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살림,살림

[ 사이살림 - 엄마하고 나하고 ]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 여행

글 전희식

노인들에게 겨울은 길고 무겁다. 몸이 불편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어머니는 눈이 펑펑 내릴 때도 두릅 꺾으러 가자고 하셨고 영하 16℃까지 수은주가 내려갔을 때도 쑥 캐러 가자고 하셨다. 내가 딴청 부린다 싶으면 아랫집 한동할머니가 다 캐 간다고 재촉하셨다. “밤이 와 이리도 기노?”라고 말씀하시던 횟수만큼이나 “올 겨울은 와 이리 춥노?”라고 하셨다. 모두 다 봄에 대한 기다림이었다. 봄의 추억을 되살리며 어머니는 간절하게 봄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올해 여든 아홉이시니 밤은 길고 겨울은 추운 연세다. 나도 봄이 기다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우내 마을 수돗물이 얼어붙어 계곡에 가서 그 많은 빨래를 해야 했고 식수도 양동이로 떠다 먹었다. 물 한 대야를 가지고 세수하고 발 닦고 양말을 빨았다. 웬만한 양의 설거지는 물 두 바가지로 처리하곤 했으니.

노인회 봄나들이 가던 날

4월 28일에 우리 마을에 함박눈이 내렸다. 어머니 앞에서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감언이설로 어머니를 다독여 오던 나는 더 둘러 댈 말도 없었다. 한나절 만에 쌓였던 눈이 자취를 감출 무렵 동네 방송이 흘러 나왔다. 노인회장님 목소리였다. 노인회에서 봄 야유회를 간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바닷가로 안 가고 내륙으로 간다면서 충청도 어디 조각공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각공원이건 어린이대공원이건 상관없었다. 바다도 좋고 들도 좋았다. 목덜미를 휘감고 도는 봄바람을 맘껏 어머니께 쐬어 드리는 것이면 족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봄 야유회 날이 되자 어머니는 안 간다고 하셨다. 며칠 동안 공 들였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여행이란 원래 예상에 없던 사건의 연속이어야 제 맛이라는 것을 내게 일깨워 주시려는 어머니의 숨은 계획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나와 어머니는 고도의 수 싸움을 시작했다. 엉뚱한 곳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돌려놓았다가 불쑥 봄놀이 가자고 팔을 끌면서 준비한 새 옷도 보여드리고 신발도 꺼내서 신기고 하는 수법을 총 동원했는데 어머니는 끄덕도 안했다. 여자가 바깥으로 나돌면 집안 우세 산다고 했다.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냇가에 가서 목욕도 못하게 했는데 내가 봄놀이 간다카믄 우리 아부지가 가만히 놔 둘 줄 아나?”

“내가 너 같은 줄 아나? 한번 꿈직일라카믄 오줌은 찔끔거리지, 삭신이 안 아픈 데가 없는데 놀러가긴 어딜 가?”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괜찮다고, 외할아버지도 이제 다 이해 해 주실 거라고 말을 하면서도 이런 말이 쓸데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머리 감을 때도 정지에서 문 걸어 잠가 놓고 감았는데 어디 여자가 남자들이랑 같이 차타고 놀러 댕긴다카더노? 나는 안 가.”

어머니의 논리는 정연했고 결의는 높았다. 나는 두 번째 카드를 빼 들었다. 아랫집으로 내려가서 한동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랑 같이 내 트럭을 타고 동네 마을회관까지 가자고 했다. 작년에도 이 작전이 성공했었다. 한동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서 올해는 봄놀이 못 간다고 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마을 노인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못 내려가니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나 드리려 했는데 통화중이었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마루를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서 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출발한 지 몇 분 되지 않아서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충청도는 구제역이 발생해서 안 가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경남 통영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른바 관광버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계속 욕을 해 댔다. 고막을 찢는 듯한 육자배기 음악이 버스를 뒤흔들었고 소주잔들이 머리위로 오갔다. 어머니의 화살이 방향을 돌려 나를 겨누기 시작했다. 집에 당장 돌아가지 않을 거냐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통영 앞바다 쯤 왔을 때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가파른 버스 계단을 내려오는데 내 품에 안긴 어머니는 불안했던지 승강대 손잡이를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아래 발판은 보이지가 않고 허리는 휘청거리는데 어머니가 손잡이를 거머쥐고 놓지를 않으니 내 손이 세 개면 어머니 손을 풀 수 있으련만 동네 사람들은 저만치 가버리고 없어서 어머니 몸체를 잡아 당겨 손을 풀게 했다. 어머니는 팔이 떨어져 나간다고 야단이었다. “남들 우세시키려고 끌고 왔지. 지가 잉가이(어지간하게) 섬기는 듯이 지랄하고 있어.”식당으로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내 뱉으신 말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무도 없다보니 남들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남들 앞에서 부모 모시는 거 과시라도 하냐는 말씀이기도 했다. 3층에 있는 식당을 향해 동네 이장이 내 팔을 부축하고 나는 어머니를 안고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어머니는 나를 자꾸 쥐어뜯었다. 사람들이 병신인 줄 알겠다면서 빨리 안 내려 놓을 거냐고 소리를 지르셨다. 다행히 식사를 맛있게 하셨다. 밥도 한 공기를 다 비우셨다.“어머니. 오줌 누러 갈까요?”나는 어머니 귀에 대고 귓속말로 했는데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다. 이제는 옷에 오줌 안 누신다고 까지 하셨다. 이날 어머니 고집에 못 이겨 끝내 기저귀를 않고 출발했기 때문에 속옷이랑 겉옷, 화장지, 기저귀가 가방에 가득 들어 있었다.화장실에 가서 내가 오줌을 누고 오는데 그새 어머니는 밥상에 앉은 채로 한강을 만들고 계셨다. 내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신속하게 수습을 했다. 몇 번 수건을 빨아 대면서 깨끗이 뒤처리를 했는데 문제는 다시 어머니를 안고 버스로 오는 동안에 어머니 아랫도리에 흠뻑 밴 오줌이 내 앞 가슴과 양 팔로 다 옮겨와 버렸다. 어머니 갈아입을 옷이야 충분했지만 내가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빈 버스 안에서 우리 모자는 씨름을 했다. 사람들 본다면서 있는 대로 커튼을 다 내리라고 하셨다. 커튼을 모조리 다 내렸더니 다른 트집을 잡으셨다. 벗으면 빨아야 하는데 어디서 빨려고 그러냐면서 입고 있으면 다 마른다고 바지를 움켜쥐고 놓지를 않으셨다. 오줌 눴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오줌 안 눈다면서 기저귀는 끝내 거절하셨다. 유람선을 타는 시간에는 빗발이 더 굵어졌다. 버스 기사와 나, 그리고 어머니는 버스를 지켰다. 동네 사람들이 해물시장에 몰려가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살 때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합자와 쥐포를 샀다. 우리 때문에 애써 주신 동네 몇몇 분들에게는 간고등어 한 쌍과 5천 원 하는 오징어젓을 하나씩 선물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어머니는 내 어깨에 기대고 손도 꼭 잡은 채 잠이 드셨다. 나는 휠체어와 어머니 몸무게를 감당해야 했지만 어머니는 평생 동안의 세상 시름을 짊어지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어디로 놀러 다니셨어요?”

 눈을 살짝 뜨시기에 실없는 소린 줄 알면서도 말을 걸었다.

 "놀로가 다 먹꼬. 아 키우고 밭에 일 하느락꼬 놀러 댕길 여가가 오댓노.밤에는 베 짜고.”

“일 하믄 새참은 뭘 드셨어요?”

 “허허. 새 참? 새 참이 다 먹꼬. 때꺼리도 엄는데. 새참은 맹물 한 사발 먹는기지 머.”

 밤에 늦도록 베 짜다 보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라도 한 그릇 먹었으면 해도 먹을 게 없다보니 부엌에 나가서 물 한 그릇 마시고 자려고 하다보면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옆 방 할아버지가 문을 열면서 뭐 먹느냐고 하면 어찌 민망한지 괜히 죄지은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아는 자꾸 젖을 빨아싸도 나올끼 오대 인나. 멀 먹어야 나오지. 빤다고 젖이 나오나? 아 울리지 말락꼬 할아버지는 가암(고함)을 지르지, 겨우 아 달개 노믄 새벽달기 우는고마.”

 동네 노인회에서 나눠주는 백설기와 방울토마토와 콜라와 오징어포와 땅콩이 어머니 무릎에 쌓였다. 처연한 눈빛으로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한 창 먹고 싶을 때는 먹을 게 없어서 못 먹고, 이렇게 먹을 게 많을 때는 속이 소화를 못해서 또 못 먹으니 천생 어머니는 못 먹을 팔자인 모양이라고 하셨다. 그토록 험악한 시절이 어머니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겨 놓았나보다. 치유의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한 채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식 아니면 누가 이 상처를 보듬을 것인가.

이 날. 동네 사람들은 진주로 통영으로 삼천포로 유람을 다니셨고 어머니와 나는 70년 전 왜정시대로 시간 여행을 다녀 온 셈이다.


•글을 쓴 전희식 님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지켜드리자는 생각에 전라북도 장수의 산골에 내려가 함께 살며 그 경험을 《똥꽃》,《엄마하고 나하고》에 담았습니다. 극진한 보살핌과 자연 속의 자연스러운 삶과 노동으로  어머니의 건강이 놀랍게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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