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밥상살림-가까운 먹을거리 ]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 한국형 로컬푸드 운동을 시작하다

글 김현경 편집부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
한국형 로컬푸드 운동을
시작하다

 

 

2010년 7월말. 모스크바가 위치한 러시아 중서부에 산불이 발생했다. 섭씨 40℃를 웃도는 최악의 폭염과 가뭄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이 산불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서울 면적의 2배 이상을 집어삼켰다. 러시아 정부는 산불 진화에 온 힘을 다하면서 동시에 대재앙에 대한 전방위적 대처방안을 빠르게 내놓았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밀을 비롯한 곡물의 수출 중단 선언이었다.
세계 최대의 밀 생산국, 러시아의 이 같은 선언을 뒤따라 대표적인 옥수수 수출국이었던 중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옥수수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예견되었던 러시아와 중국발 곡물 파동은 곧바로 곡물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8월초 상품 투자의 귀재라는 짐 로저스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 곡물 가격은 몇 년에 걸쳐 더욱 상승할 것이라며 “대비하라, 앞으로 가격이 더 오를 것이므로 집에 설탕 단지가 있다면 지금 가서 단지를 채워두라”로 조언했다. 짐 로저스의 ‘코칭’을 따르듯 국내외 금융 시장에서는 2008년 곡물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투기성 유동자금이 농업 분야로 빠르게 선회하고 있다. 인류가 감당하기 어려운 식량 위기의 현실 앞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먹고 사는 걱정’보다는 ‘돈 벌 기회’를 먼저 쫓는다. 그러나 식량에 대한 주도권을 ‘돈놀이’와 맞바꿀 때,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먹고 사는 일은 더욱 힘들어진다. 세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지역 자립형 식량체제를 구축하자는 시민운동은 식량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어렵게 되살린 우리밀을 지켜라
밀은 전통적으로 쌀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주요 식량 중 하나다. 그런데 80년대에 우리나라 밀 시장이 해외에 완전 개방되고, 잇따라 정부 수매도 중단되면서 밀농사에 위기가 닥쳐왔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수입밀에 떠밀려 우리밀은 맥 한번 추지 못하고 종자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와중에 식생활은 더욱 빠르게 변해 밀에 대한 수요는 쌀 시장을 위협하며 급속도로 늘어나 1990년대 초반에 밀 자급율 0%에 달하게 되었다.


우리밀뿐만 아니라 당시 농촌 현실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대표되는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생존 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잊혀졌던 우리밀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식량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점에 달했을 때였다. 1990년 경남 고성에서 한살림 생산자들이 처음으로 토종 종자를 어렵사리 구해 파종했다. 이듬해 우리밀을 수확해 마을에서 동네잔치를 열었는데 이것이 농민 운동가들을 거쳐 도시민들에게 알려졌다. 1997년까지 16만여 명이 36억 원을 출자해 국민운동으로까지 성장한 ‘우리밀살리기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은 당시 농협이 주도했던 ‘신토불이’ 운동과 함께 우리 농산물, 지역 농산물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우리밀 첫 수확 마을잔치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밀은 전국으로 재배지를 빠르게 늘려 올해 약 3만5천 톤을 거두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와 생협, 농민 단체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 이제는 시민운동 차원을 넘어 우리밀의 시장경쟁력에 주목한 대기업과 지자체들까지 나서면서 우리밀의 입지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밀 자급율은 1.5% 안팎. 정부는 2017년까지 자급률을 10%까지 높인다는 목표를 설정해 두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시장은 커졌지만 역설적으로 그 원인은 국내가 아니라 애그플레이션 등을 유발하는 세계 곡물 시장의 영향력이 높아진 데 있다. 기업들은 경제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업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지역 식량 지키기는 뜻을 함께 하는 시민들에 달려있고, 여기에 정부가 어떤 자세를 보이는가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국내산 친환경 농산물을 공급하는 생협 매장

 

생협을 통해 지역을 만나다
우리나라의 생활협동조합은 1979년 강원도 평창에서 신리소비자협동조합이 창립된 것을 최초로 따진다면 이제 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게 됐다. 유럽이나 일본보다 뒤늦게 출발하여 초기에는 이들 나라의 경험과 운영시스템을 도입했지만 1986년 한살림이 설립된 이후부터  친환경농산물 직거래와 지역성에 기반을 둔 도농교류 등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생협 모델과 그 역할을 스스로 정립해왔다. 농산물 시장 개방과 식품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생협들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지역 농업을 떠받드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생협들은 양적인 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여전히 국내산 친환경 농산물 공급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 국내 식량 자급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한살림은 ‘가까운 먹을거리’ 운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역 자립형 식량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쌀 등 주요 식자재에 대해 수입산과 운송 중 온실가스 배출량을 비교해 표시하면서 지역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일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자칫 ‘유기농 보신주의’에 힘입어 수입 유기가공식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탓에 가까스로 다져온 국내 친환경 농업 기반이 흔들릴 처지에 놓여있는 점을 떠올리면 ‘가까운 먹을거리’ 운동이 지금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전국적 조직과 일원화된 물류 체계를 갖춘 생협에 대해 엄밀히 따지면 이는 지역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지만, 한나절이면 어디든 가 닿을 수 있는 좁은 국토와 수도권에 인구 절반 이상이 몰려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국내에서 생산된 것은 모두 지역 먹을거리로 봐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또한 로컬푸드로 일컬어지는 지역 먹을거리가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생산자, 소비자 사이의 사회적 거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농 직접 교류를 중시하는 생협들이 지역 식량 체제를 다져온 일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지역 친환경 농산물 지키기에 학교급식이 한몫

 


우리나라에서 학교급식운동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학교급식의 운영과 관리에 대한 권한을 학교 측이 전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가운데 수익성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급식업체들 때문에 식중독 사고와 질 낮은 급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또한 학교급식 위탁이나 식자재 납품 등을 둘러싼 복잡한 이권 관계와 비리 등이 속속 드러나면서 시민들을 중심으로 개혁의 요구가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2002년부터는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나 ‘안전한 학교급식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등이 결성되어 본격적으로 건강한 학교급식을 위한 시민운동이 시작되면서 지자체마다 학교급식지원조례가 마련되게 하는 성과를 얻었다.


질좋은 밥상차림을 위해 학교급식운동이 국내산 친환경 농산물을 내세운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지역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 계기는 ‘우리 농산물’을 급식 조례에 명기하면 WTO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지자체들이 조례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강원도 원주에서도 2007년 원주 지역 시민단체들이 조례 개악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동시에 대안으로 ‘로컬푸드 육성’을 원주시에 제안했다. 도농 복합 도시인 원주시는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학교급식이 지역 식량 자급 체제를 구축하는 데 명확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2008년에는 원주생협, 한살림원주 등 5개 단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친환경급식지원센터’를 설립해 농촌지역 내 어린이집, 유치원, 중학교, 상지대 등에 원주 인근의 친환경 쌀을 공급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 올해는 180여 톤의 친환경 쌀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또 이밖에도 원주에서는 이를 계기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되어 직거래로 유통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원주푸드’ 육성에 지자체와 시민단체가 함께 힘을 모으고 있다. 학교급식이 지역 자립형 식량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비단 급식을 통해 소비되는 지역 농산물의 양이 늘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지역의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제 고장에서 난 친환경 농산물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더 좋은 음식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식량 주권에 대한 인식을 키울 수 있다는 점도 학교급식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한편 농촌진흥청에서는 최근에 발표한 ‘지역농산물 연계 학교급식시스템 연구’에서 지역 내 농산물을 이용하는 학교급식이 과일 제공 빈도가 3배 더 높고, 액상 과당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음료를 더 자주 제공하는 등 보다 바람직한 식단을 제공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학교 급식에 사용되는 지역 농산물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만나보았습니다


강원도 원주 친환경급식지원센터
조세훈 사무국장

 


지역의 친환경농산물이 지역 내 소비로 연결되도록 하는 작업을 위해서는 학교급식이 계기가 됐지만 그 외에도 ‘유기농 보신주의’와 지역 사회 기여에 대한 생협 단체들의 성찰도 그 배경이 되었습니다. 생협이라는 곳이 아무래도 조합원들 중심으로 운영되다보니까 일반 시민들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이 협소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원주 지역 협동조합들이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역 사회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로컬푸드 운동을 펼치게 됐습니다.


지역 친환경 농산물을 우선으로 하는 학교급식 조례나 원주푸드 육성, 농민장터 지원 등 원주가 비교적 순탄하게 로컬푸드 확산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된 점은 여러 시대적·환경적 영향이 컸습니다. 지역 농산물의 당위성을 좀더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게 되자 이와 관련된 사회적 기업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살림원주가 지원하고 있는 ‘횡성텃밭두부’나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떡집 ‘행복한 시루봉’ 등이 그 예가 되겠고요.


지금까지는 로컬푸드 육성의 조건들을 만들어나가는 단계였다면 이제 앞으로는 그 내실과 성과를 만들어 나가야하는 단계라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 주체자인 농민과 소비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각각의 역할을 좀 더 강화해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안착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지자체의 역할도 굉장히 중요한데요, 이러한 거버넌스 운동이 로컬푸드 시민운동을 더욱 완결성 있게 추진해나가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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