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사이살림 - 엄마하고 나하고 ]

어머니가 연출한 큰 무대 긴 공연

글 전희식

 

어머니가 연출한 큰 무대 긴 공연

 

그리고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강령을 모시게 기운을 보내셨다는 것을.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그 험악한 몰골로 피투성이 악역을 자처 하셨다는 것을. 어머니 혼자서 기획하고 혼자서 연출하신 무대. 어머니 혼자서 소품과 장치를 다 마련하신 무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아들의 뒤늦은 발견이었다. 그러고 보면 크고 큰 무대였고, 길고 긴 공연이었다.

 

 

지금 막 김인봉 선생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장수중학교 교장으로 2008년 일제고사 때 학생들의 체험학습을 승인했다는 이유로 중징계를 거푸 두 차례나 받고 법정 다툼이 진행 중이던 분이다. 집에 돌아오니 꼭 그 시간이다. 여느 날이라면 수도원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올 바로 그 날짜 그 시간이다. 일주일 일정으로 떠났던 천도교 강릉수도원의 동학 수련 도중에 선생님의 부음을 받고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2박 3일을 장례대책위원회의 소임을 맡아 장례까지 치르고 집에 돌아오니 그랬다는 것이다.
동학 수련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기도 중에 어머니 환영이 떠올랐다.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좀 힘들어 하고 계시는가 보다 하고는 얼른 환영을 책장 넘기듯 넘겼다. 연두색 또는 흰색의 옅은 점액질이 천지를 꽉 채운 기운에 내가 휩싸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강령을 모시기 시작했다.


천도교에서 강령은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는 징조로 본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 10시 경에야 잠드는 빠듯한 일정에 에어컨도 없이 한증탕 같은 무더위로 무척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날 나는 점심시간도 잊고 한참을 강령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강령을 모시게 기운을 보내셨다는 것을.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 그 험악한 몰골로 피투성이 악역을 자처하셨다는 것을. 어머니 혼자서 기획하고 혼자서 연출하신 무대. 어머니 혼자서 소품과 장치를 다 마련한 무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아들의 뒤늦은 발견이었다. 그러고 보면 크고 큰 무대였고, 길고 긴 공연이었다. 첫 무대의 장소는 집 앞 시멘트 골목길이었다.

 

“나 혼자 집에 버려놓고 어디 싸돌아 다니냐.”
동학 수련을 떠나기 사흘 전. 이날은 동네 대청소 날인데 작은 동네에서 조그마한 실수도 말들이 많고 흉들이 많아 동네일은 웬만하면 한 몫 더 하는 셈치고 무리를 해서라도 충실히 참석한다. 이날도 아침 일찍 예취기를 메고 쓰레기봉투와 낫까지 챙겨 동네길 양 옆 풀을 깎고 밭두렁에 버려진 농약병과 빈 페트병, 비닐조각들을 주웠다. 이러느라 너무 늦게 집으로 돌아온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11시 반경 동네 일이 다 끝나고 함께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나는 부랴부랴 그냥 집으로 왔다. 그러나 사건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나 혼자 집에 버려놓고 어디 싸돌아 다니냐”면서 차려 놓았던 밥상을 다 엎고는 마당까지 내려 와 계셨다. 휠체어에 태워 일단 밖으로 나왔다. 비탈진 아랫길로 가자고 하셔서 내려 가는데 어서 안 간다고 휠체어에서 막무가내로 뛰어 내리셨다. 누군가가 부른다고 하시는데 그 누군가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시멘트 길바닥을 맨손으로 짚어가며 엉덩이를 땅바닥에 밀고 가니 겉옷이 금방 닳아 구멍이 났다. 자동차가 오면 더욱 길 가운데로 나서면서 손을 들고 “나 좀 태워주소”라고 외쳤다. 정오를 넘긴 한낮의 폭염 속에서 자동차는 배기가스를 우리 얼굴에다 펑펑 내 뿜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당시의 내 당혹감과 절망이 되살아난다. 지금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어머니의 이 연극 작품(!)이다. 길바닥에서 거의 서너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완전히 지쳤지만 어머니는 잠시 잠잠해지다가도 다시 격앙되셨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나에게 행사하는 폭력과 폭언은 어찌나 그 기세가 험악한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이 내장까지 후들거리는 진동 심한 예취기 작업을 몇 시간이나 한데다 쫄쫄 굶은 채 무더위로 비지땀을 흘리고 보니 기력이 다 빠져나가 버렸다.
집에 돌아 온 게 오후 5시 쯤 되었을까. 어머니 뒤에서 눈에 안 띄게 움직이면서 위험요소가 생기면 제거하는 식으로 어머니 기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다가 얼른 어머니를 휠체어에 들어앉히고는 휠체어를 뒤로 완전히 제쳐서 어머니가 뛰어 내리지 못하게 하고는 한달음에 비탈길을 올라 집 마당까지 밀고 온 것이다.


휠체어를 뒤로 제쳐서 밀자니 허리를 반은 접은 채 움직여야 했고 힘이 몇 갑절 더 들었다. 어머니는 발버둥을 치면서 휠체어 바퀴를 거머쥐셨다. 어머니가 잠금장치를 당기면 휠체어가 기우뚱하며 엎어질듯이 위태했다. 한 손으로 바퀴 잠금장치를 풀고 다시 쉬지 않고 마당까지 올라와서 나는 털썩 주저앉았지만 어머니는 다시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밤 8시 넘어서까지였다. 나의 이런 고백들을 어머니가 아신다면 “누가? 찌랄하고 있네. 내가 언제?” 라고 하실 것이다.


세 시간 넘게 어머니는 온 마당, 온 마루, 집 뒤안까지 돌면서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깨고 두드리고 찢으셨다. 수돗가에 있는 플라스틱 비눗갑에서부터 옆방 바깥벽에 세워두었던 창틀 유리를 몽땅 깨뜨렸다. 부엌 뒤편에 보관해 두고 있던 저장식품들을 쓰러뜨리고 유리병을 깨뜨렸다. 간장양파절임과 마늘절임 병이 깨졌고 쏟아져 나왔다. 나는 어머니 눈에 띄지 않게 뒤처리를 해 나갔다. 물론 어머니 진행방향의 위험물체를 치우는 것이 먼저였다.


집에 와서 진행된 공연(!)이 제 2막이었다면 제 3막에서 피를 보게 되었다. 3막에서 드디어 나는 외부사람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고, 이것은 제 4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물을 데워서 수돗가 욕조에 채워 놓았던 나는 주도면밀하게 어머니를 욕조로 유인했다. 아주 가벼운 저항을 받았지만 지친 어머니를 성공적으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방으로 모셨다. 어머니와 거의 동시에 나는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방에서 나는 마루에서.


“이노무 집구석은 밥도 안 주나?”하는 고함소리에 벌떡 일어나 어리벙벙해 하는데 어머니 고함소리가 또 터져서 보니 밤 9시가 넘어서 있었다. 겨우 반 시간을 잔 셈이다. 5분 안에 맞춤 식단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는 초고속 상차림에 익숙한 나는 어머니가 변심하기 전에 밥상을 방으로 들이기 위해 두 몫 세 몫을 했지만, 밥상은 어머니 앞에 놓이기가 무섭게 뒤집혀졌다. 제일 먼저 방 유리창으로 날아간 국그릇이 박살이 났다. 뒤집어진 밥상에서 떨어진 반찬이랑 밥이랑 간장이 종이장판 위로 흩어졌고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이유는 한밤중에 뭘 먹느냐는 것이었다.


음식들을 치우다가 내 발바닥 두 군데가 사기그릇 파편에 찢겨 피가 나고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통증은 느낄 겨를이 없었고 방바닥에 찍히는 피 발자국을 보고야 알았던 것이다. 항복하는 심정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오후 내내 그 누구에게도 전화 할 곳이 없었다. 형제와 누이들을 먼저 떠 올렸지만 한사람 한사람이 여의치 않았었다. 아내는 나더러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어머니 눈에 띄지 말라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조언은 별로 유효하지 않았다. 이미 종일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앞서지만 피할 생각은 없다
다음날 아침에 제일 먼저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 4막의 시작이었고 어머니는 3막까지의 역할을 훌륭히 끝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여동생은 밤늦은 시각에 내 전화번호가 찍혀있어 전화했다며 걱정부터 했다. 도리어 내가 의아했다. 나는 전화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건 전화번호를 내 번호로 오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꼬치꼬치 캐묻는 동생에게 이제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 해결됐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해도 동생은 계속 캐물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오후에는 여동생을 통해 둘째형님에게 소식이 전해졌나보다. 이미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사건의 개요를 전해 들었던 것이다. 형님은 당장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틀 뒤 동학 수련 기간에 맞춰 와서 일주일 간 어머니를 봐 주면 좋겠다고 했다. 여동생은 그날 저녁에 200만 원을 내 통장에 넣었다. 일찍이 천도교 수도원 수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신청을 해 놨지만 참석 여부가 불투명했었다. 어머니를 돌봐 줄 형님의 일정이 예정대로 상황을 허락할지는 닥쳐봐야 할 일이었다. 빈 통장의 잔고도 사정을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도원에 들어갈 여의치 않았던 사정들이 한 순간에 다 해결된 것이다.


4년 전. 어머니 모실 준비를 다 끝내고 마지막 순서로 노인병원 돌보미 체험을 거쳐 천도교 화악산 수도원에 들어가 수련을 한 것이 계기다 되어 해마다 한 번씩 일주일 동안 수련을 해 오던 내가 이번 여름 수련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이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것이다.


여동생 이름으로 아내 통장에 100만 원을 넣고 김인봉 선생님 후원 통장에 거액을 넣었다. 나머지 돈은수련 참가 경비와 가난한 후배를 돕는데 썼다. 이렇게 200만 원을 신속히 내 통장에서 털어냈다. 김인봉 선생님 후원금은 조의금이 되어 버렸다.


김인봉 선생님 장례식을 잘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형님이 전해 준 이야기와 다음 사실들은 나 없이 진행된 공연이었다. 아내는 뒤늦게 통장을 정리하다가 시누이가 보낸  돈을 발견하고는 노발대발하여 (그런 동생을 둔)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 허락도 없이 돈을 송금한 시누이를 성토했고 내 통장으로 넣었으니 당장 돌려주라고 성을 냈다.


나 없는 동안 여동생 부부와 누님 부부가 와서 이틀 밤을 자고 갔는데 두 차례에 걸쳐 어머니가 역시 무시무시한 공연(!)을 하셨다고 한다.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했는데 “감자 캐 놓고 나락 방아 찧어 놓으니 처먹으러 몰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동생만은 곁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다들 혀를 내 둘렀다고 하니 애처로운 막내아들을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감싸주시지 않았나싶다. 계속될 어머니의 공연 작품들이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생각은 없다.

 

 

↘글을 쓴 전희식 님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지켜드리자는 생각에 전라북도 장수의 산골에 내려가 함께 살며 그 경험을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에 담았습니다. 극진한 보살핌과 자연 속의 삶과 노동으로 어머니의 건강이 놀랍게 호전되었지만 때때로 닥치는 시련들로 또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