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제철살림 ]

가을이 왔으니 제철 잡곡밥을 먹겠어요

글 사진 장영란


 

우리 밥상의 주인은 왜 밥일까? 농사를 지어 보니 우리 땅은 곡식을 짓기에 참 적당하다. 물을 댈 수 있는 논에는 벼를, 그렇지 못한 밭에는 콩, 수수, 기장, 옥수수 등을 심는다. 이 곡식들은 제때 심고 김만 매주면 저 알아서 잘 자란다. 거기 견주면 고추, 토마토와 같은 채소는 얼마나 병도 많고 탈도 많은지. 만약 과일 나무를 곡식 농사 짓듯 농약 비료 안 주고 자연스레 기르면 얻어먹기 어렵다.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산간오지에서는 기장과 조를 길러먹고, 들판이 좋은 평야에서는 쌀과 보리를 길러먹으며 살아왔다. 그런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우리는 무얼 먹여야 몸이 조화로울까? 쥐눈이콩, 팥, 녹두, 기장, 조, 수수, 잣 등은 국내산인 경우 토종이다. 이는 기장, 조, 수수가 돈이 안 되는 작물이어서 뒷전으로 밀려난 덕분이다. 농사짓는 이들도 대농이 아니라 소농이다. 전부터 길러먹던 거니까 조금씩 기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가을이 오면 올해도 어김없이 햇곡식들이 나오리라. 그 햇곡식 가운데 수수와 옥수수 그리고 조와 기장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조가 아닌 좁쌀, 기장이 아닌 기장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곡식을 들라면 조일 것이다. 강아지풀과 사촌이라니 알만 하다. 자잘한 알갱이인 조에는 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좁쌀은 삼국시대부터 길러 밥을 지어먹은 곡식이다.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문제지만, 쌀밥이 귀하디귀한 몇 십 년 전만 해도 겨울에 보리 농사지어 여름에 보리밥 먹고, 여름에 조 농사지어 겨울에 좁쌀밥을 먹었다. 좁쌀과 비슷하게 생긴 곡식으로 기장이 있다. 기장은 조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알이 동그랗고 자잘하며, 생육기간이 짧고, 거친 땅에서도 자란다. 하지가 지나 심어도 되는 구황작물로 논이 없는 산간지대에서 길러 먹을 수 있는 ‘돌곡식’이다. 조 이삭이 강아지풀처럼 생겼다면, 기장 이삭은 벼 이삭처럼 생겼다. 평안북도가 고향인 친정엄마는 “기장쌀이라고 기장을 쌀처럼 먹었는데, 거기 기장은 알도 굵어 밥을 지어놓으면 쌀밥 같았단다.”고 하신다. 남도 벌판이나 제주도에서는 조를 길러먹었고, 북녘 땅과 척박한 산간지대에서는 기장을 길러 먹었지 싶다.
이 둘 다 노란색 곡식으로 우리 몸에 들어가면 몸을 따스하게 해주고, 소화기가 약한 사람들한테 좋다. 중국 여인들은 산후에 좁쌀죽을 먹는다고 한다. 나 역시 아이가 어릴 때 아프고 나면 기장으로 죽을 끓여주곤 했다. 어린 아이가 있거나 회복기 환자가 있는 집이라면 겨우내 노란 기장쌀을 섞어 밥을 지어 먹으면 좋겠다. 기장으로 할 수 있는 음식을 찾다가 《착한 밥상》을 쓴 윤혜신 님의 ‘기장 깍두기’를 만났다.  북쪽은 젓갈이 귀해서 김장을 담글 때 날 생선을 넣었단다. 쌀이 귀하니 찹쌀로 풀국을 끓이기보다는 조나 기장으로 풀국을 대신했으리라. 그런 배경에서 함경도의 가자미식해가 있고, 그 가자미식해에서 가자미를 빼면 기장 깍두기다. 이번 가을에 김장무가 굵어지면 기장밥을 넣고 깍두기를 담가보고 싶다. 찹쌀로 쑨 풀국과 달리 또글또글한 기장밥을 넣고 담그면 깍두기를 먹을 때 기장쌀이 톡톡 터지는 맛이 있지 않을까? 만일 조를 넣으려면 메조를, 죽보다는 된밥이 좋단다. 기장 깍두기를 담그려면, 기장 밭부터 둘러봐야겠다. 

 

아이들 키를 쑥쑥 크게 하는 수수와 옥수수
우리 집 아이들은 키가 크다. 그 비결은 여러 가지겠지만, 푹 자게 두고 수수밥을 자주  먹은 덕도 있으리라.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아이들은 아침에 자기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푹 잔다. 또 우리 식구들은 수수와 옥수수를 늘 밥에 놔먹는다. 이 수수와 옥수수가 아이들 키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땅에 심어 기르는 일년생 농작물 가운데 수수와 옥수수처럼 키가 큰 농작물은 없다. 초여름이 지나 푹푹 찌는 한여름마다 수수밭에 가면 깜짝 놀란다. 하루에도 몇 cm씩 쑥쑥 자라 며칠 만에 가 보면 내 허리에 오던 수수가 나보다 키가 커져 있다. 옥수수 역시 이에 질세라 키가 크다. 잘 자란 옥수수 밭에 가 보면 옥수수 이파리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수수는 우리 옛이야기에 나오듯 붉은 호랑이 핏자국이 있다. 푸른 수수대 안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수수는 우리 민족과 가장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곡식으로 고조선 시절부터 길렀다고 한다. 옥수수는 나중에 아메리카에서 들어왔으니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름부터 ‘옥 같은 수수’로 우리 민족과 궁합이 잘 맞았는지 강원도에서는 주곡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여름철에 찐 옥수수로 먹는 건 풋옥수수다. 풋옥수수를 따지 않고 놔두면 알이 단단하게 여문 옥수수가 된다. 이 옥수수를 거두어 강냉이도 튀겨먹고, 볶아서 차를 끓여먹고, 엿도 고아먹는다. 밥에 잡곡으로 놓아서 먹을 수도 있다. 알갱이가 다 영근 옥수수는 바싹 말라있어 무척 딱딱하다. 압력솥에 푹 삶아도 삶아지지 않고 터져 버린다. 이걸 먹으려면 맹물에 2~3일을 담가 충분히 불리면 된다. 이때 하루에 한 번 정도 물을 갈아준다. 옥수수 알이 물을 충분히 머금고 나면, 그러니까 4~5일을 불리면 옥수수 알갱이에 촉이 튼다. 발아를 하는 거다. 우리는 이렇게 옥수수를 발아시켜 밥에 놔먹는다.   
보통은 옥수수 알갱이의 껍질을 벗겨(이를 대낀다고 한다) 옥수수쌀을 만들어서 먹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옥수수 씨눈이 떨어져 나갈 확률이 높다. 아차차… 좋은 건 버리고 쭉정이를 먹는 게 아닌가. 그러니 껍질째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냥 먹자. 옥수수를 껍질째 먹으면 물론 거칠다. 발아시키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고 옥수수 배젖이 활성화해 우리 몸에 더욱 좋은 성분으로 바뀐다. 물론 그래도 거칠긴 거칠다. 하지만 참고 통째로 먹으면 입안에서 옥수수 알갱이가 톡톡 터지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순하고 고소해서 자꾸 먹고 싶은 수수부꾸미

비가 추적추적 와 쌀쌀한 날이면 기름에 지진 부침이 생각난다. 그때 수수를 갈아 부꾸미를 해 먹어보면 어떨까? 수수와 찹쌀을 4대 1로 섞어 씻어 물에 하룻밤 불린다. 체에 밭쳐 물기를 뺀 뒤 소금을 넣고 곱게 간다. 이 가루에 팔팔 끓인 맹물을 두어 숟갈 넣어가며 익반죽을 한다. 프라이팬을 달구고 들기름을 두른 뒤, 반죽을 동글납작하게 빚어 놓는다. 수수 반죽은 점성이 약하니 처음에는 얇게 하려고 하지 말고 두툼하고 자그마하게 빚어, 일단 한쪽 면을 노릇노릇하게 익혀야 한다. 바닥 쪽이 노릇노릇 달구어지면 뒤집은 뒤 호떡누르개로 눌러 납작한 부침 모양을 만든다. 그러면 노릇노릇 부쳐진 면이 모양을 잡아주어 부스러지지 않고 모양이 잘 잡힌다. 수수부꾸미는 따뜻할 때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부칠 때 가을에는 국화 꽃잎을, 봄에는 복숭아 꽃잎을 박아 넣으면 바로 화전이 된다. 


 열두 달 제철 식단을 모은
《신나게 만들고 맛있게 먹자》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펴냄)
좋은 먹을거리 자료집이 나왔다. 공동육아 영양교사 모임에서 만든 《신나게 만들고 맛있게 먹자》(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펴냄)이다. 여기 영양교사들은 직접 음식을 만든다. 고된 일을 하는 틈틈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한데 모여서 ‘열두 달 식단’을 꾸리고 자료집을 만든 거다. 공동육아 식단은 친환경 국내산 재료로 차려 낸 제철밥상인데 자세히 보면 밥이 날마다 다르다. 9월에는 강낭콩밥, 고구마밥, 기장밥, 팥밥….
아침에 일어나 무얼 해 먹을까 할 때, 대개 무슨 반찬을 할까라고 생각하지, 무슨 밥을 지어먹을까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 공동육아에서는 날마다 밥이 다르다. 더운 여름인 7월에는 통보리밥, 통밀밥, 감자밥, 기장카레밥, 추운 겨울인 1월에는 찹쌀밥, 수수밥, 기장밥, 녹두밥…. 공동육아 속 아이들이 “오늘은 무슨 밥이에요?”라고 묻는 모습이 떠오른다.
진수와 성찬이 주인공인 만화 《식객》에 보면 “밥상의 주인은 밥이다”고 했다. 밥에도 제철 밥이 있다. 가을에는 풋콩과 햇곡식을 넣은 밥, 추운 겨울에는 찰곡식을 넣어 지은 밥과 온갖 곡식을 한데 모은 오곡밥, 봄에는 봄 향기 가득한 쑥밥, 완두콩밥, 더운 여름에는 보리와 밀을 넣은 밥…. 밥상에도 계절이 있고 계절을 살리면 밥만 먹어도 맛있는 밥이 된다. 
이 자료집을 보고 영양교사 여러분들께 정말 수고했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졌다. 공동육아 어린이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밥상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을 했다고 말이다. 사회로 보면 학교 급식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 급식이 바로 서면 그 덕에 자라는 학생들 입맛이 바로 서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 밥상도 바로 서리라. 그래서 나는 학교 급식을 제철밥상으로 차리자고 주장한다. 전체 식단이 어렵다면 일주일에 하루는 제철밥상 먹는 날로 정하자고. 일주일에 하루지만 한두 달이 아니라 초등 6년, 중고등 6년 동안 제철밥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학교 급식이 바로 서면 시장에서 제철 먹을거리를 앞 다투어 대리라. 농부들도 석유를 많이 쓰는 시설 재배를 줄이고 하늘 아래 자연스런 농사를 늘리리라. 우리 몸도 건강해지고 이 지구도 건강해지지 않을까? 그 시작이 바로 공동육아에서, 책상물림이 아닌 직접 조리하는 영양교사들 손에서 이루어졌다. 이 식단이 공동육아를 통해 전국으로 그리고 여러 곳으로 퍼져나가기를!

 

글을 쓴 장영란 님은 무주에서 자급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떠가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씁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자연달력 제철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 먹어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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