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살림,살림

[ 살림의 책① ]

지혜의 마지막 결론 《여기 사람이 있다》

글 유채림

이런 길도 있었나? 도대체 이것도 길이라고, 하필 내가 딛고 가야 하는 길인가? 눈물겹고 하도 막막하여 처음엔 그 길을 길이라 하지 않았다. 길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철판을 두드리면서 통곡하는 아내에게 모든 걸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하고도 집에 들어가 온전히 살림할 수 있겠느냐고 절규했다. 그러나 아내가 가겠다는 길은 길이 아니었다. 2009년 한 해, 용산참사 현장을 찾을 때마다 이건 길이 아니라고 피멍이 들도록 가슴을 치지 않았던가. 실로 그건 길이 아니었다. 기존의 생명은 모두 패대기쳐져 물밑 같은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던 용산의 남일당에 길은 무슨 길이 있었을까. 타버리고 찌그러져버린 남일당 망루에는 흰 만장만이 바람에 펄럭였다. 함께하지 못했다는 자의식에 휩싸여 용산을 찾는 동안 늘 펄럭이는 만장을 보았고, 하늘로 가는 길만 보았다. 땅에는 길이 없었다. 유족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황혼이 내려와 있었다. 유족들과 함께하는 문화 활동가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깊게 내려와 있었다. 나무는 베어져 있었고, 스티로폼에 심어놓은 꽃모종조차 길바닥에 패대기쳐져 있었다. 용산은 죽어야만 길이 열리는 곳으로 보였다.


그 어둡고 축축한 거리에서 땀을 훔치는 여름을 맞았을 때, 홀연히 찾아온 것이 《여기 사람이 있다》였다. 갈 곳 없이 막힌 단애절벽에서 처참한 절규를 토해내거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이들의 삶이 핏물처럼 배어나는 책, 《여기 사람이 있다》는 그런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생명은 누리는 게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임을 똑똑히 보았다. 철거민들의 절박한 싸움과정을 철거민의 입으로 구술한 《여기 사람이 있다》는 비록 참담할지언정 이런 길도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도록 나를 압도했다. 그 첫 장에서 대한주택공사와 싸운 일산 풍동의 철거민 성낙경 씨가 말했다.
“철거민이 되고자 해서 되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그런 현실에 대한 사회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 피해를 봐야 한다면 그 피해는 공공이 져야 한다는 거죠. 낙후된 곳을 개발하더라도 주민들이 피해를 받으면 안 되는데, 지금은 개발 때문에 오른 부동산 값을 세입자가 고스란히 부담하고 있잖아요. 기존에 살던 사람들의 삶과 생존권을 인정해주는 게 당연한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개발업자들은 분양사업으로 챙기는 이득금만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그들은 기존에 살던 사람들의 모든 권리와 생존권마저 가져가려 하죠. 마찰이 생길 수밖에요.”
송두리째 빼앗기만 할 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동안 철거민들은 오직 열려 있는 유일한 길로 달려간다. 그게 망루다. 내려와 땅으로 되돌아오는 길을 꿈꾸고 오른 길이었을 텐데, 길은 참혹하게도 지하이거나 하늘로만 열려 있다. ‘오산 수청동’이 감옥이라는 지하 길로 갔다면, ‘용산 남일당’은 하늘로 오르는 길로 가버렸다.
그런데도 투기꾼자본에 밀려난 철거민들의 아픔을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설가 K의 얘기가 있다. K는 80년대 후반, 처가 덕에 서울의 상계동 아파트 꼭대기 층을 분양받았다. 집 없이 떠돌던 그에게는 꿈같은 아파트였다. 소설가 K는 만족했다. 그러나 밤이 오고, 또 다른 밤이 오고, 또 다른 밤이 왔을 때 소설가 K는 통곡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곳에서 가슴을 치며 쫓겨났을 철거민들의 울음이 밤마다 아파트 꼭대기 층까지 들려오는 듯해서였다. K는 끝내 상계동 아파트를 팔아치우고 충북 청주의 한 농가로 이사하고 말았다. 돈 되는 아파트라고 너도나도 눈독들이던 시절, 2년만 갖고 있어도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던 고약한 시절, K는 철거민들의 울부짖음에 눈물겨워 돈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면서 상계동 아파트를 등지고 말았다.


철거민들의 이야기여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시종 처참하고 비정하다. 특히나 마지막 장은 《이게 인간인가》를 외친 아우슈비츠의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절규조차 가벼이 넘기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 철거용역들은 일흔을 넘긴 노인네의 따귀를 친다. 노인은 길바닥에 쓰러졌고 철거용역들은 모질게 밟아댄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에 놀라 노인의 아들이 달려온다. 철거용역들은 아들까지 패대기치고 짓이긴다. 분노와 모멸감, 땅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절벽이었다. 부자(父子)는 끝내 남일당 망루에 오른다. 철거용역들은 부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곳까지 따라 올라가 건물 3층을 점거한 채 폐타이어에 불을 지른다. 망루에 오른 부자를 비롯한 철거민들을 질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도 모자라 철거용역들은 소방호스를 들이대고 망루가 세워진 옥상을 물바다로 만들기까지 한다. 그리고 칼바람 부는 새벽, 경찰특공대, 철거용역들, 불, 불바다!
여섯 명이 세상을 등진 있을 수 없는 참사, 《여기 사람이 있다》는 그것도 길이었다고 그 길로 간 사람들의 얘기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책을 덮고 나서 나는 눈자위를 닦았다.
2009년 여름, 아내가 운영하는 홍대 앞 두리반 식당은 아직 건재했다. 그러나 주위는 이미 신산스러웠다. 80여 년 된 느티나무가 베어졌고, 라틴댄스학원은 알몸으로 쫓겨났다. 용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쓸어버리는 자들, 나무를 옮겨 심는 수고와 비용조차 아까워하는 자들, 평당 800만 원 하던 땅을 8천만 원에 매입하면서도 불과 3년밖에 안 된 가게를 알몸으로 내쫓는 자들, 그들의 살벌한 폭력을 무슨 수로 이겨낼 것인가. 수입원을 잃은 라틴댄스학원장은 벌써 거리를 헤매고 있다. 한때는 사장 소리를 들어가며 장사에 정성을 쏟았던 분홍신 주인 역시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고 있다. 그러니 나 역시 이미 쫓겨난 철거민들처럼 모진 삶을 감내해야 하는가.
 

《여기 사람이 있다》는 그런 내게 비록 하늘로 가는 길 외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길로 가야 함을 안내해주고 있다. 80여 년 된 느티나무를 단숨에 베어버리듯, 기존의 생명은 모두 뿌리 뽑아버리는 그악한 폭력에 의연히 맞서야 한다고 《여기 사람이 있다》는 안내해주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게 인간인가》보다 열 배는 더 잔인한 자들에게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 사람이 있다》는 안내해주고 있다.

뒷얘기
2009년 12월 24일 두리반 식당은 30여 명의 철거용역들에 의해 강제로 들려나갔다. 모든 집기를 들어낸 뒤 두리반엔 출입을 금하느라 철판까지 덧대어 놓았다. 그러나 다음날인 12월 25일 밤, 이 글을 쓴 유채림은 아내와 함께 철판을 뜯고 텅 빈 두리반 안으로 들어갔다. 5개월이 넘은 지금까지 철거농성 중이다. 현재, 투기꾼자본의 가혹한 폭력에 맞선 유채림 부부와 시장자본에 맞서 자기 음악을 고수하는 홍대 앞 인디밴드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은 싸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게 지혜의 마지막 결론임을 알고 있다.

•글을 쓴 유채림 님은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 《서쪽은 어둡다》 같은 장편과 《사북, 그 머나먼 길》, 《오후 4시》 같은 중단편을 발표했다. 현재 아내가 운영해 온 식당 두리반에서 강제철거에 맞서 농성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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