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살림의 눈 ]

미안합니다 · 고맙습니다 · 사랑합니다

정리 편집부 사진 류관희

 미안합니다 · 고맙습니다 · 사랑합니다

 

 

 

1986년, 한살림이라는 이름을 짓고 작은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어 도시와 농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운 생명세상을 꿈꾸던 생명운동가 박재일 선생이 지난 8월 19일 새벽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묵묵히 한 길 걸으며 25만 세대 한살림 회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밥상을 차릴 수 있게하고 전국 2천여 세대 한살림 농부들이 자연과 조화로운 생명농업을 이어갈 수 있게 희망의 새 길 열어준 큰 농부였습니다.

 


 1969년 무위당 선생을 통해 자네를 만났지. 그리고 의기투합하여 원주를 중심으로 민초들의 삶과 환경을 개선해 보고자 농촌으로 광산으로 고단한줄 모르고 다니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현장에서 돌아와 오랜 회의를 끝내고 원주 남부시장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에 피로와 고달픔을 달래며 희망의 꿈을 키우던 때가 자꾸 떠오르네. 86년 자네가 한살림 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 제기동에 구멍가게 같은 ‘한살림농산’을 차렸던 때가 언제인가 싶은데, 한살림을 이제 20여만의 조합원과 3천여 농가를 아우르는 20대 청년의 늠름한 모습으로 키워 놓아 늘 친구로서 뿌듯함을 감출 수 없는데 이렇게 가버리다니…  
- 이경국 / (사)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어제도 그제도 저는 박재일 형을 생각하면서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찬을 먹었습니다. 한살림에서 배달해주는 채소를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먹게 하느라고 정작 박 형은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 이부영 / 전 국회의원

 

 

 

박재일 회장님의 영면소식은 우리를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지도자이셨고 동시에 친구이셨으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강인한 투사이셨습니다.
- 팔레스타인 농업부흥위원회

 


 

박재일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83년에 김영주 선생님,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이건우 선생님과 함께 가톨릭농민회 방문단의 일원으로 일본 효고현의 유기농업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저녁 친교 시간에 한국 여러분들이 힘차게 농민가를 부르고, 또 말술을 드시며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춤추는 모습에 또 놀랐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 이후 2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고베와 서울에서 교류를 다졌던 것은 저에게는 정말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엄격한 박재일 선생님은 저에게는 항상 형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조만간 고베에서 재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 정말 안타깝습니다.  
- 미천한 아우 야스다시게루 올림 / 일본 고베대학 명예교수

 


생명운동은 인류 최후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을 저희들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다짐합니다. 
- 일본 그린코프생활협동조합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그가 경북 안동에서 열린 집회에서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을 앞에 놓고 행한 열변을 나는 현장에서 들었다. “형제 여러분”이라는 그의 말문은 신앙 공동체에서 흔히 쓰는 것이지만 그때 거기서는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젊은 세대는 무실역행이란 표현이 고리타분하다며 그 실체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번드르르한 변설보다 실천을 중요시하며 그 일에 자신이 앞장서는 자세가 박재일이 보여준 것이라고 답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박재일의 뜻을 잇는 길은 더 많은 박재일이 젊은 세대에서 나오는 것이다.
- 임재경 / 언론인

 


 


仁農 박재일 선생의 생애
박재일 선생은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서울대학에 입학한 청년 박재일은 4·19혁명에 참여하고 1964년 굴욕적인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6·3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 평생의 반려인 이옥련 여사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요구에 반하는 한일협정이 비준되고 국민적 저항이 다시 번지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그를 연행해 혹독한 고문 끝에 구속시켰고 신혼의 아내가 첫 아이를 잉태한 채 그를 옥바라지 해야 했습니다. 감옥을 나선 뒤 박재일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1969년 강원도 원주에 내려가 사회개발위원회,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며 협동과 자조운동에 매진하며 우리 농업과 농촌 현실을 개혁하고자 힘썼습니다. 1980년대 이후 박재일은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등 원주지역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반독재민주운동을 넘어 시장의 논리와 산업주의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문명적 대안을 모색합니다.
1985년의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86년 12월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을 열었습니다. 박재일은 온 우주생명, 도시와 농촌이 모두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한살림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짓고 모심과 살림의 새로운 사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의 출발과 성장은 생명농업을 근간으로 도시와 농촌이 서로 협력하는 직거래운동을 확산시키고 우리밀살리기운동, 환경농업단체연합회의 결성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생활협동조합운동이 발전하는데 영향을 끼쳤고 친환경농업지원법 제정과 농림부에 친환경정책과가 설치되게 하는 등 우리 사회에 친환경농업에 관한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도록 기여했습니다.

 


1938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태어남
1959년 2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60년 3월  서울 문리대 지리학과 입학
1964년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김지하 등과 6·3 한일협정
 반대시위 주도. 계엄령으로 도피생활 시작
1965년 3월 이옥련 여사와 결혼
1965년 한일수교협정이 조인되고 반대시위가 격화되면서 구속됨
1969년 8월 김지하 시인의 권유로 원주로 내려가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진광중학교 영어교사가 됨 
1972년 8월 집중폭우로 남한강 일대 대홍수로 인한
 수재민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개발사업에 참여
1973년 가톨릭농민회에 참여
1982년 가톨릭농민회 회장
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 설립, 초대 이사장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 한살림농산 설립
1988년 2월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 3대 회장
 4월 21일 한살림공동체생활협동조합 설립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선언’ 발표
 ‘한살림모임’ 의장
1991년 11월 우리밀살리기운동 시작.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공동대표  
1994년 11월 환경농업단체연합회 결성, 초대 회장
1997년 10월 일본 그린코프생협과 북한동포돕기 성금을
 한겨레신문에 전달
2001 12월 아프카니스탄 전쟁난민 돕기 성금모금
2006 5월 한살림, 생명의쌀 기금 모금,
 북녘 고성군과 남한 사회복지시설에 전달
2009 4월 제13회 정일형 이태형 자유민주상 수상
2009년 1월 위암 발병으로 투병 시작 
 8월  일가상 수상
2010년 2월 한살림 명예회장
 8월 73세를 일기로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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