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2011년 여름 살림,살림

[ 말글살림③ ]

한두 방울 톡 비꽃 떨어지면 비설거지해야 - 날씨에대한 섬세한 우리말

글 박남일

여름은 지루한 장마와 함께 온다. 더러는 비는 오지 않고 하늘에 구름만 잔뜩 낀 '건장마'가 들 때도 있지만, 대개는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많은 비를 대지에 뿌린다. 이처럼 장마가 이어지면 옷장 안에서는 슬슬 곰팡내가 풍겨 나온다. 음식은 쉬이 상하고, 빨래를 말릴 겨를도 없다. 그래서 살림하는 이들에게 장마철은 고역이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다. 하물며 긴 장마 통에도 잠시 반가운 햇볕 들 때가 왜 없겠는가. 어둑한 하늘이 걷히면서 잠깐 쨍하고 해가 뜨면, 눅눅한 빨래를 내다 말리느라 살림꾼들 손길이 바빠진다. 이런 때를 '빨래말미'라 했다. 장작을 패서 밥 지어 먹던 시절에는 이때 젖은 땔감을 말린다고 해서 '나무말미'라 부르기도 했단다.

장마는 지겹다. 가뜩이나 잿빛인 도시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때 빗물에 흠뻑 젖은 흙속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꿈틀거리고, 들에서는 오곡백과가 푸릇푸릇 자란다. 여름철에 적절하게 이어지는 장마는 한해 농사의 풍작을 기약하는 필요조건인 셈이다. 거기에 견주면, 당장 살림살이에서 느끼는 불편쯤은 기꺼운 마음으로 겪어내야 하지 않을까.

햇볕과 바람, 그리고 물은 뭇 생명을 키워내는 중요한 밑절미다. 이 가운데서 물은 끊임없이 순환을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마철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지상의 물을 순화(純化), 즉 ‘필터링’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자연운동의 현상을 우리는 날씨라고 한다. 날씨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생생하고 섬세하다. 특히 비와 관련된 수많은 말들은 우리말의 고갱이를 보여준다.



는개, 안개비, 떡비, 잠비 감칠맛 나는 빗말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일까. 물을 들이 붓듯 세차게 비가 내린다. 이렇게 엄청나게 내리는 비를 '억수'라고 한다. '억!' 소리가 나도록 쏟아지는 비다. 선정적인 언론매체에서는 이를 '폭우(暴雨)'라 쓰고, 기상청에서는 꼬박꼬박 '호우(豪雨)'라 부른다. 국어사전에서는 이를 '큰비'로 순화해서 쓰라고 하지만, 주류 언론 기자들과 기상청 관료들은 여전히 멋대가리 없는 한자말을 즐겨 쓴다. 하지만 폭우, 호우, 큰비보다는 억수가 느낌이 생생하다. 참고로 경상도 토박이말에서 '매우'의 뜻으로 널리 쓰이는 '억수로∼' 라는 꾸밈말도 여기에서 나왔을 터다.

억수처럼 비가 내린다. 그런데 퇴근길에 맨몸으로 그 비를 쫄딱 맞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발그레한 뺨을 어루만지며 '채찍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눈으로 보기만 한 사람은 '장대비'가 내렸다고 말한다. 또 자드락자드락 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귀로 듣기만 한 사람은 '작달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처럼 같은 비라도 직접 맞은 사람과 눈으로 본 사람, 그리고 귀로 빗소리를 듣기만 한 사람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날씨와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을 부르는 말이 달라지는 것이다.

장마철에는 큰비가 그치고 '가랑비'가 내리기도 한다. 가랑비는 큰비의 반대말이다. 그런데 가랑비가 내리면 우산을 써야할지 말아야할지 적잖이 망설여진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고민하지 말고 우산을 쓰는 게 나을 성싶다. 가랑비보다 더 가늘게 내리는 비는 '이슬비'라 부른다. 한동안 내려도 땅바닥이 젖지 않고 겨우 풀잎에 이슬이 맺힐 정도여서 이슬비다. 또 이슬비보다 더 가늘게 내리는 비는 '는개'라 한다. 는개보다 더 약한 것은 '안개'다. 그런데 안개를 비의 범주에 넣어도 될까? 걱정할 것 없다. '안개비'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처럼 빗발의 세기에 따라 비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양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먼저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한두 방울 툭 떨어지는 것은 '비꽃'이라 한다. 비꽃이 떨어지면 '비설거지'를 해야 한다. 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긴 했지만, 풀풀 날리는 먼지나 겨우 재울 정도로 적게 내리다 말았을 때 '먼지잼' 했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때와 상황에 따라 부르는 말들도 참 재밌다. 먼저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는 다디달게 느껴져서 '단비'다. 모낼 무렵에 맞춰 한바탕 내린 비는 '목비'라고 한다. 사람의 목만큼이나 중요한 비다. 또 바쁜 봄철에는 비가 내려도 그냥 맞으며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비'다. 하지만 덜 바쁜 여름에는 비가 내리면 집에서 낮잠을 잔다. 그래서 '잠비'라 부른다. 가을 추수 끝나고 떡 해 먹을 때 내리는 비는 말 그대로 '떡비'다.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이름이다.



구름과 바람을 부르는 말
비를 만드는 건 구름이다. 하늘에 떠 있는 높이에 따라 구름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대체로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은 하얗게 보이고, 하늘에 낮게 떠 있는 구름은 시커멓다. 같은 구름인데도 높낮이에 따라 정반대의 빛깔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우리 눈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문득 의심이 든다. 하지만 보이는 건 보이는 대로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맑은 날 가장 높게 떠 있는 구름은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새털 모양이어서 '새털구름'이다. 다음으로 높은 구름은 물고기 비늘 모양을 한 '비늘구름'이다. 그 다음은 수많은 양떼가 모여 있는 것처럼 뭉실뭉실한 '양떼구름'이다. 또 그 다음은 커다란 솜사탕 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구름을 부르는 이름만으로도 그 모양이 눈에 선하다.

뜨거운 한여름 맑은 날에 머리 위로 낮게 떠다니는 시커먼 구름 덩어리는 '먹장구름'이라 부른다. 먹장구름이 지나가면 잠시 그늘이 져서 서늘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소나기를 머금은 시커먼 구름이 몰려 올 때도 있다. 이런 구름을 '쌘비구름'이라 한다. 또 잔뜩 비를 머금고 조각조각 떠다니는 구름은 '매지구름'이다. 비를 맞이하라는 뜻의 '마지구름'이 부르기 쉽게 '매지구름'으로 바뀐 거란다.

내친김에 바람에 대한 우리말도 몇 가지 알아보자.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 바람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봄에 동쪽에서 부는 바람은 '샛바람'이다. 날이 새는 새쪽(동쪽)에서 불어와 샛바람이다. 여름에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집에서 마주 보이는 마쪽에서 불어와 '마파람'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라는 말이 있다. 마파람이 불면 대개는 비가 내리기 마련인데, 이때 바닷가 개펄에서 노닐던 게들이 일제히 눈을 감추는 모양이다.

가을에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하늬바람'이다. '하늬'는 서쪽을 뜻하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서쪽이 하늬, 즉 하늘에 가깝다고 여겼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높바람'이다. 집 뒤 북쪽을 높은 쪽으로 여긴 까닭이다. 그런데 높바람과 샛바람을 더한 '높새바람'도 있다. 학교 지리책에 나오는 '푄(Föhn)현상'에 해당하는 바람으로, 온도가 높고 건조한 북동풍을 뜻한다. 또 요즘에는 잘 쓰지 않지만, 높바람과 하늬바람을 더하여 '높하늬바람'이라 불렀다. 한자말로 북서풍이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부르는 말들도 다채롭다. 부는 듯 마는 듯 실실 부는 바람은 '실바람'이다. 얼굴에 스치는 느낌이 들고 작은 물결이 남실거리게 할 만큼 부는 바람은 '남실바람'이다. 세워둔 깃발이 팔락일 정도로 부는 바람은 '산들바람', 나뭇가지가 흔들릴 정도 조금 세게 부는 바람은 '건들바람'이다. 이밖에 '된바람', '센바람', '큰바람', '노대바람'은 모두 센 바람을 부르는 말들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싹 쓸어 날릴 만큼 무섭게 부는 바람은 뭘까? 말 그대로 '싹쓸바람'이다. 회오리바람도 싹쓸바람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싹쓸바람보다 더 무서운 바람도 있다. 바로 '황소바람'이다. 황소바람은 겨울에 문의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드는 바람을 말한다. 역절적인 이름이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는 속담이 있는데, 옛 시골집에서 한겨울에 문풍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얼마나 춥게 느껴지는지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농부나 뱃사람들은 날씨에 민감하다. 거친 비바람을 몸으로 겪어야 할 때도 많다. 그래서 농사와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날씨와 관련된 말이 유난히도 섬세하게 발달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되면서 자연과 날씨를 부르는 말들이 점점 단순해졌다. 더불어 자연과 교감하는 감성도 무뎌졌다. 그러니 말을 살리면 자연에 대한 우리 감성도 혹 살아나지 않을까.



글을 쓴 박남일 님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을 썼습니다. 지금은 전라남도 해남에서 우리말글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하면서 지역 생태환경을 지키는 활동도 거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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