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 ]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식물이 하는 말들에 귀 기울이며 - 진도에 사는 농부 김종북

글 김성희 사진 장성백

 


진도에 사는 농부 김종북 씨에게는 온 국민이 지니고 있다는 ‘핸드폰’이 없다. 낮 동안은 농장에서 일을 하느라 전화통화가 어려웠고 해 진 뒤에야 연락이 닿았다. 아내가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검진 받으러 다닐 일이 있어 ‘찾아오더라도 대접하기는 어렵겠다’고 한다. 얼마나 경황이 없을까 싶어 방문이 망설여졌다. “아, 우리는 신앙 있는 사람들이라 마음에 둘 건 전혀 없어요. 다만, 대접할 형편이 안 된다는 말이지.” 병드는 일이나 살고 죽는 일 모두가 하늘의 뜻이니 애면글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믿는 이들의 속내가 정말 궁금한 순간은 이럴 때다. 거리에서 윽박지르듯 신앙을 강요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아니라 이렇게 담대하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이들을 만나는 순간 말이다.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남에게 쉽게 말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이다. 자식의 성적이나 심하면 남보다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조차 신앙의 힘이라고 하고, 어떤 목사는 미국이 저토록 안하무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를 요절내는 힘조차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그들의 신은 인격적으로도 그럴듯하지 않은 셈인데 그런 신앙이라면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싶으니 말이다. 
그이가 수십 년 가꿔온 농장은 국토의 서남단,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섬 진도에 있다. 진도(珍島). 보배로운 섬이라는 말일 것이다. 섬은 다리로 육지에 연결돼 있다. 길이 484m의 진도대교는 1984년에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울돌목 위를 가로질러 섬을 육지에 연결시켰다. 다리를 건너면서 왼편으로 솟아 있는 금골산이 보인다. 높이가 193m에 불과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우뚝 솟은 바위들이 여간 장쾌하지 않다. 금골산을 앞에 두고 왼편으로 꺾어 다시 산기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른편으로 돌아들면 예사롭지 않은 그 산을 북쪽으로 등지고 봉긋하게 솟은 완만한 구릉에 그들 부부의 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1만5천여 평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8천 평이 경작지고 나머지는 완만한 구릉의 임야다. 이 농장의 주작물인 월동무는 늦은 겨울인 2월까지 다 캐내고 밭에는 찰보리, 밀, 청보리가 파랗게 뒤덮여 있었다. 농장 곳곳에는 농사에 쓸 물을 모아 둔 둠벙이 있고 물가에는 창포나 붓꽃 같은 식물들이 서울보다는 한 달은 족히 빠르다싶게 피어 있었다. 도시에서는 듣기 어려운 새소리가 가끔 울릴 뿐 나뭇잎에 맺힌 이슬 굴러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밭둑에는 온갖 꽃들이 줄줄이 심어져 있었다. 김종북 씨와 그보다 한 살 아래인 아내 장금실 씨가 1984년에 이 농장에 자리 잡은 뒤 26년 동안 가꿔온 이 터전에는 온갖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일 년 내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농장을 방문하던 4월 중순에는 노랗고 하얀 수선화가 곳곳에 줄지어 한창이었다. “식물은 제 힘으로 옮겨 다니진 못하잖아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옮겨줘야 하니까, 2,3년에 한 번은 포기를 쪼개서 번식시켜요.” 처음 농장에 있던 수선화 단 여섯 뿌리를 정성껏 보살피며 뿌리 나눔을 해주어 이렇게 지천으로 번진 것이라고 한다.
일 년 내 농사일이 벅찰 텐데 그럴 짬이 나는가 묻자 “그걸 일로 생각하면 그렇게 못하겠지, 경제적인 일하고는 무관하지만 그 자체에서 재미와  보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농장을 한 바퀴 돌면서 농장 땅 어디 한 군데 빈틈없이 자연스레 번져 있는 온갖 풀과 나물을 설명할 때 가장 활력이 넘쳤다. 참나물, 어성초,  곰취, 치커리, 초록나물, 브로컬리, 싱아, 고수, 레몬밤, 민트, 박하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찰 만큼 수많은 나물과 향기로운 풀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수선화가 한창이었지만 이들이 지고나면 붓꽃과 사랑초, 범부채, 은방울꽃 같은 여름꽃들이 수확을 앞둔 황금빛 보리밭을 배경으로 뒤를 이을 것이고 가을이면 소국과 쑥부쟁이 같은 가을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이 아름다운 농장 풍경은 그가 수양록이나 일기를 쓰듯 거의 매일 글을 올리고 있는 블로그(http://blog.naver.com/mamuli0)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저 꽃나무는 영동에 있는 서순악 씨 농장에서 캐 와서 꽃 필 때마다 그 이를 떠올리지. 저 겹동백은 제주에서 온 것이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마다 이런 식의 사연과 역사가 배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일 년 온전하게 농장에 머물면서 땅과 함께 호흡하며 사철 피고 지는 온갖 꽃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농장의 고된 노동을 짐작하지 못하고 하는 감상적인 말일지 몰라도 자연에 깃들어 조화로운 그의 삶은 그만큼 충분히 충일하고 고요해 보였다.
“농사라는 게 출퇴근하듯이 하는 게 아니에요. 스물네 시간 부부가 함께 안팎으로 온종일 마음을 쏟으면서 작물들과 대화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가 농사에 대해 한두 마디씩 하는 말들은 얼핏 현자들의 잠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다시 유기농업이 시작된 1970년대 중반부터 사십년 가까이 생명농업을 실천해왔다. 분명 농사기술이 뛰어난 사람일 것이다. 한겨울 눈밭에서 수확하는 월동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무와 배추는 서늘한 기온을 좋아해 여름에는 강원도 산간의 고랭지채소가, 겨울에는 온난화로 김장철이 자꾸 늦춰지면서 해남 쪽까지 배추 산지가 내려와 있다고 한다. 남쪽 바다에 있는 진도라고는 해도 한겨울 삭풍이 몰아칠 때는 영하 5℃ 심지어는 영하 8℃까지 내려가기도 하는데 그런 환경에서 숱한 종자들을 실험하며 그는 눈밭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 안에 당분을 축적하는 월동무를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 당도가 일반 무에 비해 2배 이상 높기 때문에 월동무를 과일처럼 깎아먹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월동무를 한살림에 내면서 그의 생활과 농사는 전에 비해 한결 안정되었다고 한다. 농사짓는 데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묻자, 여전히 원거리 수송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물류비용이나 수확철에는 한겨울 노지에서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일당 7만원은 줘도 구하기 어려운 일손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에게 농사는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어쩌면 신앙생활의 연장이고 수행의 과정이라고 여겨졌다. 그 스스로도 농사야말로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세상 최고의 직업이라고  말했다. 그의 그런 생각 때문인지 그의 네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 한 사람만 공무원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큰 아이는 열여덟 살 때부터 소 쟁기질을 하고 농사가 대단하지. 나이에 비해 농사경력이 상당하니까.”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하면서 대개 농사일을 성심껏 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곡성에서 역시나 유기농 사과농사를 하고 있고, 넷째 아들 김주헌 씨는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한 뒤 아버지와 함께 농장 일을 하고 있다. 남들 같으면 목회자가 되었겠지만 그 아버지의 생각을 온전히 이어받은 탓인지 이제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농장에서 수행 같기도 하고 생업 같기도 한 그 농사를 이어갈 것이다.
그이는 1940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한 살이다. 일흔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게 카랑카랑하면서도 은은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농부가 될 꿈을 키워왔고 그 꿈을 이뤘으며 평생을 신념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종북 씨가 논밭에 자라는 작물이나 들꽃 한 송이마저 하느님의 지체고 함께 대화하는 생명으로 받드는 농사를 짓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스승들과의 인연에서 빚진 부분이 있을 것이었다.
“요즘 와서는 대안학교들을 말하지만 말하자면 일찍 대안교육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는 전쟁 직후의 대개가 그랬듯이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마침 임실 읍내에 한신대 출신 목사가 연 고등공민학교에서 중·고교 6년 과정을 4년 동안 마칠 수 있었다. 교회 장로들이 기증한 토지에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겠다는 포부로 세운 학교였다. 학생들은 대개 집이 멀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많았다. 학비를 따로 받지 않았고 여느 학교들보다 한 시간 이른 아침 7시부터 일과가 시작됐다. 학생들이 선생님들 땔감을 해드리기도 하고 학교 농지에서 수확한 쌀은 선생님들 양식으로 썼다. 농번기에는 이웃 주민들의 농지에 모를 심어주고 삯을 받아 그 돈으로 여느 학교들이 방학을 할 때면 산중이나 물가를 찾아가 학업을 계속했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고 있다는 자긍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 학교를 거쳐 그는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거창고등학교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전영창 선생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한 뒤, 피난지 부산에서부터 봉사활동을 하던 중 거창에 있던 작은 학교를 인수해 남다른 교육관으로 올곧은 인재들을 많이 길러낸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학교에서는 전영창 교장과의 인연 등으로 미국의 지인들이 보내온 후원금으로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 졸업생들의 학비를 지원했기 때문에 김종북 씨는 대학진학을 위해 거창고등학교에 편입했던 것이다. ‘월급이 적은 곳, 황무지로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식의 직업선택 십계를 가르쳤다는 그 학교에서 김종북 씨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립의 가치를 배웠다고 한다.
거창고등학교에서 그가 만난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원경선 씨였다. 그는 이 학교 이사장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원경선 씨와 함께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주요한 한 흐름을 일군 풀무원이 출범할 때부터 7년 동안 농장일을 도맡아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했다. 지금은 기업에서 인수해 같은 이름의 식품회사가 됐지만 당시의 풀무원은 원경선 씨가 이끌던 기독교 생활공동체였다. 풀무원 농장도 그때는 대개가 그랬듯 별다른 생각 없이 농약과 비료를 치고 있었다. 1974년경 일본 애농회 창시자 고다니 준이치(小谷純一)씨가 내는 《성령》이라는 잡지에서 농약과 화학비료로 짓는 농사는 사람과 환경을 죽이는 죽음의 농사라는 글을 읽고 원경선 씨는 충격을 받았다. 풀무원에서 1975년 9월에 고다니 준이치 씨를 초청 강연을 열고 이듬해 1월에 다시 초청강연을 열었다. 여기 참여했던 농부들이 결성한 것이 바로 ‘정농회’였다.
김종북 씨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내 장금실 씨는 꽃과 나무, 바람과 별, 심지어는 천둥과 벼락이 치는 날에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비바람을 맞을 때도 그 자연의 멋과 맛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면 감격에 겨워 남편을 마당으로 이끌어 하늘을 올려다보게 해도 김종북 씨는 “그런가? 뭐가 그렇게 좋아?” 하는 식이었다며 웃었다. 아내가 지금 살고 있는 농장을 일 년 내내 온갖 꽃이 만발한 천국처럼 가꾸었듯 풀무원에 살며 채소부장으로 일할 때도 작물들과 그렇게 대화하며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는 풀무원 농장에서 7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60여 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내 것 네 것 없이 한데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길가나 밭둑, 습지와 도랑가에 꽃을 가꾸는 일은 돈벌이와는 전혀 무관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음이 치유되었고 식물과 대화하는 일은 이들 부부에게 희열을 주었다. 하긴,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상처와 부담을 주기 쉽지만 숲속의 나무나 밭에서 평화롭게 자라는 곡식, 밭둑에 핀 양지꽃이나 수선화처럼 식물들은 오히려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긴장과 갈등을 치유해 주었다.
김종북 씨의 농장은 원래 진도 동광원이 있던 곳이다. 애초에는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쟁고아들이 많아지니까 이곳에도 동광원이 들어서 고아들을 거두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땅의 소유권은 동광원에 있다. 동광원은 맨발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현필 씨를 주축으로 기독교 수행과 사회운동을 해 온 공동체였다. 동광원은 전쟁 전후 고아들과 결핵환자들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의 고통을 거들자는 뜻으로 시작해 오늘날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동광원의 식구들은 이현필 씨의 가르침에 따라 결혼하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으며 병원에 가지 않고, 외부 원조 받지 않는 것을 중요한 실천덕목으로 지켜왔다고 한다. 학교나 병원이 대단한 선진 문명처럼 여겨지던 그 시절에 서양에서 온 교육과 서양식 의료가 자연과의 조화와 바른 섭생에 앞설 수 없다고 한 가르침은 어쩌면 지금 이 시대 사람들조차 미처 따라가기 벅찬 혜안으로 여겨진다. 또한, 온갖 오염물질에 범벅이 됐을 구호 밀가루가 우리의 농업과 자생력을 좀먹은 부분을 떠올려보면 그 가르침이 먼 미래를 꿰뚫어본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김종북 씨의 삶과 생각에는 동광원의 영향 역시 스며있는 것 같았다.
원경선 선생이 참여하는 기독동신회는 형식과 제도에 얽매인 기존교회의 한계를 넘어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지녔으며 이들에게는 오로지 성경과 평신도들끼리의 수평적 관계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각기 다양한 출발점과 배경을 지녔던 유영모, 이현필, 원경선 같은 이들과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김종북 씨는 청년에서 장년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또 스승들인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이 하루 한 끼나 두 끼만 먹으면서 몸도 마음도 가볍게 유지했던 것처럼 그는 하루 두 끼만 먹고 있다. 농장에 찾아오는 실습생들에게는 그것을 강요할 수 없으니 스스로 아침을 챙겨 먹도록 안내했다고 한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 후 네댓 시간 일을 하고 들어와 10시 전후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쉬다가 오후에 들에 나가 저녁 먹을 때까지 일을 하는 식의 일과를 수십 년 유지해왔을 것이다.  
김종북 씨는 1984년 풀무원 공동체에 있다가 진도로 내려왔다. 내려오기 훨씬 전에는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는 인연들을 듣다보니 1970년대 중반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한 줄기가 기독교 공동체 운동과 일본 애농회로부터 싹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줄기는 한살림으로 대표되는 원주에서 싹튼 생명운동, 동학에 뿌리가 닿아 있는 원주지역 협동운동과 이들과 인연이 닿아 있는 가톨릭농민회의 한 흐름일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신앙이 없고 상식적인 이해조차 일천한 기자에게는 김종북 선생의 말과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고 옮겨 적는 일조차 벅차고 힘겨웠다. 다만 교회에 다녀본 적 없는 이들에게도 큰 거부감 없이 깨달음과 감명을 준 유영모 선생이나 그 제자였던 함석헌 선생 그리고 이들과 종교적으로 이어져 있는 이현필, 원경선 선생과의 인연이 김종북 씨 부부의 삶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으려니 짐작할 따름이다.
“나는 농사기술이라는 말을 싫어해요. 적게 노력하고 많은 걸 얻겠다는 게 기술 아닐까요.” 평생 믿음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땅과 대화하며 살아온 김종북 씨가 ‘농사기술’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요령만 터득해 적은 노력으로 많은 보상을 얻으려는 생각은 결국 자본주의의 속성에 따른 것이고, 이런 생각들이 자연도 인간도 결국은 살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 했다. 적어도 농사를 짓는 일만큼은 기교를 부릴 게 아니라 순리대로 식물을 이해하고 보살펴주면서 대화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바른 농업이라고 여긴다.

“내가 밥이 되는 것이 십자가의 길인데 온통 이기려고들만 하는 게 자본의 논리고 돈의 힘이겠지요.” 그는 사람들이 돈을 맹목으로 좇는 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돈의 우상 맘몬(Mammon)을 섬기는 것처럼 여긴다. 예수께서 “너희가 하느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 농업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표현은 ‘걱정한다’가 아니라 ‘귀추가 주목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40만 세대 남짓한 ‘농업생산단위’를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펴겠다고 한 것이나 일부 생활협동조합을 표방하는 조직들조차 자본의 논리를 끌어다 경쟁을 추구하고 소비자들도 인터넷 실시간으로 가격을 비교해 한 푼이라도 더 싼 물품을 구매하는 일을 생활의 지혜정도로 여기는 지금의 세태에 대해 “그것은 자본의 논리인데…” 하면서 “우리 농업의 장래에 대해 귀추가 주목된다. 그 길을 선택하는 건 결국 우리 사회의 수준일 텐데…” 라고 했다. 그 표현은 직접 개입해서 기어이 바로잡겠다는 결기어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 절절하고 안타까운 걱정이 배어있는 말이라고 여겨졌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차분해졌으면 좋겠어요. 다들 이렇게 달려가고 있는데 명상을 하라고 할 수도 없고… ” 그는 지금은 꼭 그렇게 하진 못하지만 젊은 시절, 풀무원에서는 1년에 1달, 1달에 1주일, 하루에 한 시간은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아이들과도 하루 1시간 성경 읽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계승하고 있는 것도 그런 데서 나온 힘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대접받는 사람’ 되는 길만 가르치고 있다며 염려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영악스러운 아이들은 길러내는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생각이 여문 아이들은 보기 드문 것도 셈 빠르게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태 때문일 것이다.
“서로 나누고 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공동체의 정신이고 한살림의 정신도 거기 있을 텐데 이제 한살림도 변화하는 거대한 세태에 직면해 있어요. 진정성을 이해하는 소비자들이라면 당장의 몇 푼 이익이 아니라 멀리보고 속 깊은 선택을 해야 할 텐데 …”
조금씩 소박하게 먹으며 집착 없이 가볍게 살면서 서로를 섬기는 삶. 흙에 기대 살면서 꽃과 풀밭에서 자라는 작물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농업. 그가 젊은 시절부터 공동체에서 실천하며 추구해온 것은 이런 것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스스로 믿고 의지하는 신의 섭리에 따르는 일이며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경외감이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평생 망설임 없이 일관된 길을 묵묵히 걸어온 이들을 만날 때다. 믿음이 없는 이의 눈에도 그는 믿는 사람이고 믿음을 실천해온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삶과 죽음처럼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섭리가 관철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지혜롭게도 애달픈 집착은 일치감치 털어버리고 담대하게 망설임 없이 땅에 기대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