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2010년 가을 살림,살림

[ 살림이 만난 고집쟁이 ]

물건의 필요부터 살펴요 - 그린디자이너 유혜경

글 한정혜 객원기자 사진 류관희

세상이 온통 디자인에 빠졌다. 질보다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인이 곧 질이다. 어느 틈엔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갖고 싶어서 지갑을 열고, 갖고 싶게 만드는 건 단연코 디자인이다. 디자인의 초강력 마법 앞에 속절없이 무너질수록 디자인의 목표는 더욱 명확해졌으니, 이러나저러나 팔리는 디자인!

 

그런데, 디자이너인 유혜경 씨는 뜻밖에도 디자인의 마법에서 깨어나라고 권한다. 그리고 멋진 디자인이란 모름지기 북극곰, 펭귄, 너구리에게도 멋진 디자인이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올해 스물여섯인 그의 입에서 “좋은 디자인이란 환경을 염두에 둔 최소한의 디자인, 디자인을 안 한 것 같은 디자인, 눈에 덜 띄고 덜 노골적인 디자인…”이란 사려 깊은 말들이 술술 흘러 나왔다. 그는 언제부터 이런 애늙은이가 되고 만 걸까.

 

그림도 곧잘 그리고 만들기를 좋아했던 유혜경 씨는 대학에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했다. 수학공식을 외듯 데생 연습을 했고, 입시미술을 하는 내내 온 신경은 무얼 그릴까, 가 아니라 “일단 입학”을 향해 있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대학생활 내내 귓가를 맴도는 등골 서늘한 취업 괴담 속에서, 역시나 또, 무얼 디자인할까, 가 아니라 “일단 취업”을 향해 전전긍긍했다. 그러니까 나란 인간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디자이너가 될 것인가, 란 고민은 “운 좋게” 취업을 하고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오퍼레이터였어요. 기업에서 추구하는 디자인이란 결국 팔리는 디자인이잖아요. 이윤만 쫓는 디자인 프로세스나 결과물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니까 재미가 없었어요. 이런 일은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무엇인가, 점점 고민이 많아졌죠. 그때 윤호섭 교수님과 그분의 디자인, 삶을 알게 되면서 그린 디자인에 관심이 생겼어요. 알면 알수록 디자이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결심이 섰어요.”

 

윤호섭 교수(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는 환경과 디자인은 한몸이며, 디자인이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리라 믿는, 그래서 디자인을 하기 전 스스로에게 디자인의 옷을 입게 될 그 무엇이 꼭 존재해야 하는 가부터 따져 묻고, 만들어지는 과정은 물론 세상에서 없어질 최후까지 온전히 책임지고자 하는 보기 드문 디자이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놀랄 만큼 멋지고 쿨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디자인과 소소한 일상은 홈페이지(www.greencanvas.com)에 낱낱이 올라있다.

 

윤 교수의 홈페이지에 드나들며 그린 디자인이라는 것에 물이 들자 주저 없이 목에 건 사원증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아름다운가게 재활용디자인 사업부 메아리에서 인턴십을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비난이 빗발쳤다. 배가 불렀어, 취직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없어봐야 돈 귀한 걸 알지 쯧쯧. 소문난 쓰레기장을 돌며 쓸 만한 폐자재를 건져 올리고 자투리 원단 더미를 뒤지면서도 신이 났다. 그러다가 올 초 그린 디자인을 표방하는 ‘공장(工匠)’에 입사했다. 그 전 직장에 비하면 연봉이 꽤 낮았지만 “지구를 위해 기부했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만이 디자이너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면서부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대량 생산 시스템 속에 있는 디자이너는 결코 환경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하나의 디자인이 수 천, 수 만 개의 제품으로 만들어져 쏟아져 나오니까. 디자이너의 모든 결정은 환경에 큰 영향을 주죠. 디자인에 따라 친환경적인 제품이 나올 수도 있고, 반환경적인 제품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어요. 바꿔 말하면 제품을 통해 사용자에게 그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도 무궁무진한 셈이에요.” 일을 하면 할수록 그린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디자인이 곧 그린 디자인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활용 소재를 이용해서 만든 리싸이클 제품들이나 재생지를 이용한 정도가 그린 디자인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공장이 추구하는 그린 디자인은 그 제품이 필요한가를 따지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다음,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어떤 재료들을 사용할지,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쓰레기는 만들지 않는지 등 기획부터 물류와 유통에 이어 폐기 시까지의 친환경성을 고려해요.”

 

 

그가 근무 중인 공장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디자인으로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는 대신,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디자인, 디자인 영역 안에서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노트를 많이 팔 수 있을까, 요즘 환경이 대세니까 북극곰을 그려 넣으면 어떨까, 가 아니라, 책을 만들 때 잘려 나가는 네 귀퉁이의 종이를 어떻게 하면 살려 쓸 수 있을까, 모아서 노트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노트 표지에는 북극곰을 그려 넣자, 지구 온난화로 북극곰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라고 말이다.

 

북극곰 대 북극곰. 같지만 다른 북극곰. 그린 디자인으로 치장한 제품과 진짜 그린 디자인 제품의 차이는 이렇듯 시작부터 다르다. 그래서 그는 그린 디자인이 마케팅 이슈나 트렌드로 소비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사람들이 겉으로만 그린을 외치는 디자인을 진짜 그린 디자인으로 알고 익숙해지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우리는 우리의 제품이 그린 디자인이라고 내세우지 않아요. 친환경 제품은 품질이며 디자인이 못하다는 선입견을 깨주고 싶은 이유도 있답니다.”

 

안팎이 두루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보니 학교 다닐 때 보다 독서량이며 공부량이 더 늘었다. “매일 환경 관련 사이트들을 돌며 관련 뉴스를 스크랩해요.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코드그린-뜨겁고 평범한 세계》. 한 번 읽어보세요. 어렵지만 재미있어요.(웃음)”

 

지난 봄 환경영화제에서 본 다큐멘터리 영화 <노임팩트맨>(No Impact Man, 일명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남기 1년 프로젝트’)은 그의 일상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마트 갈 때 장바구니 들고 가는 걸로 위안을 삼고 있었더라고요.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일회용 포장지에 싸여 있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겨우 몇 분 사용되고 버려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동안 멍했어요. 환경을 위해 선택한 장바구니 속이 일회용품으로 포장된 물건들만 가득한 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 대형마트가 아닌 재래시장이나 직거래 장터를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불필요한 포장이 없고 대형마트보다 더욱 신선한 재료들을 일회용품에 대한 고민 없이 구입할 수 있어 좋다. 커피를 정말 좋아하지만 집에서부터 만들어 온다. 밖에서 사먹게 되는 경우에도 항상 텀블러를 이용해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려고 한다.

 

그가 근무 중인 공장 사무실 풍경도 다르지 않다. 천장 형광등이 켜져 있을 때는 정말 형광등을 켤 만큼 어두워졌을 때고, 에어컨이 켜져 있는 시간은 점심밥을 짓느라 사무실 안 온도가 올라갈 11시 반 무렵 몇 십 분을 포함해 길어야 하루 두세 시간을 넘지 않는다.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점심밥을 지어 먹는 건 음식을 남겨 버리지 않기 위한 공장 사람들의 비책이다.

 

“저희의 작은 습관과 생각들이 디자인에 나타난다고 믿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제작 시 공정이며 들이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다 보니 단 한 조각의 원단과 한 개의 버튼만으로 근사한 필통이 만들어졌다. 노트의 크기가 그만한 것은 인쇄소를 돌며 모은 자투리 종이의 크기가 그만하기 때문이다. 노트 표지는 버려진 잡지 종이를 재생한 것이다. 표지에 너구리, 소쩍새, 삵, 고라니들을 그려 넣고 ‘로드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들이 번식을 위해 이동하거나 먹이와 물을 찾아 길에 나왔다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기 바라서다. 펭귄, 북극곰, 하프물범을 그려 넣은 멸종 위기 동물 노트도 그렇게 탄생했다. 맨 뒤표지 안쪽에는 이들이 처한 안타까운 상황들이며 환경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옆에서 소곤대는 듯 친근한 문장으로 적혀 있다. 물론 콩기름으로 인쇄했다. 서울 성미산 마을의 의뢰를 받아 만든 저탄소 녹색 가정 문패는 버려진 컴퓨터에서 빼낸 드라이브를 재사용한 것이다.

 

                           

 

제품화 과정에서 디자인, 기능(실용성), 지속가능성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공장이 스스로 정해 지키고 있는 제작 기준은 눈여겨 볼만하다. “제품의 환경성을 평가, 진단하고 점수에 따라 3단계의 그린 라벨을 부여합니다. 점수가 낮으면 다시 검토하고 수정을 거듭해요.”

 

제조 전(제품의 유용성, 환경 메시지 전달), 제조(소재의 친환경성과 사용률,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 무게 및 부피, 포장의 최소화), 수송(운반·적재의 효율성, 공급의 수송 효율성), 사용(리필, 재사용률, 제품의 수명), 폐기(제품의 분리성, 소재의 재활용성, 포장재의 친환경성) 등 각 단계별로 꼼꼼히 정해둔 에코 리스트는 공장 홈페이지(www.gongjangs.com)와 온라인 숍에서 판매되는 각각의 제품 소개 페이지 안에도 담겨 있어 소비자들에게 제품 선택의 가이드와 그린 메시지를 함께 전한다.

                                    

 

물건의 전 생애를 꼼꼼히 돌보는 일이 흥미진진하다는 그린 디자이너 유혜경 씨. 이제디자이너라면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능력만이 아니라 소재나 생산 전반을 아우르는 깊은 지식과 지혜도 함께 가져야 하지 않을까. 디자이너들이 목표로 해야 할 최종적인 그린 디자인은 제품의 마지막까지 고려한 지속가능한 디자인이라고 외치는 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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