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특집] 집. 사다, 살다, 짓다

[ 여는글 ]

돈을 불리는 집, 아이를 기르는 집

글 현병호 일러스트 이현우

 

어느 재개발 지구 아파트 공사장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사고파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사실 아파트는 사고팔기가 수월한 점에서 부동산이 아니라 거의 동산(動産)에 가깝다. 채권보다도 환금성이 높다. 사람들은 집에서 사는 일보다 집을 사고파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가구당 이사 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파트라는 이 상품에는 브랜드도 붙어 있다. 브랜드와 평수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오늘날 아파트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의 가치를 재는 잣대처럼 통하고 있다. 대학졸업장이 그러하듯이. 학력과 학벌처럼 아파트 평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존심의 근거가 된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같은 광고 멘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파를 타는 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졸업장이 교육의 질을 보장하지 않듯이 아파트 평수가 삶의 질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쓸모없는 공간의 쓸모
아파트는 공간의 효율을 극대화한 주거 형태다. 아파트에는 쓸모없는 공간, 비어 있는 공간이 없다. 후미진 뒷마당도 다락도 없다. 다용도실이 있지만 거기엔 이미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어 숨어 있을 공간이 없다. 한마디로 아파트에서는 숨바꼭질 놀이를 할 수 없다. 숨바꼭질은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체험을 하게 해준다. 숨을 곳,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의 깊은 곳에 가 닿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숨을 곳이 없다. 기껏해야 화장실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게 고작이다. 
요즘 아이들은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다. 낮 시간의 거의 대부분은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는 데 보내고 있고, 중고등학생들은 밤에도 학원을 전전한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집에서는 밥상머리 교육도 이루어지기 어렵다. 아이들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학교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점점 많은 이들이 홈스쿨링을 대안으로 선택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집은 교육공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시의 주거환경에서 홈스쿨링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부모가 웬만큼 지혜롭게 처신하지 않고는 아이들과 잘 지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숨어 있을 곳이 없는 아이들은 집을 나가기도 한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사실상 집보다 바깥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학원을 뺑뺑이 돌면서 부모의 시선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억지로라도 책을 붙들고 강의를 들으면서 불안감을 달랠 수도 있다. 집보다는 바깥이 확실히 숨을 곳도 많다. 익명성을 보장하는 도시는 그 자체가 숨을 곳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면 자기 방문을 잠그고 홀로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숨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외부와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에 가깝다.
일본에 비해 학교 교육 상황이 결코 좋지 않은 한국에 히키코모리(칩거) 사례가 적은 것은 가옥 구조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히키코모리하는 아이들은 자기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달아나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히키코모리의 양극단에는 가출이 있다. 한국에서는 히키코모리보다 가출하는 청소년들이 훨씬 많다. 20~30평(66~99㎡)대 아파트의 자기 방에서 장기간 두문불출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의 경우는 2층 단독주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집 구조도 숨을 곳이 많은 구조이다. 가출은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아예 세상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은 영혼의 안식처이기보다 음습한 곳이기 십상이다.
문이 언제나 열려 있어도, 또는 뒷마당같이 아주 열려 있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거저 홀로 있을 수 있는,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존재의 심연 속으로 잠길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하고 건강하게 해준다. 다락방, 헛간, 뒷마당같이 별 효용성 없이 늘 비어 있지만, 쓸모없음의 가치를 지닌 공간은 아이들에게는 창의성이 꽃피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놀이를 하면서 또는 공상 속에서 그 공간은 무한히 다른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의 가치에 새삼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요즘 아이들의 삶에서 공간만 그렇게 효용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공부를 마치고도 학원을 몇 군데나 뺑뺑이 돌아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텅 비어 있는 시간이 없다. 아이들이 멍하니 있는 것을 어른들은 못 참는다. 노는 것도 겨우겨우 봐준다. 빈틈없이 빡빡하게 기획되어 있는 시간 속에는 상상력이 숨 쉴 틈이 없다. 창의성도 주체성도 생겨나기 어렵다. 시간을 스스로 꾸려보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갈 힘이 없다. 텅빈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끊임없이 어딘가로 도피하기 마련이다.
현대물리학에서 공간과 시간은 같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공간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이는 생활영역에서도 통하는 원리일 것이다. 아파트 공간은 거기에 어울리는 시간을 조직해낸다. 시골집의 시공간과 아파트의 시공간은 분명히 다르게 움직인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시간과 빌딩 속에서 느끼는 시간은 다르다. 건축가는 공간과 더불어 시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필요가 있다. 분절된 공간은 분절된 시간과 함께 움직인다. 학교의 공간과 시간도 마찬가지다. 교실이 칸칸이 같은 규격으로 나누어져 있듯이 시간도 그렇게 나누어져 있다. 과목도 분절되어 있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삶과 동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육의 질은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교실 안에 첨단 컴퓨터를 들여놓고 온갖 기자재를 동원해서 수업을 한다 해도 만남이 없는 교육은 공염불일 따름이다. 진짜 만남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간과 교육과정을 디자인해야 한다. 모든 만남은 결국 자기자신과의 만남으로 통한다. 수업 시간에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가 있다면 그 순간 아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존중할 수 있는 여유와 통찰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렇게 멍하니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야말로 학교가 갖춘 가장 훌륭한 교육시설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진짜 교육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의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옆집 아줌마’를 만나지 말아야 할까?
사람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관계의 집합체이듯, 집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결정체다. 단독주택도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또는 자연이라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성에 주목할 때 집이 갖는 속성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골에 있는 집들은 마을 속의 집이다. 설령 외딴집이라 할지라도 외딴 존재로서 마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기 마련이다. 작은 읍내의 경우도 마을 개념이 살아 있어 집들이 동네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골이나 작은 읍내의 단독주택들은 대개 마루를 끼고 안팎으로 열려 있으며, 시골의 경우는 담장이 낮고 허술한데다 대문조차 잘 닫지 않아 마을과 집의 경계도 열려 있다.
도시에도 집들이 모여 있지만 대문을 열어 놓고 지내는 집들은 거의 없다. 신도시에 새로 지어지는 집들은 좀 다르지만, 도시의 단독주택들은 하나같이 담장이 높고 대문도 크고 위압적이다. 마을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아파트와 별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더 고립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파트 단지든 단독주택 단지든 도시에서는 더 이상 마을이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 아마도 학원이 키운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도시의 마을에서는 아이들을 함께 기르기보다 서로를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 여긴다. 여기에는 아파트 중심의 주거문화가 한몫 할 것이다.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택의 52.7%가 아파트다. 대도시의 경우는 60%를 넘는다. 아파트 문화는 이중성을 띤다. 벽을 서로 맞대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독립성과 익명성을 보장되기도 하지만,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같은 광고카피가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다. 집 평수에 따라 자존감의 평수가 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비슷한 평형대의 아파트에서도 서로 끊임없이 눈치보고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몇 해 전 격월간 대안교육잡지 《민들레》에서 ‘옆집 아줌마를 조심하세요’라는 주제로 엄마들과 좌담을 한 적이 있다. 교육 강좌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래 이거야, 흔들리면 안 돼!’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옆집만 놀러갔다 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다는 어느 엄마의 고백에서 기획된 자리였다. 어떤 엄마의 말처럼 ‘반상회’야말로 우리 교육을 망치는 주범일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 콤플렉스’를 호소하겠는가.
아파트라는 주거 환경이 경쟁심을 부추기면서 우리 사회의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옆집 아줌마를 만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옆집 아줌마를 조심해야지 하는 나도 또 한 사람의 옆집 아줌마가 아닌가? 언제나 두리번두리번 남들은 어떻게 사나 눈치보다 구덩이에 빠지고 엎어지는 것이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고개를 가로젓게 되지만, 하늘 보고 자기를 바라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 수 있다고. 긍정적인 삶은 자기성찰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세상의 1% 운운하는 텔레비전 광고를 비롯해 온 세상이 나서서 두려움을 부추긴다 해도, 경쟁심과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나 자신 속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올바른 자기성찰은 자연스럽게 변화를 낳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주위로 퍼져간다. 그럴 때 옆집 아줌마는 함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동지가 될 수도 있다. 공동육아, 품앗이 방과후, 대안학교들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경계해야 할 옆집 아줌마를 동지로 만들기. 함께한다면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내 안의 두려움도 좀더 쉽게 이겨낼 수 있다. 대안적인 교육이란 결국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교육을 지향하는 것 아닐까. 삶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교육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 함께 풀어간다면 희망이 보일 것이다.

 

글을 쓴 현병호 님은 대안교육잡지 <민들레>를 만들며, 학교 울타리 안팎에 구애됨 없이 올바른 길을 찾는 모든 배움의 열정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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