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살리는 이야기 ]

바이티카, 누이가 내리는 축복의 꽃비

글 사진 김홍성 편집위원

바이티카, 누이가 내리는 축복의 꽃비

 

바이티카는 큰누나가 남동생들의 무병장수를 빌어 주는 힌두 전통 의례이다. 양력 10월 하순이나 11월 초순에 들어 있는 티하르 명절의 맨 마지막 날에 집안에서 행한다. 2008년 티하르 무렵 약 3주 동안 네팔 히말라야 산기슭을 걷던 중에 네레바잘의 한 주막집 식구들과 명절을 함께 보내며 바이티카를 지켜보았다. 이들에게 큰누나의 역할은 어머니에 버금가는 것 같았다. 흐뭇한 감동을 느꼈다.

 

줄리 구릉이 남동생 사전에게 바이티카를 해 주고 있다.

 

네레바잘로 가는 길은 마을과 외딴집과 경작지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마을마다 술을 내리고 절구질을 하고 금잔화 꽃을 따서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네팔의 명절 티하르 기간 마지막에 행하는 전통 의례인 바이티카가 다음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숙소로 삼은 주막집 형태의 작은 식당에는 명절을 맞아 일곱 식구가 모여 있었다. 퇴역 군인인 아버지, 가녀린 몸매의 낙천적인 어머니, 그리고 딸 넷과 막내아들이었다. 다섯 자녀들은 모두 네레바잘에서 도보로 네 시간 거리에 있는 살레리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장녀 줄리 구릉은 스물두 살, 솔루쿰부 멀티플 캠퍼스라는 대학에 다니며 솔루 FM 라디오 방송국 리포터도 겸한다고 했다. 스무 살 키란과 열여덟 살 사리따는 11학년, 열여섯 짠다는 8학년, 그리고 열네 살 먹은 막내아들 사전은 9학년이었다. 다섯 자녀 모두 살레리로 유학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복한 가정이었다.

 

 

자갓 바하둘 구릉 부부와 그들의 1남 4녀. 바이티카를 시작한 티하르 명절의 오전. 

 

날이 어두워질 무렵부터 장마당 여기저기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매단 오색 전구가 빛을 발하고 카세트 오디오 볼륨을 한껏 높인 가운데 군무를 추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어린이들, 남정네들, 부녀자들 모두 늦도록 떠들썩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의 바이티카는 조용히 진행되었다. 바이티카는 누나가 남동생의 무병장수를 빌어주는 정성스런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장녀 줄리는 막내 사전과 가족 같은 이웃 남동생들의 바이티카를 위해 며칠 전부터 노란 금잔화 꽃과 보라색 비텔넛 꽃을 따 모으고 절구질로 찧은 쌀로 만든 로티(도넛 형태로 튀긴 쌀 과자)를 튀겼다. 로티는 줄리로부터 바이티카를 받기 위해 집에 찾아오는 이웃 남동생들 등 손님에게도 고루 대접해야 하기 때문에 100개 이상 튀겼다. 키란과 사리타 등 여동생들이 언니 줄리를 도와 절구질을 하고 로티를 튀겼다. 꽃목걸이를 만들고, 감자를 깎았다. 의례에 쓸 꽃도 많이 따 모았다. 따 모은 꽃이 모자라면 장에서 사오기도 한다. 의식을 준비하는 누나들은 바이티카를 마치기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11시가 되자 줄리는 응접실을 겸하는 식당의 진열장 선반과 시바 신을 모신 선반 주변을 꽃과 향과 촛불로 장식하고, 문지방에는 붉은 흙물로 문양을 그렸다. 그리고 문양 가운데 초를 놓고, 주변에는 꽃잎을 수북이 얹었다. 그 사이 키란과 사리타 등은 식당 바닥에 기다란 멍석을 펴고 멍석 위에는 카펫을 깔아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이렇게 바이티카 준비가 끝나자 외아들이자 막내인 사전이 깨끗한 옷을 입고 나타나 신을 벗고 자리에 반가부좌로 앉았다. 줄리는 동생 앞에 꽃 접시를 놓고 가운데 놓인 초에 불을 붙였다. 심지에 불을 붙여서 그 불로 동생의 온몸을 씻기는 시늉을 한 후 꽃 위에 놓았다. 그 다음에는 동생의 머리 위에 꽃잎을 수북이 얹어놓고서 머리 위로부터 꽃잎을 비처럼 흩뿌렸다. 그리고 보라색 말라(꽃목걸이)와 노란 금잔화 말라를 동생 목에 걸어주었다. 그 다음에는 제3의 눈이 있는 자리라고 하는 미간에 찐득한 더히(요구르트)에 갠 흰 염료를 찍고, 그 위에 붉은 염료를 찍고, 다시 노란 염료를 찍었다.

 

티카란 바로 이렇게 이마에 점을 찍는 의식인데, 동생에게 한 컵의 더히를 직접 먹여주고 로티가 든 접시를 손에 들려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줄리의 바이티카가 끝나자 사전은 누나 발등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감사를 표한다. 얼마간의 돈이 든 봉투도 누나에게 바친다. 줄리는 여동생들도 사전 옆에 나란히 앉히고 같은 의식을 되풀이했다.

 

이웃사촌이라 했던가. 동네 남동생들에게 티카를 해 주는 줄리.

 

줄리는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에게도 티카를 해드렸다. 동생에게 한 것 같은 절차는 생략하고 티카만 한 후 목에 말라를 걸어드렸다. 식구끼리의 티카가 끝나자 친척 동생이나 동네의 동생 친구들이 찾아왔다. 줄리를 ‘디디(누나 또는 언니)’라고 부르는 모든 동생들이 다 오는 것 같았다. 줄리는 이들에게도 친동생 사전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티카를 해주었다. 그리고 더히와 로티, 바나나, 감자, 호두 등이 담긴 접시를 돌려 대접했다. 이들도 사전처럼 줄리의 발등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감사를 표하고 돈이 든 봉투를 바친다.

 

이렇게 티카가 완전히 끝나면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줄리는 아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십 리 밖 산비탈에 사는 작은아버지 티카를 아직 못했기 때문이다. 병이 들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줄리가 직접 찾아가서 티카를 해드려야 한다. 줄리는 둘째 여동생 사리타를 데리고 작은아버지 집을 찾아갔다. 줄리에 의하면, 바이티카의 기원은 동생을 데리러 온 염라대왕을 누나의 기지로 속여서 그냥 보냈다는 힌두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동생이 아니라 어른이라도 찾아가서라도 바이티카를 해준다고 했다.

 

줄리의 아버지 자갓 바하둘 구릉은 퇴역 군인이다. 소년시절 인도군 용병으로 입대하여 청춘을 바친 덕분에 매달 연금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식당 2층 큰 방 장식장에는 인도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사진이 붙어있고 가족사진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 있는 오래된 흑백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자갓 바하둘 구릉이었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부대 마크와 훈장을 단 군복에 공수병 베레모를 쓴 자갓 바하둘 구릉의 얼굴은 막내아들 사전의 형처럼 앳되었다. 키도 아주 작았다.

 

자갓 바하둘 구릉은 예순 번 이상 낙하산을 펼친 경력이 있으며, 스리나갈이나 나갈랜드 등 충돌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배치되어 전투를 경험한 직업 군인이지만 집안에서는 다정다감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술도 명절에만 조금 마신다고 했다. 그러나 딸들은 아버지가 새 술을 청하면 냉정하게 외면했다. 바이티카를 하러 찾아가는 작은아버지도 술이 과해서 병이 났기 때문이다.

 

산골 처녀들의 걸음은 따라잡기 쉽지 않았다. 자주 쉬면서 한 시간쯤 걸은 끝에 당도한 산비탈의 그 집은 아담하고 전망이 툭 터져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대문 앞에 선 나무는 해바라기 모양의 하늘하늘한 꽃을 피워 운치를 더했다. 줄리는 작은아버지 내외에게 티카를 해드리고, 가져온 음식을 내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전혀 환자 같지 않고 너그럽고 다감해 보이는 줄리의 작은아버지는 나에게 락시를 권했다. 한잔한 김에, 다음에 오면 이 집에서 하루라도 묵어가고 싶다고 했더니 꼭 그러라며 내 손을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줄리와 사리타는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나라 우리 네팔 평화로운 나라 우리 네팔’이라는 후렴이 붙는 노래였다. 줄리와 사리타는 집에 돌아와서야 이날 첫 끼니를 먹었다. 우리는 줄리 아버지와 부엌에서 락시를 마셨다. 마치 옛 전우를 만나기라도 한 듯, 며칠 더 묵고 가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명절 내내 아침부터 홀짝홀짝 마신 술에 젖어서 그윽한 눈길로 한잔 더 하기를 권하면서…. 그의 아내 리라 꾸마리 구릉은 쉰을 조금 넘긴 나이였지만, 얼굴에 주름이 많아서 남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녀는 딸들이 안 보는 틈을 타 남편의 술잔에 락시를 채워주면서 나에게 말했다. 명절날만 조금 마시는 걸 가지고 딸들이 펄쩍 뛰는 통에 이렇게 몰래 드리는 거라고.

 

줄리 자매가 네레 마을에서 작은아버지에게 티카를 해 주고 오는 길.

 

티하르의 마지막 날인 이날 네레바잘의 장마당에는 초저녁부터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줄리의 집 부엌에서도 북 장단에 맞춰 노래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놀다가고 또 놀다가면서 밤이 깊었는데, 나는 뜬금없는 상념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의 명절도 예전에는 이렇듯 가족과 이웃이 모여 소박하면서도 깊은 정을 나누곤 했는데 어찌하여 훨씬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는 오늘날에는 텔레비전이나 쳐다보다가 뿔뿔이 흩어져 남남처럼 살게 된 것일까.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한 마음이 되었다.

 

모든 축제가 끝난 이튿날은 월요일이었고 하늘이 맑았다. 화요일에는 네레바잘에 장이 서는 날이니 장날 구경하고 가라고 한사코 붙드는 줄리 구릉네 식구들과 작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차만 마시고 7시에 일어서려 했으나 결국 툭바(국물에 만 국수의 일종)를 한 사발씩 먹고 8시에 떠났다. 작별할 때 안주인 리라 꾸마리 구릉이 하얀 카닥을 들고 나와 우리들 목에 하나하나 스카프처럼 걸어주며 복을 빌었다.

 

내가 받은 카닥은 두 시간 뒤에 건너게 된 솔루 콜라의 출렁다리 난간에 묶었다. 이쪽과 저쪽 산비탈을 가르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우렁찼고, 다리 위 골바람도 세찼다. 그래서 난간에 매단 카닥은 다른 사람들이 묶어둔 카닥들과 함께 딴 세상의 초입에서 나부끼는 깃발처럼 보였다.

 

 

네레바잘의 주민들이 바이티카 전날 길가에 모여 춤을 추고 있다.

 

 

↘ 글을 쓴 김홍성 님은 산책과 도보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20세기 말에 네팔로 이주하여 설산을 벗하고 살다가 근년에 귀국, 춘천에 머물고 있습니다.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산문집 《히말라야 40일 간의 낮과 밤》, 《천년 순정의 땅 히말라야를 걷다》, 《우리들의 소풍》, 《꽃향기 두엄냄새 서로 섞인들》 등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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