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누군가는 이 농사 유지해야 나중에 더 많은 이들이 먹겠지? - 경북 상주 햇살아래공동체 농부 최병수

글 김성희 사진 장성백

누군가는 이 농사 유지해야
나중에 더 많은 이들이 먹겠지?

경북 상주 햇살아래공동체 농부  최병수씨


 


기후 때문에 사람도 작물도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가 올 봄까지 이어지더니 이번 여름은 혀를 빼물고 다녀야 할 만큼 더웠다. 뭔가 불길한 예감마저 느껴졌다. 경북 상주 화동면에 사는 농부 최병수 씨를 만나러 가는 날도 달군 가마솥에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뜨거웠다. 입추가 코앞이었지만 여름은 좀체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른 새벽에 서울을 떠났는데도 공기는 이미 후텁지근하게 달궈져 있었다. 차창을 열어도 흘러들어오는 바람에서 청량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내 에어컨을 틀어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괴산에 귀농해 있는 사진기자를 만나 함께 가려고 그의 집을 거쳐 속리산 계곡들을 끼고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달렸다. 비로소 에어컨을 끄고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산길을 끼고 드문드문 펼쳐진 포도밭과 사과밭. 깨끗한 숲과 개울. 어쩐지 안도감이 느껴졌다. 애초에 한반도 대운하 계획에 속리산을 스치는 이 지역으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엘리베이터식’ 물길을 내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괴산을 막 지났을 때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도 들에 갔다 막 들어왔는데, 밥은 와서 같이 먹읍시다. 촌에 반찬은 없지만 길에서 먹을 게 뭐 있겠소.”
삼복염천에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하다 들어왔을 그들 부부에게 손님치레까지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괴산 청천면을 지난 뒤로는 길에서 이렇다 할 식당도 볼 수 없었다. 일 하다 들어와 정신이 없었을 텐데 안주인 김명희 씨는 더운밥에 생선조림까지 갖춘 밥상을 뚝딱 차려 내왔다. 산골에 장보러 다니기도 쉽지 않을 텐데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밥상을 물리기 무섭게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마당가 포도밭 잎사귀 위로 ‘솨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빗소리가 타악기를 두들기기라도 하듯 경쾌했다.

 

 

이들 부부는 대개 새벽 다섯 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아침을 먹고 밭에 나가 이렇게 점심때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함께 점심을 차려먹는다. 포도나무 순지르기나 사과나무 전지를 하는 이른 봄이나 수확철에는 외지에서 온 인부들의 손을 빌려야 하기에 그들과 함께 들밥을 먹기도 할 것이다. 한여름에는 점심을 먹고 나면 더위가 한풀 꺾일 때까지 쉬어야 한다. 그리고 해거름녘에 다시 들에 나가 사위가 어둠에 잠길 때까지 일을 한다. 여느 농부들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하루 일과를 묻자 그들 부부는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한다.

“여가 원래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은 아니라요. 영덕군 남정면에 지금도 남아있는 경주 최가 집성촌서 조부님이 야반도주해서 이리로 오셨대요. 1921년생인 돌아가신 아버님이 여기 와서 태어나셨다니 상주에 정착한 지 90년쯤 됐지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던 그의 조부가 일제와 내통하던 먼 친척의 밀고 때문에 고향을 빠져나와 정착한 곳이 이곳 상주 화동면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고속도로가 종횡으로 뚫리고 도로도 거미줄처럼 깔렸지만 당시만 해도 상주에서도 백두대간의 북사면에 치우쳐 있는 이 동네는 첩첩 산중의 오지였다. 낯선 타관에서 그의 조부는 열심히 일한 끝에 기반을 잡았다. 그의 부친은 영동에서 과학 선생님으로 재직하다 마을에 술도가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자랄 때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고 부친이 5공 시절 대통령 선출 대의원을 지내는 등 말하자면 ‘지역유지’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학살자를 대통령으로 뽑는데 동원 된 일에 대해 늘 “인생의 오점을 남겼다”고 씁쓸해 했다. 또 5,6공 때 당신의 아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농민회 활동으로 동분서주할 때도 적극적으로 반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막대기도 불에 달궈 살살 구부려야지 갑자기 힘을 주면 부러지지” 하는 정도의 염려 섞인 말을 건넬 뿐이었다고 한다.

 

가톨릭농민회가 산골농부를 양심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는 1947년생, 우리 나이로 예순네 살이다. 고등학교 때 상주에 나가 학교를 다녔고 1966년부터는 마을에 돌아와 3년 동안 집안에서 하던 양조장에서 함께 일하다가 1970년에 동갑내기 김명희 씨와 결혼을 했다. 신혼 때는 서울에 가서 1973년까지 4년 가까이 객지생활을 했다. 서울 행당동과 동숭동에 집을 얻어 살면서 경험도 없이 닭튀김집도 열고 양장점도 해보았지만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혼의 그들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도시에서는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도 않았고, 들어서도 이내 유산이 되곤 해서 서울에 정을 붙이고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향에 돌아온 뒤로는 다행히 이내 아이가 들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그 중 큰 아들 최시혁 씨는 화서면 이소리에 있는 한울영농조합법인의 공장장으로 일하며 한살림과 가톨릭 우리농에 포도즙 등의 물품을 내고 있다. 큰 며느리와 딸 최시옥 씨는 상주에서 95% 이상 한살림의 식재료만으로 아이들 밥상을 차리는 어린이집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며느리에게도 아이가 늦게 들어서 좋은 먹을거리를 가려먹게 됐고 당연히 다른집 아이들도 귀하게 여겨 몇 년 째 유기농 밥상을 차려왔다고 한다. 둘째 아들은 성남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부부는 둘째 아들이 객지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면 싶다고 했다. 땅에서 얻는 수익이 꼭 서울에서 사업을 할 때 벌어들이는 것보다 많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 부부가 고향에 돌아와서야 세 남매를 낳을 수 있었던 것처럼 땅에 뿌리박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최병수 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대구대교구에서 경북북부지역을 떼어 안동교구를 설치하고 프랑스 출신 두봉 신부를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두봉 주교가 이끈 안동교구는 유교전통이 강하고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인 지역사회를 위해 농민사목에 힘쓰는 한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 조직에 앞장섰다. 경찰이나 면직원이 농민들의 뺨을 때려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던 그 시절에 가톨릭농민회는 농민들의 권리 의식을 깨우치고 압력에 굽힘없이 권력의 악행을 질타했다. 이 와중에 잘 알려진 ‘오원춘 사건’같은 일이 터졌다. 그릇된 농정에 항의하던 가톨릭농민회 회원 오원춘 씨를 중앙정보부가 납치해 린치를 가하고 울릉도에서 슬그머니 풀어준 이 사건으로 천주교는 박정희 정권과 극한 대립을 빚었다. 이 와중에서 함세웅 신부 등이 구속되고 본래 프랑스 사람이던 두봉 주교가 강제 출국 명령을 받기도 했다.

 

최병수 씨는 1977년에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했고 훨씬 뒤인 1982년에 세례를 받았다. 처음에는 신앙보다는 가톨릭농민회가 불의에 항거하며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던 모양이다. 부지런히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참여하던 게 그의 나이 갓 서른을 넘은 시기였다. 이 무렵, 나중에 한살림에서 만나게 되는 박재일, 이상국 같은 이들을 ‘현장’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는 특히 박재일 한살림 명예회장에 대해 같은 영덕 남정면 출신인데다 가톨릭농민회 시절부터 이어온 인연 때문에 ‘늘 마음 속에 남달리 떠올리는 분’이라고 추억했다.

 

박정희 정권 때나 신군부가 집권한 뒤에도 경찰과 면사무소의 방해 때문에 가톨릭농민회 교육이나 회합에 참여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청년들을 설득해 열 몇 명이 함께 안동으로 교육을 받으러 가기로 약속을 해도 막상 당일에 참석하는 사람은 늘 서너 명도 안됐다고 한다. 한 번에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들통이 날까싶어 띄엄띄엄 흩어져 각기 다른 마을에서 버스에 올라타는 식으로 감시를 따돌리고 숙박교육에 참여하곤 했다. 가톨릭농민회의 교육은 농민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 농민들이 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런 식의 운동론 강의와 농가 경영에 필요한 내용들이 많았다고 한다.

 

면사무소나 경찰에서는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열성인 최병수 씨를 공공연하게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집에 드나드는 사람마다 어울리지 말라며 협박을 했다. 특히 최병수 씨 내외는 1989년 2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대회를 잊지 못하고 있다. 부당하게 물고 있던 농업용수 사용료(수세) 폐지와 고추 수매를 요구하며 전국의 농민들이 궐기한 이 집회에 대해 정부와 언론은 농민들이 들고 있던 죽창을 부각시키며 불순한 폭력세력의 난동으로 몰아 탄압했다. 최병수 씨의 권유로 마을 사람들이 버스 2대에 타고 서울에 올라갔는데 9시 뉴스에는 아수라장의 집회현장이 계속 보도 되었다. 그의 아내 김명희 씨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길에 나와 “최병수는 못 돌아오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무사히 돌려보내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최병수 씨는 1988년부터 한살림 생산자가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1998년 전후로 상주농민회 회장도 역임하면서 농민회 활동도 꾸준히 이어왔다.

 

 

약 친 포도를 누구 먹으라고 내겠나?

요즘은 친환경농산물이니 유기농이 하는 말이 그다지 별스럽지 않은 세월이 되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유통업체들도 경쟁적으로 친환경농산물 코너를 운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외양이나 성분표시 기준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먹을거리가 세상에 퍼질 수 있게 고난의 길을 닦아온 이들이 내는 물품에 담긴 의미와 역사성마저 베껴올 수는 없을 것이다.

 

가톨릭농민회가 의식을 일깨우기도 했겠지만 그들 부부의 선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땅에다 차마 모진 제초제를 칠 수 없었던 것은 그와 그의 아내가 타고난 심성 때문이었겠다 싶었다. 서울살이를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막 시작한 무렵 그이에게 친구가 오골계 몇 마리를 키워보라고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초제 친 곳에 풀어놓은 닭들이 하나둘 간이 부어오른 채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는 도저히 농약 칠 엄두가 안 났다고 한다. 농약과 비료를 살포하는 이른바 관행농업에 대해 회의가 깊어지던 무렵 때마침 가톨릭농민회에서도 효소와 미생을 이용한 대안적인 농업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87년 무렵부터 최병수 씨는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최종명 수사 등이 진행한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고, 경북대학교 농대를 열심히 찾아가기도 했다. 횡성의 공근 마을에 있는 농부 정희선 씨처럼 전국 어디든 농약을 안치고 농사짓는 이가 있다고 하면 찾아가 기술을 전수받으려고 애썼다. 이 과정에서 왼쪽 발의 엄지발가락을 포함해 발가락 세 개가 뭉텅 잘려나갔다. 나뭇가지 등을 분쇄기로 잘라 발효퇴비를 만들다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무렵에 한살림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햇살아래 공동체’를 함께 하고 있는 조성용, 김세식 씨와 함께 생산자 공동체를 이뤄 1988년부터 한살림과 인연을 맺고 포도와 사과를 내기 시작했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정작 그 무렵 자신이 생산한 사과는 지금 생각으로는 도저히 돈을 받고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과가 시커멓고 크기도 형편없었죠. 그런데도 한살림 초창기 소비자들이 대단했어요. 미안해서 도저히 못 내겠다는데도 갈아서 주스라도 만들어 먹겠다며 그걸 다 받아줬어요. 그분들의 열성이 아니었으면 아마 지속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소비자들의 응원 아래 죄책감 없이 깨끗한 농사를 짓는다는 자부심을 얻었지만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사과를 출하하고도 처음 몇 해 동안 그가 얻은 수익은 연 500만 원 남짓이었다. 생산비용은 그보다 두 배는 더 들었다. 생활을 지탱할 수 없어 아내 김명희 씨는 추풍령 휴게소 농산물판매소에 판매원으로 나가 생활비를 벌어 와야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까지 출퇴근을 하자니 새벽에 일어나 과수원 풀을 밀어놓고 아침 8시 반 차로 출근해 밤 10시 반 막차로 귀가하기가 일쑤였다. 큰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인데 학비를 대기도 벅찼고 집안 살림도 말이 아니었다. 아내 김명희 씨는 감회어린 표정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엄마, 우리 포도밭에 반은 남들처럼 농약 쳐서 시장에 내고 반은 유기농 하면 생활비는 벌 수 있잖아요. 보다 못해 큰 애가 이런 말을 해요. 그라모 약 친 포도를 누구보고 먹으라고 할끼고, 이라고 말았지예.”

 

친환경 농사를 지탱하기 위해 온 가족이 10년 가까운 세월 온 힘을 다해 매달린 것이다. 1987년부터 시작한 고난에 찬 친환경농사는 8,9년 지난 뒤인 1995년 무렵에야 비로소 생산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미생물 발효퇴비를 만드는 기술이나 농자재가 발달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땅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농사는 부부가 같이 짓는데 여자들은 이름도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과일상자에 최병수 김명희 두 사람 이름을 같이 넣어 한살림에 냈어요. 하지만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사람은 농민회 일로 회의나 집회에 참석하기 바쁘지 농사에 전념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반거치 농사나 마찬가지죠.“

 

아내가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 최병수 씨는 그저 미소를 머금고 듣는다. 농민회장을 하던 남편이나 차비도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던 농민회 간사들이나 다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옳은 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에 말릴 엄두도 낼 수 없었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남편은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부부가 오롯이 친환경 농사를 지탱하기도 힘들었지만, 생산이 안정되고 나서도 농민회 후배들로부터는 또 다른 문제 제기를 받아야 했다. ‘비싼 친환경 농산물은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는데, 왜 우리가 부자들을 위해 그런 농사를 지속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만 누군가 계속 이 농사를 지탱해야 나중에라도 더많은 사람들이 나은 먹을거리를 먹을 수 있지 않겠냐고 설득을 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땅을 되살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후배들을 설득해 자신이 회장으로 일하던 동안 상주농민회에 생명농업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유기농산물을 이제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 만날 수 있게 됐으니 그의 말은 거의 절반쯤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렵게 친환경 농사를 지탱하면서 생산기술을 발전시켜온 초창기 농민들이나 참고 기다리며 이들을 응원한 소비자가 아니었다면 농사기술도 미생물제재 같은 친환경 농자재도 발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가격도 20년 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낮아지고 사람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작물들도 늘어났다. 우리 몸에 좋은 것뿐 아니라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과정에서 자연을 되살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가치까지 따진다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는 점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들의 한 해 농사는 계절의 순환에 맞물려 돌아간다. 봄이 깊어지기 전까지 주로 겨울동안 과수원의 전지를 하며 한 해를 시작한다. 포도는 가지에서 물이 올라오기 전인 2월 20일까지 마쳐야 한다. 사과는 3월 중에는 마무리를 한다. 전지한 가지들은 잘게 잘라서 모두 퇴비로 밭에 돌려준다. 꽃이 피기 전에 유황제재를 뿌리고, 5월부터는 너무 많이 달린 과일을 솎아내는 적과를 한다. 사과는 세 번에 걸쳐 적과를 한다. 어떤 열매를 끝까지 남겨서 수확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기도 어려워 주인이 직접 해야만 한다. 포도 역시 수확할 열매가 달리는 순을 질러줘야 한다. 자급을 하고 며느리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보내주는 정도지만 논농사도 하고 있어 해마다 5월 15일에 날을 정해놓고 모내기를 한다.

 

그런데 올해는 출발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이상한파’ 때문에 과수의 꽃이 예년보다 보름 가량 늦게 피었다. 상주보다도 지대가 높은 화동면 지역은 이보다도 일주일 이상 더 늦어졌다. 열매가 그만큼 늦게 맺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확시기를 늦출 수는 없는 일이라 수확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는 땅의 기운을 살피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조화에 기대는 것이 농사일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농사는 종합예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땅은 한 번 리듬을 잃어버리면 좀처럼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고 한다. 거름이 부족해도 문제지만 너무 세게 주어도 과일은 못 견디고 다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최병수 씨는 곁에 앉은 아내를 바라보며 ‘이래도 내가 반거치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 하며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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