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살림,살림

[ 살리는 사람을 찾아서 ]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시골교회 임락경 목사

글 김선미 사진 류관희


시골교회 임락경 목사

 

꽃내로 가는 길은 첩첩이 산이었다. 옛사람도 ‘구름이 가까워 옷이 젖을’만큼 산이 높다 노래했던 곳. 산이 가로 막아 봄도 더디 오는지 서울에는 라일락이 피었는데 강원도 화천(華川)에는 산골짜기마다 노란 버짐 같은 산수유만 겨우 피었을 뿐이었다. 화천군 사내면 광덕2리 화악산자락에는 시골교회가 있다. 궁벽한 산마을에 있는 교회니 당연히 시골교회인데, 정작 간판에는 ‘시골집’이라고만 새겨놓았고, 십자가도 애써 찾아야만 보인다. 교회이니 당연히 목사가 있을 터인데 이 교회 목사는 스스로를 ‘촌놈’,‘돌파리’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말 그대로의 돌팔이가 아니라 돌파리(突破理)란다. 스스로 세상 이치를 돌파해 냈다는 뜻인데 그 이치를 설교대신 잔소리, 쓴소리라며 쏟아내는 이가 바로 임락경이다.
임락경 목사의 시골집에는 식구가 많다고 했다. 한 지붕 아래 한솥밥 먹는 이가 열 명이 넘는다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객이 많은 집이니 빈손으로 갈 수 없는 노릇인데 걱정이 앞섰다. 하나님 말씀보다 음식이 약도 되고 병도 만든다는 건강법을 전하는데 바쁜 어른이니 아무 먹을거리나 함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골교회 가는 길에는 그즈음 흔한 딸기를 파는 노점도, 요즘은 시골 읍내까지 들어선 대형 슈퍼마켓 따위도 없었다. 결국 동네 점방에 들어가 국내산 복분자로 만들었다는 음료수 박스를 마지못해 집어 들고는 내내 손이 부끄러웠다. 분명 복분자는 시늉만 내고 식품첨가물이 빠지지 않았을 제품일 터. 한적한 시골마을 점방에서는 음식다운 음식을 구경할 수 없었다. 신선하고 좋은 먹을거리들은 모두 대도시로 팔려나가고 시골의 곳간은 텅 비었는데도, 값싼 수입식료품들의 촉수는 온 나라 말단까지 뻗어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외양만 보면 시골 사람들은 대체 무얼 먹고 살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임락경 목사의 ‘시골집’에 와보면 그것이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된다.
 

목사 없이 살아도 농부 없인 살 수 없다
소 두 마리, 흑돼지 두 마리 그리고 십여 마리 닭들이 있는 가축우리로 울을 두르고 있는 앞마당에 차를 대고 ‘목사님’ 계신 곳을 찾는데 도통 인기척이 없다. 산비탈에 층층이 늘어선 시골교회 다락밭에는 푸성귀는커녕 아직 봄갈이도 못한 땅들도 많았다. 더디게 오는 계절처럼 모든 게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예배당도 없는 이 광야에서 ‘어디로 가야 목자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는데, 목공작업장으로 보이는 비닐하우스 안에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시골교회가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라는 걸 알고 갔지만 겉보기에 그들에게서 불편함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 중 한 사내가 ‘목사님은 산에 계신다’고 일러주었다. 산 쪽으로 올라가보니 커다란 가마솥 여섯 개가 걸려 있는 부뚜막과 연결된 유리온실로 만든 메주 건조장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수백 개는 족히 돼보이는(임 목사도 정확한 개수를 모른다 했다)의 장항아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산골에 고양이 오줌발처럼 옹색하게 찾아든 봄볕을 살뜰하게 쏙쏙 빨아들일 것처럼 암팡진 장독대였다. 이곳이 시골집의 살림밑천이다. 시골집에서는 한 해에 농약치지 않고 기른 콩 백 가마로 메주 오천 장을 빚어 ‘시골집표’ 된장을 만든다. 메주를 건조시키기 위해 지은 온실과 장독대 사이로 땔나무를 가득 싣고 산에서 내려온 트럭이 들어서고 이내 한 사람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이가 웃으니 작은 눈이 아예 보이질 않을 정도로 눈가 골 깊은 주름 속에 파묻혔다. 푸근한 첫인상이 편안했다. 임 목사는 나이로는 예순여섯 노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일손 귀한 시골에서 여전히 장정 몫의 일을 하고 있다. 더욱이 시골교회 식구들 가운데서 가장 노동력이 왕성한 일꾼이다. 목회활동이 아니라 건강교실 강의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니기 바쁜 그가 오랜만에 집에서 쉬고 있다 해서 달려왔는데, 그는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나무 한 차를 해가지고 하산하는 길이었다.
“메주 쑬 땔감을 짬날 때 부지런히 마련해야 하니까…”
그의 첫마디는 평생 바지런히 제 몸을 부려 식구들을 먹여 살린 이에게 일상의 쉼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목사는 집안에서 가장 너른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예배당이면서 식당이고 갖은 모임 장소로 쓰는 큰 방이라고 한다. 때마침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널찍한 통나무 탁자 앞에서 밥 때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들 마냥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시골집 식구들 곁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딱히 인터뷰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늘 한솥밥을 먹던 식구들처럼 밥상머리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이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승을 찾아 길을 나섰고 온몸으로 살아낸 과정이 곧 배움이 되어 오늘의 ‘목사 임락경’이 되었다고 한다.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그는 광주 무등산 자락의 기독교 공동체 동광원을 찾아갔다.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이 이끌던 자급자족하는 기독교 수도공동체로, 1948년 여순사건 뒤 전라도 지역에 급격히 늘어난 고아와 결핵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품고 길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맨날 이현필 선생님 이야기만 들었으니까… 빨리 커서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 뵙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지.”
그의 고향 교회의 오북한·배영진 장로, 농민운동을 하다 국회의원을 한 서경원 전 의원 아버지인 서재선 집사 등이 모두 이현필의 친구이자 동광원을 함께 만들어온 이들이라고 했다. 설교 때마다 ‘맨발의 성자’로 칭송받던 이현필의 이야기를 찬송가처럼 듣고 자란 소년은 요즘 아이들이 아이돌스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그와의 만남을 갈구했다. 임락경 목사는 신앙이 돈독했던 어른들 틈에서 자란 자신에게는 동광원을 찾아간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심상하게 말했지만, 듣는 이에게는 순수하게 영적인 이끌림을 따라간 범상치 않은 ‘결단’으로 여겨졌다. 고기 잡던 그물을 내팽개치고 떠돌이 예수를 따라 나서는 베드로의 심정이 그런 것이었을까. 그래서 집 떠나올 때 부모님들 반응이 어땠는지 조심스레 물으니, 당시는 ‘가난한 농촌에서 자식이 집을 나가면 고생스런 농사꾼은 안 될 테니까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며 웃는다.
하지만 정작 그는 스승을 만나기 전부터 평생 농사를 짓고 살겠다고 결심했단다.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출세는 공무원 되는 것이었다는데, “세상에 면서기는 없어도 살 수 있고, 목사 없으면 더 잘 살 수 있겠는데 농부가 없으면 당장 모두가 굶어죽겠더라”는 게 어린 시절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가톨릭농민회에서 열심히 활동했고, 30년 전부터는 화천 땅에서 자급하는 농사를 계속해오고 있다. 어려서는 부모님께서 하시던 전통방식 그대로 농사를 지었고, 1970년대 초 화학비료가 들어올 무렵에는 비료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전통유기농업을 지속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오니 정농회가 생겨 고민 없이 한평생 유기농만 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살아있는 역사로 그동안 화천군친환경농업인연합 창립회장, 북한강유기농연합 초대회장, 정농회 회장 등을 지냈고, 상지대 국제유기농센터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임 목사는 “그냥 농사꾼만 됐으면 가족들에게 그토록 핍박받진 않았을 텐데…” 라며 웃는다. 소년 임락경이 스승을 찾아간 동광원에서 그는 당시만 해도 죽을병으로 여겨지던 ‘폐병쟁이’들과 한식구가 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한 3년 봉사 잘하고 나도 죽을 줄 알았지. 그땐 살아서 군대까지 갈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당시 이현필의 가르침은 ‘병원 가지 마라, 학교 보내지 마라, 원조물자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외부의 도움 없이 검박하게 수도자의 길을 걷는 동광원 식구들에게 그것은 지금껏 이어져오는 생활의 지침이기도 하다. 이현필은 저잣거리 한가운데서만 신발을 신고 그 밖에서는 신을 아끼느라 맨발로 다닐 만큼 청빈한 이였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때 이미 우리나라 50년 후를 내다보고 계셨던가 봐요. 미국의 속셈도 빤히 아셨던 모양이지.”
오늘날 병원이 병을 만들고, 학교가 교육을 망치고 있으며, 미국의 남아도는 밀가루 원조 때문에 우리나라의 전통 농업기반과 식량자급체계가 무너진 현실을 두고 하는 이이야기였다. 임락경 목사 건강교실의 가르침도 이런 맥락에 닿아있다. 병원 약보다 먼저 바른 먹을거리로 병을 고치라는 것이 건강교실에서 제일 강조하는 바다. 또한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학교 담장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자식들도 학교 밖에 더 큰 배움과 가르침이 있다는 믿음으로 길러왔다. 또 수입식품 대신 이 땅에서 제철에 나고 자란 유기농산물을 먹고 살아야 건강하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의 건강을 되찾아 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은 임락경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병이 걸릴까 염려해 가까이 곁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선생을 생전에 만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평생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스승은 늘 곁에 장애인, 병자들과 함께 살면서도 자연스레 어우러져 살았다는데, 지금 임 목사의 시골교회가 꼭 그랬다.


그날 처음 그곳을 찾은 우리들도 자연스레 오랜 식구라도 되는 양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대자연의 품에서 알람 대신 해시계에 따라 일어나고, 바람과 새들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놀듯이 일하고, 별이 돋으면 잠자리에 들며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사는 시골교회 사람들과 도시에서 밤낮 없이 쫓기듯 일하며 시난고난 하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자리였다. 밥을 씹으면서 진정으로 병들고 장애를 가진 이는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밥상에는 김장김치와 검은 통깨를 뿌린 무나물, 표고버섯 볶음 그리고 특별식으로 직접 키우던 소에서 나왔다는 천엽을 넣어 끓인 맑은 뭇국이 노란 조를 섞어 지은 밥과 함께 나왔다. 시골집에서는 채식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유기농 농사에 필요한 퇴비를 자급하기 위해 가축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직접 기른 고기를 특별한 날마다 살뜰하게 먹고 있다고 한다. 이날 밥상에 오른 음식들은 김치를 빼고는 모두가 심심하고 담백했다. 교회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이애리 원장과 그와 함께 일하는 젊은 처자의 솜씨였다. 임 목사는 이애리 씨를 ‘스물여섯에 봉사하러 왔다가 ‘원장’ 감투를 쓰고 교회 살림을 맡는 바람에 지금껏 눌러앉았다고만 했다. 실은 임락경 목사와 부부사이다. 이 원장의 부엌살림을 도우며 밥을 짓던 처자 역시 건강교실에 참가했다가 아예 함께 생활하면서 몸을 고치겠다며 찾아온 식구라 했다. 이렇듯 시골집 울 안에서는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끼리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몸과 먹을거리가 나고 자란 땅은 하나의 생명
임락경 목사는 감리교육원(031-593-6080)에서만 올해로 9년째 1년에 6차례씩 건강교실을 열고 있다. 특히 암환자들 사이에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다. 《돌파리 잔소리》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 같은 책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이의 건강법은 적잖은 이들에게 새 삶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날 점심밥상에 함께 둘러앉은 이들 가운데도 서울에서 임 목사를 찾아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임 목사의 권유로 건강을 되찾고, 불임치료로 아기까지 얻었던 체험담을 간증하듯 털어놓았다.
“목사님 말씀이 제가 전라도 사람이라 짜고 맵게 먹고 자라다가 서울에 와 살면서도 계속 그 입맛을 고치지 못하니 아프다는 거였어요. 아이를 못 갖는 것도 자궁이 차서 아기씨가 얼어버리는 거라며 꿀을 먹어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하셨죠.”
스스로를 꿀 먹고 얻은 아이 ‘봉(蜂)순이’ 엄마라 소개한 이의 말을 듣자니 더욱 귀가 솔깃해졌다. 자신들의 주위에는 ‘봉순이와 봉돌이’ 부모를 자칭하는 임 목사의 추종세력들이 꽤 많다고 했다. 이들 부부에게 임 목사가 깨우쳐 준 것은 우리 몸이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과 먹을거리로 연결돼 있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치였다. 제철에 제 땅에서 나고 자란 음식을 먹고, 그 땅에 사는 사람의 몸이 구석구석 막힘없이 잘 움직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이 길고 봄이 더디게 오는 동네, 강원도 화악산 자락에 있는 시골집 식구들은 서울사람들처럼 한겨울에도 푸성귀와 과일을 대놓고 먹지 않는 탓에 오히려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겨울이 호되고 길어 작물 생육 기간과 농사기간도 짧은 편이라 식구들은 들판의 노동으로부터 한결 자유롭다. 또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겨우내 가을 햇빛으로 말린 나물과 갈무리해 둔 뿌리채소와 김장김치로 밥상을 차려야 몸이 차가워지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도시처럼 가까운 곳에 과일과 채소가 늘 즐비한 슈퍼마켓 같은 게 없어도 고기와 계란까지 자급하면서 이들은 하나도 아쉬울 게 없는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오히려 슈퍼마켓에 파는 식료품 대부분이 각종 첨가물이 범벅된 가공식품이거나 먼 나라에서 오래 전에 수확된 수입 농산물이기 십상이기에 이들의 자급생활이 오히려 건강의 비결인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임 목사가 의사도 아니면서 건강교실을 열 수 있을 만큼 우리 몸에 대해 해박해진 데는 동광원 시절부터 수많은 환자들의 병수발을 하면서 모시고 있던 최흥종 목사의 도움이 컸다. 의사면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최 목사는 소록도에 나환자갱생원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이다. 그는 평소 “한국인의 병은 미국인의 약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신념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며,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 일깨워주었다. 임 목사는 오랜 공동체 생활 속에서 이를 “쌀밥과 보리밥 먹고 자란 사람과 ‘빠다’ 먹고 자란 사람의 병이 같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때부터 줄곧 우리 몸과 음식의 관계로부터 질병을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선조들이 강조해 온 약식동원(藥食同源)을 실천하는 밥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의 먹을거리를 제대로 길러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 스스로 바른 농사를 짓는 데 앞장서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병이란 단지 먹을거리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입고 자는 것을 포함한 우리 생활 전체 또 개인과 사회의 마음 씀씀이까지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 아픈 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그는 그 시대마다 사람들이 많이 앓는 질병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의 결핵 환자들은 배고프고 가난한 사회가 낳은 질병이고, 오늘날의 암과 아토피는 환경을 파괴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가 ‘돌파리’라는 이름으로 건강한 생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서는 것도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곳부터 치유하려는 뜻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반상철폐가 우선이고, 일제 때는 독립운동, 독재정권 아래서는 민주화운동이 소중했듯이 지금은 파괴된 생태계의 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했다.
“전쟁이나 굶주림 때문에 죽은 사람보다 환경파괴 때문에 보이지 않게 죽어갈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거든요.”
예수의 성탄이나 부활, 재림도 모두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그는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부활도 ‘지금까지의 잘못된 생활을 고치고 새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했다. 임 목사는 농사가 생업이지만 아픈 사람을 돕는 사람 농사 때문에 좀체 농한기가 없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한 번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예배를 보는 목회자로서의 근본에는 변함이 없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요즘 무슨 기도를 주로 하시나요?” 하고 물었다. 입담 좋은 그는 “나는 어려서부터 기도(氣道)가 약해서 그런 거 잘 못해.” 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과 인간이 한 몸임을 깨닫지 못한 채 파괴를 일삼는 현실에 대한 걱정이 주된 화두라고만 답했다.
시골교회 밥상 앞에는 면 보자기에 오색 실로 수를 놓은 기도문이 있었다.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조화가 스며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이 담겨 있으니 감사한 맘으로 먹게 하시고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며 식탐 말게 하소서. 꼭꼭 씹어서 공손히 삼키겠습니다.”

 

→ 글을 쓴 김선미 님은 살림하면서 글을 쓰는 두 딸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깊이 만난 이야기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바람과 별의 집》 어린이를 위한 장일순 이야기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단다》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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