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2011년 여름 살림,살림

[ 살림의 책 ]

목축시대 이후 인류는 문명의 노예가 되었다

글 최성각

꽃이 피고 무더위가 시작되자 더 이상 '후쿠시마'를 입에 올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체르노빌 이후 인류가 직면한 이 끔찍한 대형사고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편집자가 이 책을 선정한 데에는 다분히 '후쿠시마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정말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시간인가?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지? 이 일은 걷잡을 수 있는 일일까, 걷잡을 수 없는 일일까? - 아마도 그런 의문들이 오래 전에 발간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저자 톰 하트만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는 강연자이고, 살고 있는 곳에서는 환경파수꾼이다. 제목이나 내용은 매우 심각한 이야기지만, 종말론을 펼치듯 다급한 호흡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비관론자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태양숭배자라는 사실이다.

하트만은 "우리(모두) 햇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첫 문장도 그렇게 시작한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햇빛을 받아 저장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명(활동)이 된다는 이야기다. 햇빛과 물과 공기로 세포조직을 만드는 식물이 우선 그렇고, 그것을 취해 목숨을 영위하는 동물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이란 곧 숨 쉬고 움직이는 햇빛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대략 20만 년 전에 출현했다고 짐작되는 인류 역시 햇빛을 가장 많이 머금고 있는 식물과 그것을 취하는 동물에 의존함으로써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수렵채취시대였다. 인류는 야생에서 자라는 것만 먹었다. 개체수는 자연 내부의 시스템에 의해 자동조절 되었다. 인구는 취할 수 있는 식물성 먹을거리의 양에 의해 신비롭게 제한되었다. 20만 년 전부터 4만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이야기다. 저자에 의하면 더할나위없이 바람직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가축을 통해 햋빛 먹기
그러나 사단(事端)이 일어났다. 누구도 그 시기를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겠지만, 대략 4만 년 전에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가히 격변이라 해도 될 일이었다. 인류가 특히 먹을거리와 관련해 자연의 형태를 바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목축시대를 연 것이다. '현재 햇빛'을 가축에게 저장함으로써 더 많은 햇빛을 항구적으로, 일상적으로 먹게 된 것이다. 그렇게 3만여 년의 세월이 흐른 1만 년쯤 전에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쟁기나 낫 같은 금속도 이때 발명되었다. 식량(햇빛)이 늘어나자 인구도 늘어났다. 기원전 3천 년의 500만 인구가 예수 탄생 즈음에는 2억5천만 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더 충분한 햇빛의 축적은 인구증가, 인구증가는 곧 권력이 출현하는 바탕이 되었다. 농업을 발명한 이래 자주 피를 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인류가 자기들끼리는 박이 터지도록 쌈질을 해댔지만, 지구에 끼친 악영향은 심대하지 않았다. 문제는 중세 때 석탄을 꺼내 쓰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석탄이 무엇인가? 나무가 현재 햇빛이라면 석탄은 '태고 햇빛'이 3억년 가량 저장된 것이다. 더 많은 숲이 농사를 짓기 위해 개간되었고, 더 많은 식량생산은 더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석유의 기원에 대해서야 이설(異說)이 분분하지만 석유 또한 태고 햇빛으로 간주되는데, 석유가 인류에게 널리 쓰이기 시작한 때는 1850년경 루마니아에서부터였으니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인류문명사는 곧 햇빛의 저장역사, 혹은 먹을거리와 식량, 식량과 인구증가의 역사와 떼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게 하트만의 생각이다. 새롭지는 않지만, 지극히 명쾌하고 간명한 주장이다.

마침내 2010년 기준으로 이 행성의 인구는 69억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룬 1987년에 이미 50억 명. 물론 포유류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일종보다도 인간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인류 전체의 1/1000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전체 인구증가의 90% 이상이 이루어졌다. 명분이야 어찌됐든 인간들끼리 싸울 수밖에 없고, 다른 생물종들과도 치열한 자원경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구가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총량의 절대량을 인간종이 소비하게 된 것이다. 다른 종들에게 허락을 구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이라면 자멸이 자명한 현실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표현한 대로, 현재 햇빛을 사용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석탄이나 석유 같은 태고 햇빛을 모조리 꺼내 쓰겠다고 작심하는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류 문명사는 곧 전쟁사이기도 했다. 전쟁의 명분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거두절미해 말한다면 영토확장이었고, 식량확보였다. 금세기에 이르러서야 형식적으로 얼추 해결된 노예제도 역시 풍부한 햇빛에너지 확보가 바탕이었다. 인간의 몸이나 그 몸에서 비로소 작동하는 노동력 또한 축적된 햇빛에너지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서문화의 융합이라는 명분을 건 알렉산더의 동정(東征)도 그랬고, 외양이야 어찌됐든 그 또한 땅뺏기 전쟁이었던 중세 때의 전쟁도 그랬고, 길고도 끔찍했던 식민지시대도 그랬고, 멀리 갈 것 없이 2차대전 때 3제국의 전쟁개시 목표도 영토확장이었다. 지금도 땅뺏기(독도)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의 제국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딱 하나 자원 축적이 목적이 아니었고 단지 전면적 학살만이 목적이었던 칭기즈칸의 세계정복만은 달랐다. 근대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햇빛에너지의 '골고루 나누기주의'라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양차대전 이후 미국이 전 세계에서 쉬지 않고 일으킨 모든 전쟁은 자원전쟁이었다. 아랍땅에 석유가 없어도 그들이 그쪽에 돈과 생명을 그토록 투자했을까? 자유를 내걸고 장사를 했고, 평등을 내걸고 자원확보에 전념해온 게 인류역사였다.

공멸의 미래에 태무심한 사람들
그러다 어디까지 왔는가? 인간종끼리의 일은 그렇다 쳐도, 달리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토대인 이 행성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빠르게 삼림을 파괴했고, 땅속 태고 햇빛은 이제 거덜이 나기 직전이다. 그 와중에 돌고래가 사라지고, 꿀벌이 사라지고, 산호초가 사라지고, 북극에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얼음이 녹기 시작했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기후체계마저 건들어 기상이변이 일상적으로 속출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체르노빌에서 이제 '후쿠시마 사태'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자명한 공멸의 미래에 대해 사람들은 왜 이토록 태무심할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바닷가재를 예로 든다. 바닷가재는 갑자기 뜨거운 물에 넣으면 자신이 죽는지 즉각 알아채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어 천천히 가열하면 자신이 언제 요리가 되어가는지를 모른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천천히 삶아지는 바닷가재가 더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지 누가 알랴. 그런 점에서 이 비유는 마음에 안 들지만, 저자는 아마 인류가 지금의 삶이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인간들은 똑똑하니 난관을 잘 헤쳐나갈 거예요"라거나 "다 같이 죽는 건 괜찮지 않나요?"라고. 태평한 호모 사피엔스는 마치 무적함대 같기도 하다.

대안은 있는가? 왜 대안은 세계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 대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내놓지 않고, 늘 세계가 이 지경이 됨으로써 인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막심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요구되곤 할까? 그것도 세상 이치일까? 저자 톰 하트만은 목축시대 이전의 구문화에서 대안을 찾는다. 무한한 자원과 끝없는 성장이 허구임이 드러나 버린 신문화. 혹은 현대문명은 구문화의 자연친화적이며 자족적인 삶의 시스템이 과학적으로도 더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전반부는 현재 햇빛과 태고 햇빛에 대한 설명, 그리고 책의 대부분은 현재 햇빛만을 조심스레 사용했던 구문화 사람들, 즉 목축시대 이전의 사람들이 남긴 삶의 내용에 할애하고 있다. 그 풍성한 사례들은 이 책이 주제를 강화하면서 믿기지 않는 감동을 자아낸다.

그들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함께 신성(神性)의 감수성을 잃지 않고 살았다. 가히 성공적인 자연관리의 고수들이었다. "누군가가 식량을 구하면 모두가 식량을 구한 것이었고, 누군가가 아픈 아이나 노쇠한 부모를 가졌으면 모두가 아픈 아이나 노쇠한 부모를 가진 것이었다"(240-241쪽). 그들은 파괴와 지배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감동적인 삶을 영위했다. 이른바 '오래된 미래', 즉 도래하면 좋을 미래가 일찍이 과거에 있었다. 한 아파치 노인은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주울 때에도 땔감에게 "불의 일부가 되어도 괜찮겠느냐고 일일이 물어보아야 한다"(434쪽)고 말한다.

저자는 7천 년 전에 갑자기 시작된 신문화를 인류가 걸린 암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농경 실험을 파멸적인 돌연변이 발생이라고 극언한다. 이후 전개된 지배, 파괴, 살육, 끝없는 욕망충족의 인간역사는 그런 극언이 과도한 표현이 아니라는 데 동의하게 만든다. 저자는 그렇다고 우리 모두 목축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지금 바로 이때, 우리가 구문화에서 반드시 배울 것이 있다는 이야기일 따름이다. 거기 어쩌면 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이 행성의 위기와 인간종의 파멸적 삶의 양태가 "충치처럼 목축 조상들로부터 이어져온 유산의 무의식적인 순환의 결과이지만, 그것은 또한 의식적인 행동으로 끊어낼 수 있는 순환이기도 하다"(21쪽)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그래서 어두워 보이지만 기실 밝은 전망을 내놓고 있는 이 책의 후기를 쓴 닐 도날드 윌쉬(<신과 나눈 이야기>의 저자)는 이 책을 읽고 "나 자신을 문제의 일부로 혹은 해결책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당신은 이제 "결정적 인물(Crucial Ones)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전쟁을 일상적으로 일으키는 나라만큼이나 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한심한 우리 사회에 이 책으로 인해 문명의 암을 극복한 '결정적 인물'이 많이 나타나면 좋겠다.

글을 쓴 최성각 님은 7년째 서울과 시골을 들락거리는 두 곳 생활을 하며, 거위도 키우고 닭도 치고, 헌 집에서 나온 목재로 오두막을 짓기도 합니다. 《날아라 새들아》,《달려라 냇물아》,《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등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