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구석구석에 있던 그때

처음에는 명태라고 불리게 된 물고기가 우리나라에서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름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찬 해류를 타고 명태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한반도 연안에서 잡히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물고기를 ‘무태’ 즉 이름이 없는 생선이라고 부른 것 같다. ‘무태’나 ‘무태어’는 처음 이 물고기를 두고 부른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풍습으로는 이름이 없는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필요가 생겼고, ‘명태’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명천의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은 검증된 것이 아니다. 동해안의 물고기 이름은 50% 정도가 대ㆍ태로 끝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 중에서도 희성인 태씨(太氏)와 연관시키는 것보다는 명천(明川)에서 주로 잡히는 물고기(太)라는 뜻으로 명태(明太)라고 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 아마도 처음 명태라는 물고기와 그 이름을 접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서 쉽게 동해안 그것도 함경도 명천에 잡히는 물고기라고 연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이름이 있는 물고기이기 때문에 먹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노래로까지 불리는 물고기인 명태는 그야말로 우리와 친근한 생선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해 해수 온도의 상승으로 지금 명태는 우리나라 연안을 떠나 버렸다. 언젠가는 우리가 엄청난 양의 명태를 잡아 올렸던 때를, 또 삶의 구석구석에 명태가 있었던 때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이근우 님은 부경대 사학과 교수이고 대마도연구센터 소장 겸 부경대박물관 박물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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