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특집] 집. 사다, 살다, 짓다

[ 집 생각 ]

사람들은 집을 나와 길 위에 있다 - 안홍범이 찍은 집과 사람 풍경

글 안치운


사람들은 집을 나와
길 위에 있다

안홍범이 찍은 집과 사람 풍경


그동안 길과 집과 사람들에 대해서 산문들을 써왔다. 그것은 생의 순명한 원형을 찾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익을 위해서는 무조건 삶의 근간을 파헤치고 도려내는 오늘날, 살 곳이 없고, 갈 곳은 더 없다. 오래된 길은 매일 신작로가 되어 사라지고, 숨 쉬고 있는 옛집은 부수어지고, 사람들은 쫓겨나서 떠돌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해서 가짜 선진국이 된다. 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고향을 독일어로 하이마트(Heimat)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같은 발음을 지닌 대형 매장을 고향처럼 가고 있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집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대형 마트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삶과 집의 뒤엉킴과 결별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사진작가 안홍범의 사진전이 지난 5월 중순에 서울 종로구 통의동 ‘류가헌’에서 있었다. 전시장이 사는 집과 가까운 곳이라서, 그곳에 자주 들러 사진들을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의 사진들은 집과 집 바깥의 풍경들을 통째로 담고 있었다. 그럴수록 사진들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눈으로 사진을 읽는 일이 멀리서 혹은 다가가서 집을 보는 일과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홍범의 사진 속 풍경들은 집과 같이 이것저것 품어 안고 있는 것이 많았다. 사실 사진작가들의 사진들도 집 안 혹은 집 바깥이기도 하고, 이 둘을 모두 아우르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주제를 집약하면 집과 길 그리고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규철, 공수정, 박정훈, 이갑철, 한금선 등의 사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이라고 발음하면 종성인 ㅂ으로 인하여 두 입술이 닫혀진다. 입 안에는 빈 공간이 생기고, 그것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어둠과 밝음의 대비로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를 담아내고 있는 사진은 그것대로 닫혀있되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는 집과 같다. 집에 관한 사진은 작가가 집에 가까이 혹은 거리를 두는 것에 따라서, 집과 배경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 정체성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집은 삶을 품는 곳이기도 하고, 삶을 바라다보는 눈과 같기도 하다. 사진을 눈이라고 한다면, 집도 삶을 품고 삶을 드러내는 눈과 하등 다르지 않다. 추운 곳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얼음 바다 속 물개들이 숨쉬기 위해서 뚫어놓은 구멍을 눈이라고 말한다. 너른 바다가 얼음 속에 있고, 그 구멍은 바다와 세상이 만나는 접점이며 통로이기도 할 터이다. 집도 세상을 향해서 열리고 닫히는, 크고 작은 문들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문은 사진기의 조리개와 같은 눈으로, 뭔가를 찾고 말하기에 앞서는 집의 숨구멍이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작용은 집의 숨쉬기와 같다. 얼음 속에서 얼음 바깥으로의 분리, 집 안에서 집 바깥으로 그리고 그 반대로 이어지는 분리와 연장의 흔적은 애써 기억하는 즐거움과 집 떠난 괴로움의 기억을 낳는다. 그 끝은 침묵하기 일 터. 그때 두꺼운 집과 얇은 사진은 소리없는, 침묵하는 아우성이 된다.
 

사진작가 안홍범도 집을 나와 길 위에서 산다. 멀리 가는 것을 두려워하면 사진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아는 것 같다. 가출 혹은 출가라고 하는 것처럼, 깨달음은 언제나 집으로부터 출발한다. 집 바깥에서 비로소 집이 보이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몸은 사진기의 몸통처럼 닫혀있기 마련인데, 이는 몸에서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면, 곁눈을 잃게 되어 더 깊은 곳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진은 빛(photo)의 글쓰기(graphy)인데, 풀어 쓰자면, 빛으로 끌어들여 몸에 새기는, 숨 가쁜 고통의 흔적이다.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그는 넋 나간 모습으로 고통받고 있는 대상을 쳐다본다. 그것들은 길과 집 그리고 사람들이고, 그 사이에 있는 풍경들이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우리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집들이 삶처럼 참 힘들고 서글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진 속, 우리가 원초적으로 기억하는 집과 고향에 대한 현실은 부재한다. 하여 그의 사진은 집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그가 기억하는 집 밖, 길 위의 풍경들은 가령 이렇다. 태초에 사람이 있었고, 집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집이 텅 비어있다. 사람들은 집을 나와 길 위에 있다. 사람이 집에 있지 않다는 것은 집에 있을 수 없다는 외부의 탓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집이 집다운 격을 잃어버려 삶이 그곳에 있을 수 없다는 저항의 의미이기도 할 터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집을 나온 나그네들이다. 집은 더 이상 삶이 거주하는 공간이 아닌 셈이다. 집의 원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사진 속, 집들이 집답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집들은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집과 집이 이루는 공동체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길 위에 휑하니 있다. 길 곁의 집들은 작고, 사람이 들어있지 않은 집들은 희미하다. 홀로 남겨진 집의 시선은 쓸쓸하게 고정되어 있다. 반면에 가출한 이들의 시선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다. 집을 뛰쳐나온 실향민, 뜨내기들은 가늘고 여윈 나무같이 여위었고, 집에 등 돌린 채 걷고 있다. 나는 이 풍경이 하염없어 사진을 보면서 소외된 그들과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한참 걷고 나니 이른 곳이 고개 위, 고개만 돌린 채 노인과 어린아이는 잠시 멈춰 서로 힐끗 본다. 집들은 이제 사람들의 시선에서조차 멀어져 있다. 사람들이 억압하는 세상으로 조금 비켜 서있는 곳에 이르니 겨우 제 곁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쪽으로 내려앉은 저울추처럼 세상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집에서 멀어지자 풍경은 커졌고, 사람은 더욱 작아졌고 제 모습을 잃기 시작한다. 그 정점은 대낮에 아무데서나 낮잠을 자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해질녘 물길을 가르는 노가 되는 사물화된 풍경이다.
 

집이 아예 눈에서 멀어지자, 한 때 집에 거주하던 사람의 얼굴이 사라지고 짐승의 거죽을 지닌 남루한 맨 손과 같은 형체만 남았다. 사라진 몸뚱어리는 텅 빈 하얀 고무신에 담겨있다. 목과 얼굴이 사라진 채, 두 다리만이 제 그림자와 함께 맨발로 걷고 있다. 이제는 실체가 아닌 그림자 속, 그곳에 제 얼굴은 없다. 형체가 있는 얼굴은 온통 검은 실루엣으로 지워졌다. 풍경의 앞은 어둡고 그 뒤는 조금 밝다. 사람들의 남은 형체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오늘날 그가 사진으로 표현하는 집과 삶의 실체일 터이다. 집이 사라지고,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존과 공생이 불가능한 폐쇄된 사회 모습들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이 때 보태진다. 집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 얼굴을 지닌 석상이 실쭉 웃고 나타났다가 이내 거꾸로 땅에 처박혀 누워있다. 무관심과 방관의 극치인 셈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한 탓일까? 사람들이 떠난 후, 사람과 더불어 살던 개와 소 같은 가축도 빈 집을 나와 길 위에 지쳐 누워있거나, 제 몸의 반쯤 혹은 꼬리만 나무의 여린 줄기처럼 남아있다. 깊은 산 속에서 웃자란 나무들은 잘려서 산판 ‘도라꾸’에 가지런히 실려 산모퉁이를 빠져 나간다. 그 언저리 하늘을 날던 가벼운 새가 물 위에 앉는다. 발자국, 물결로 가늘게 퍼진다. 하여 산에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마지막 대사인, 나무만이 살아있다.
 

작가가 사진으로 포옹하는 것은 맨집, 맨사람, 맨얼굴, 맨주름, 맨하늘, 맨물, 맨돌, 맨그늘, 맨구름, 맨그림자, 맨다리, 맨머릿바람, 맨가슴, 맨발, 맨손, 맨땅, 맨산, 맨길뿐이다. 그의 사진은 맨정신, 맨눈으로 집과 자신 앞에 놓인 풍경에 복종한 산물이다. 그의 사진은 소리로 치면 저음이고 성분으로 보면 가출이다. 그의 사진들은 집 떠나 길 위를 떠도는 이들의 소리와 풍경을 담으면서 한 번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소리와 풍경으로 집 안과 바깥을 조명할 뿐이다. 세상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집과 사람들을 일체의 수사학을 버린 채 움켜잡는다. 집 떠난 이들의 도망자의 자유나 쫓겨난 자들의 비애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의 사진들은 겉과 속이 통째로 명백하다. 집이 허하기 때문일 것이고, 집 안의 삶이 집과 조응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나아가 집이 집답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끝은 집에 거주할 수 없는 삶, 그 부박한 삶이 될 것이다. 그 탓이 무엇 때문인지를 묻는 일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제부터 집과 삶의 원형을 기억하고, 향수하는 일 뿐이다.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 중심에 집과 길과 사람이 있다.

 



집은 삶을 품는 곳이기도 하고,
삶을 바라다보는 눈과 같기도 하다.
사진을 눈이라고 한다면,
집도 삶을 품고, 삶을 드러내는
눈과 하등 다르지 않다.

 

↘글을 쓴 안치운 님은 호서대학교 연극학과 교수이면서 연극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연극뿐 아니라 산과 길과 집 사이를 걸으며 ‘살며 여행하며 공부한’ 이야기들을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길과 집과 사람사이》, 《시냇물에 책이 있다》 같은 산문집으로 펴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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