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2011년 여름 [특집] 원자력, 쉼표가 필요해

[ 종교와 쉼 ]

하느님도 숨을 돌리셨대요

글 박총

쉼. 써놓고 보니 멀고도 가깝고, 일상이면서 사치인 단어로 여겨지네요. 날품을 팔아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나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누리는 쉼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일요일'일 겁니다. 쉬는 일을 돌아보자면, 멀리 갈 것 없이 일요일의 재발견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일요일 이야기를 하자면,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우리네 삶의 리듬이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성서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나)님이 천지를 엿새 동안 지은 다음 이렛날 쉬었고, 거기서 일요일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성당이나 교회에 나들지 않는 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하는 '빨간 날' 일요일의 유래는 모세 시대의 안식일 규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토요일이던 안식일이 일요일로 새로이 자리 잡은 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였고요.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안식일 유산을 계승하는 동시에 예수가 '안식 후 첫 날' 부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을 주님의 날(Lord's day, 주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면서 일요일을 휴일로 정한 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학창 시절 내 친구는 토요일 학교가 파하고 집에 오는 길이면 "네가 믿는 예수 덕에 내일 쉬니까 교회 가면 대신 감사하다고 해라"며 농을 걸곤 했지요.

이 글은 일요일을 마중물로 삼아 쉼에 대한 종교의 지혜를 유대-기독교 전통에 기대어 톺아보려 합니다. 불교도 삼매(三昧)를 통한 안식을 말하고 궁극적으로는 해탈을 통해 윤회의 회전목마를 벗어나는 영원한 안식을 말하지만 유대-기독교만큼 안식에 자주 방점을 찍는 종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본뜻을 이해하게 되면 종교와 관련 없는 이들도 끄억일 부분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윤호섭 교수가 디자인한 달력에는 '빨간 날'이 없습니다. 원래는 인쇄할 때 별색을 쓰지 않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쉬는 날은 아무 일정 없이 푹 쉬라. 없는 날로 생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윤호섭 교수가 디자인한 달력에는 '빨간 날'이 없습니다. 원래는 인쇄할 때 별색을 쓰지 않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쉬는 날은 아무 일정 없이 푹 쉬라. 없는 날로 생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인간이 아닌 안식이 창조의 꽃이다

먼저 구약성서는 태초에 제정된 ‘원조 일요일’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이 다 지어졌습니다.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에 복을 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창세기 2장 1~3정, 쉬운성경

재미나게도 이 구절은 이렛날까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이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엿새 동안 다 지어졌다는 우리네 통념과 달리 일곱째 날에 또 하나의 창조가 있었다는 거지요. 하느님은 엿새 동안 지은 것을 보시고 날이면 날마다 좋다고 감탄했는데 대체 무엇이 빠졌던 걸까요? 히브리말로 메누하(menuha)라 불리는 쉼, 고요,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렛날 메누하가 지음을 받고 나서야 마침내 우주가 완전해졌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은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들을 선하다고는 했으나 거룩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오직 이렛날뿐이지요. 우리가 당연한 듯 사람을 창조의 꽃이라고 보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적 버릇을 내려놓는다면 안식이야말로 창조의 완성이고 목적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성서는 하느님의 꼴(형상)로 지어진 인간의 독특함을 도들새깁니다. 하지만 창조의 정점에 안식이 아닌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만물을 마음대로 정복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식의 그릇된 성서 이해와 그로부터 비롯된 서구문명을 바로 잡긴 힘들 것 같습니다. 만약 인간과 안식의 관계가 바르게 밝혀졌다면 오늘날 우리네 삶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비뚤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안식을 배우자로 삼으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안식》은 안식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이 창조를 마치자 일곱째 날이 탄원했습니다. "우주의 주재시여,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은 저마다 짝이 있습니다. 한 주의 모든 평일이 짝을 가지고 있건만, 저만 홀로 외톨이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안식일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짝지어 줍니다. 실제로 한 랍비는 안식일 전야에 예복을 입고 그 천상의 손님에게 혼잣말로 "어서 들어오시오. 신부여! 어서 들어오시오, 신부여!"라고 했고, 다른 랍비는 안식일 전날 해거름에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춤사위를 펼치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자, 안식일 여왕을 맞이하러 나가세!"라고 외치곤 했답니다.

신부가 사랑스럽듯이 안식일도 사랑스럽고, 신랑이 싱글벙글하듯이 우리도 안식일에 기쁘고, 신랑이 혼인날 출근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안식일에 일을 멈춥니다. 심지어 피로를 느낄 만큼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도 삼가 하라고 가르칩니다. 메누하가 축제란 뜻을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일요일과 매주 결혼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헤셸의 표현을 빌자면, 신부가 신랑의 아픔을 위로하듯이 "안식일은 애무하듯이 다가와 두려움과 슬픔과 어둔 기억을 닦아"줍니다.

자연의 쉼을 뺏으면 인간 역시 망한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하느님이 주신 안식을 잊었고 잃었습니다. 모든 생명들의 바람은 그들을 지은 분 안에서 쉼을 누리는 것이었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탐욕이 땅을 더럽혔지요. 착취가 일어났고 약자들은 쉼을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식일 계명이 사회경제적 약자는 물론 뭇 생명의 쉼을 지켜주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요.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억센 손으로 내리치고 팔을 뻗어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내었다. 그러므로 너희 하느님 야훼가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신명기 5장 13~15절, 공동번역


이러한 안식일의 정신은 모든 이가 차별 없이 일주일에 한 번 쉼을 누리게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6년 간 농사를 짓고 나면 땅을 1년간 쉬게 하는 안식년의 계명, 더 나아가 50년마다 모든 빚을 탕감하고 팔린 땅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예로 팔린 이들을 풀어주는 희년(Year of Jubilee)의 정신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탐욕에 물들어 자신과 이웃은 물론 땅의 안식을 허락지 않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게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게 되지요. 성서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하면서 땅이 밀린 안식을 모조리 찾아 누리게 되었음(《구약성서》 역대하 36장 21절)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자연을 착취하고 그들의 쉼을 빼앗는다면 대지의 주인은 뭇 생명의 안식을 위해 인간의 멸망을 허락할 겁니다.

참된 안식: 내적 해방과 외적 투쟁이 입맞추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일요일을 '안식 돋게' 보낼지 좀 실제적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까요? 먼저 물리적인 쉼에서 시작해야겠지요. 하지만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은 안식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소파에 누워 발가락으로 TV 리모컨을 조작하는 것이 안식은 아니라는 거지요. 더구나 쉼을 단순히 재충전으로만 보는 것도 안식에 대한 모욕입니다. 명토 박아 말하건대, 안식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안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 만물과 더불어 평화를 짓는 것이고 일요일은 이런 날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돈과 성공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시대, 교회에서조차 순교하라는 말보다 덜 벌고 덜 쓰라는 말을 하기가 더 어려운 이 시대, 여성신학자 마르바 던(Marvba Dawn)의 표현을 빌자면 신부인 안식을 버리라고 유혹하는 매춘부가 가득한 이 시대를 살면서 이날만큼은 성취욕과 돈 욕심을 내려놓고 주위의 사람들과 뭇 생명이 안녕한지 한 번은 돌아보자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 삶과 관계된 모든 것을 내가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과 그렇게 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누구에겐 이게 아픔일 수 있겠지만, 동료인 다른 인간과 생명체에게 의존하지 않고선―더 나아가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선―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좀 쉬자는 겁니다(이는 데카르트 이후 철석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자율성의 신화와 그에 기초한 서구산업문명에 대한 실천적 저항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생태 위기가 인간의 생득적인 의존성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오만에서 나왔음을 생각해보면, 일요일이 갖는 생태적 함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근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지요. 우리가 하는 일은 늘 미완의 상태로 머물러 있고 새로 할 일은 끊임없이 생겨나니까요.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안식에 대한 신뢰 내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엿새 일하시고 이레째 안식함으로 그분의 창조 노동이 완성되었듯이 우리 역시 엿새 일하고 이렛날에는 안식이 그 일을 완성하도록 맡겨두자는 것이지요. 예수도 같은 맥락에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오늘 수고만으로도 족하다"고 하면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해라"고 말한 바 있죠. 이런 신비적인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많은 연구 결과는 하루 동안 일에서 몸과 맘을 떼어내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큰 능률과 더 높은 창의성을 발휘하게 해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통제하려는 오만에서 자유로워지는 내적 해방은 모든 이가 온전히 쉼을 누리는 외적 해방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모두가 차별 없이 안식을 누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혁명입니다. 하지만 존 던(John Dunne)의 시구처럼 어느 누구도 섬은 아니며, 모든 인간과 뭇 생명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 얽혀 있습니다. 누군가 쉬지 못한다면 나 역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되레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생태적 약자를 위한 투쟁 속에서 참된 쉼을 누리기도 합니다.

코다(Coda): 쉼이 우리를 빚는다
파스칼(Pascal)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휴식할 줄 모르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했지만 오늘날 쉼의 부재는 뭇 생명의 불행을 잉태합니다. 오죽하면 일요일엔 하느님조차 숨을 돌리셨다(《구약성서》출애굽기 31장 17절)고 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안식을 바라는 것보다 안식이 우리와 한 몸 이루길 더 열망합니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을 잘 쉼으로 안식과 결혼하고, 그 결혼이 우리를 배우자인 안식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갑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안식일이 우리에게 어떤 날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부디 안식을 신뢰하고 못 다 이룬 일을 맡겨보세요. 일요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뜨겁게 쓸어안아보세요. 이내 나 자신이 뭇 생명에게 안식이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글을 쓴 박총님은 우선 글쟁이이며, 자칭 일상 영성가이고, 교회 전도사 노릇을 오래 했다. 10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접고 지난 2월에 한국에 돌아와 《복음과상황》 편집장으로 노동과 밥벌이를 하고 있으며, 사랑스러운 안해와 함께 네 아이와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셋방을 얻어 다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밀월일기》,《욕쟁이 예수》,《하느님과 만난 동성애》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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