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호 2011년 가을 살림,살림

[ 살림이 눈여겨 본 이 물건 ]

양심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큼 유혹 많은 가공식품

김준

1974년 9월 7일 ‘소비자의 억울한 고발’을 받아 처리하는 일을 하던 한국부인회에서 <진짜․가짜상품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는 한국부인회가 67년부터 8년 동안 ‘불만의 창구’를 통해 접수한 불량 상품과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공모한 불량 상품들이 전시되었다. 불량 상품 중 가장 많은 건 식품류였다. 다른 맛의 냄새가 나는 알사탕부터 대구포인 척 한 장어포, 장수가 모자란 김, 부정 꿀 그리고 색소가 있는 고춧가루가 그것이다. 2011년이 된 지금 고춧가루 불안은 여전하다. 국내산 고춧가루인 줄 알았는데 절반 혹은 모두 중국산이란다. 고추만 들어있어야 하는 고춧가루 속에는 나일론 줄 같은 무언가가 자꾸 들어가고, 검사만 하면 대장균이나 발암물질이 나왔다고 난리다. 중국산 불량 고춧가루를 향한 원성이 자자하지만 우리나라의 ‘불량’ 역사도 만만치 않다. 고춧가루에 빨간 물을 들인 대패가루를 섞고, 빨간 구두 염료를 입히기도 했다. 빨간 고추를 씻었더니 파란 고추가 되었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도 전해진다.
 


해마다 줄어드는 건고추 생산량

고춧가루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향신료다. 거의 모든 음식에 넣어 먹는다. 고춧가루 그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고추장은 김치, 탕, 찜, 찌개, 국, 조림, 무침들에 엄청난 양이 들어간다. 달고 식욕을 자극하는 빨간색하며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입맛이 고춧가루 소비를 늘리는데 한몫한다. 하지만 뜻밖에 우리나라 건고추 생산량은 해마다 꾸준히 줄고 있다. 매년 평균 6퍼센트의 감소율을 보이더니 2009년에는 11만7천 톤으로 10년 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었다. 가장 큰 원인은 일손 부족이다. 다른 작물에 비해 작업량이 많고 고령화 등으로 농촌에 일손이 많이 부족해진데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농가들이 재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수입량 증가도 원인이다. 수입 건고추의 경우 2008년에 이미 시장점유율 40퍼센트를 넘어섰다. 올해도 중국산 건고추 수입이 크게 늘었다.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검역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중국산 건고추 수입량은 6천27톤으로 작년의 같은 기간에 비해 40퍼센트나 늘었다. 최근 국내 건고추 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
다.


고춧가루를 얻으려면 고추를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고 말려 절구에 빻는 수고를 거쳐야 했다. 언젠가부터 빨간 고추를 사다가 깨끗이 씻은 다음 여러 날 말려 방앗간으로 향했다. 그 다음엔 1년에 한 번 건고추를 사다 한 반나절쯤 깨끗이 닦고 꼭지를 따고 씨를 털어낸 다음 방앗간으로 갔으며, 지금은 언제든 마트에 가서 봉지 속에 든 고춧가루를 산다. 이제 고추가 고춧가루가 되려면 ‘공장 속 시스템’에서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 한다. 식약청에 올라 있는 고춧가루 제조 공정은 다음과 같다. 이때 고춧가루의 품질 관리 요소는 수분, 색상, 매운맛, 입도(입자의 크기), 종자(고추씨) 혼입률, 총 균수들이다. 건고추 입고 → 저온 창고에서 보관 → 건고추 투입 → 에어브러시 세척 → 수작업으로 이물질 선별 → 과피와 종자 분리 → 종자 파쇄 → 과피 파쇄 → 파쇄된 종자와 과피를 섞어 분쇄 → 뭉쳐진 고춧가루 해체 → 용도별로 고춧가루 입자 선별 → 선별되지 못한 고춧가루 다시 분쇄 → 건조(장기 유통 시 품질 유지를 위해 수분 15% 이하) → 살균(자외선 등) → 자석을 이용해 금속(쇳가루) 제거 → 포장 → 금속 검출기 통과 → 박스 포장. 고추밭과 멀어질수록 몸은 편해졌건만, 고춧가루를 둘러싼 사건사고들은 점점 더 주도면밀해지고 풍성해지고 있다.


태양초, 반양건초, 화건초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고추 품종은 무려 1천여 종이 넘는다. 품종마다 매운맛과 단맛이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그냥 ‘고추’로만 알고 먹는다. 고춧가루 가공 공장에서도 품종을 구별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고춧가루 종류는 품종보다는 건조 방법, 고춧가루 입자의 크기에 따른 쓰임(장용, 양념용), 매운맛 정도로 나눈다. 건조 방법에 따라 나누자면, 온전히 태양빛 아래서만 보름쯤 말린 태양초(양건초), 55도 이상의 뜨거운 바람(열풍)이 나오는 건조기로 2,3일 말린 화건초, 건조기에서 일정 시간 말린 뒤 자연 상태에서 마저 말린(혹은 그 반대 순서로 말린) 반양건초가 있다. 최근에는 원적외선 건조법도 등장했다. 반양건초는 태양초를 만들 때 많이 나오는 희아리(상한 상태로 말려 속이 희끗희끗 얼룩진 고추)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다. 햇볕 아래서만 말리면 적게는 4분의 1, 많게는 반도 넘게 희아리가 생기지만, 기계에 한번 말린 다음 햇볕에 말리면 희아리가 거의 없다고 한다. 쓰임에 따라서는 김치용(굵은), 양념용(보통), 고추장용(고운)으로 나눈다. 양념용은 씨를 반만 제거하고, 장용은 모두 제거한다.


너도나도 태양초, 정말 태양초일까

고추장부터 고춧가루 들어가는 음식치고 태양초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것이 없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고춧가루 중 100퍼센트 진짜 햇볕 아래서 말린 태양초는 극히 드물다. 볕이 좋아도 여러 날 동안 고추를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잘 말리기란 쉽지 않다. 요즘같이 거의 매일 비가 오는 날씨라면 더욱 그렇다. 마르기 전에 속이 곯고 곰팡이가 생긴다. 이름만 태양초인 고춧가루가 많아진 것은 이런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태양초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애매한 기준도 한몫했다. 식약청에서는 온전히 햇볕에 말린 건고추만 태양초라고 하고 농림부에서는 반양건도 태양초라고 부른다. 태양초와 화건초는 꼭지 색깔로 구분이 가능하다지만, 태양초와 반양건초는 농민들조차 그 구분이 어렵다고 한다. 고춧가루로 빻아 놓으면 더 어렵다. 요즘 태양초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은 반양건초와 정확히 말하면 비닐하우스 안에서 말린 태양초가 대부분이다. 제대로만 만든다면 반양건초나 하우스 건조 태양초도 좋은 고춧가루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속여 파는 행위다.


중국산 고춧가루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가공 과정이 비위생적이고 유통 과정이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중국산 건고추에 대해 270%에 달하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지만, 정작 수입량의 대부분은 냉동고추, 다진 양념(다대기)들이다. 수입 냉동고추의 관세는 건고추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올해 냉동고추 수입량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4천 톤 가까이 더 늘어났다. 냉동고추를 수입해 해동한 다음 다시 건조, 가공하는 업체들 중 일부 작업장의 고추 선별 기계에 먼지가 가득한가 하면, 고춧가루들이 바닥 먼지와 함께 포장되고 있기도 하다. 음식에 넣으면 안 되는 희아리도 고춧가루의 양을 늘리기 위해 함께 들어갔다. 다진 양념도 문제다. 소량의 고춧가루에 식염, 당류, 탄산염, 전분, 파프리카 가루 같은 향신료 제조 성분이 들어간다. 가짜 중국산 고춧가루(다진 양념)는 제품에 조미식품이라고 표기된다. 이들 불량 고춧가루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값과 색 때문이다. 다진 양념의 값은 국산 고춧가루의 6분의 1 수준이다. 순수 고춧가루를 음식에 넣으면 색이 나는데 시간이 걸리고 매운맛 외에 다른 맛을 내기 위해 여러 양념을 더 넣어야 하지만, 다진 양념을 넣으면 바로 색과 맛이 나기 때문에 모르고 쓰기도 하고 알고 쓰기도 한다.


고춧가루 속 쇳가루, 유해한가
시중에서 판매되는 고춧가루는 말린 고추를 쇠로 만든 분쇄기에 넣어 가루로 만든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사이에서 고추가 분쇄된다. 이때 분쇄기가 마모되면서 미세한 쇳가루들이 떨어져 나온다. 떨어져 나온 쇳가루들은 대부분 분쇄기 배출구에 장치된 금속이물 제거 장치(자석)에 달라붙어 제거된다. 이때 일부 아주 미세하거나 고춧가루에 묻어 있는 쇳가루들이 제품에 섞여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제조 공정상, 고춧가루의 특성상 쇳가루를 0%로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또 검출된 쇳가루의 인체 위해성에 대해 미량의 쇳가루는 철분과는 달리 몸에 들어가도 흡수되지 않고 모두 배설되므로 유해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춧가루 속 쇳가루가 언론을 통해 자꾸 문제되자 식약청에서는 ‘고춧가루의 금속성이물(쇳가루) 혼입 방지 매뉴얼’을 제작해 고춧가루․고추장 제조 업소에 대하여 금속이물 제거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고 이를 HACCP(식품 위해 요소 중점 관리 기준) 인증 기준으로 강화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매뉴얼 속에서도 쇳가루와 관련해 ‘제거’ 아닌 ‘제거 혹은 감소’시키라고 나와 있다. MBC <불만제로> 팀은 2007년 식약청 식품안전평가위원장인 고려대 생명과학대 이철호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고춧가루 속 쇳가루가 위해한 것처럼 편집 인용해 왜곡 보도를 했고, 이에 대한 사과 방송을 한 일도 있다.


진짜 좋은 국산 식품을 먹고 싶다면 제값을 치러라
싸고 좋은 음식은 없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중국’산 불량 고춧가루가 아니라 ‘싼’ 고춧가루를 사고팔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고춧가루는 상품과 하품의 값 차이가 10곱절까지 난다고 한다. ‘좋은 진짜 국산’ 고춧가루를 먹고 싶다면 제값을 치를 각오부터 하는 것이 먼저다.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맵게 먹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필요한 곳에 적당히 넣되 ‘좋은 진짜 국산’ 고춧가루를 넣을 것!


건고추는 빛에 비춰봤을 때 투명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색이 진해 보이는 것이 좋다. 덜 마른 것은 표면이 탁해 보이지만 잘 마른 것은 윤이 나고, 흔들었을 때 고추씨가 달그락거리면서 소리가 난다. 씹었을 때 매운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다. 과피가 두꺼운 것이 맛도 좋고 가루도 많이 난다. 속심은 붉은 빛이 진하고, 씨가 적은 게 질이 좋은 거다. 고춧가루는 색이 지나치게 붉거나 옅지 않고 가루가 깔끔하며, 손으로 만졌을 때 손에 들러붙지 않는 것을 고른다. 사실, 가루를 보고 잘 고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고춧가루는 특히 가공 과정과 유통 과정을 고루 따져봐야 한다. 양심껏 팔고 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고춧가루는 양심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큼 유혹이 많은 가공식품이다. 신뢰할 수 있는 가공 업체, 유통 업체를 찾아 구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가공 업체의 위생 관리 시스템, HACCP 시설 인증 여부도 중요하다. 고춧가루를 씻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기왕이면 친환경고추로 만든 것이면 더 좋겠다. 한살림 건고추와 고춧가루는 햇볕을 받고 잘 자란 유기재배 햇고추로 만든다. 제초제, 농약, 착색제, 인공적인 보존처리를 하지 않아 안전하다. 잘 익은 홍고추를 깨끗이 씻어 55도 이하의 저온에서 천천히 말렸기 때문에 맛과 향이 풍부하고 고온건조에 비해 비교적 영양이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춧가루는 유기재배 이상으로 재배한 고추를 HACCP 인증을 받은 시설에서 가공해 믿음이 간다.


고춧가루 맛은 고추의 품종, 그해 날씨와 햇빛의 양, 건조 방법이 좌우한다. 여느 농산물과 마찬가지로 비가 많거나 일조량이 부족하면 맛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여름 내내 내린 비를 염두에 두고, 무조건 태양초만 찾거나 싼 국산 고춧가루를 찾기 전에 고춧가루가 처한 현실을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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