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특집] 설탕, 그 달콤하고 씁쓸함에 대하여

[ 설탕의 역사 ② ]

우리 역사에 등장한 설탕, 그리 큰 충격을 주진 않았다

글 정창수


우리 역사에 등장한 설탕,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은 설탕의 등장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설탕을 안 것은 유럽보다 훨씬 더 먼저였으나 유럽처럼 문화적 충격과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각종 당분이 함유된 엿이나 감주 같은 맥아당 성분의 감미료와 관련한 음료가 이미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기록에 튀긴 곡류와 엿을 이용하여 만든 과자류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훨씬 이전부터 엿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제례와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수로왕묘제수(祭需)에 과가 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수로 쓰인 ‘과’는 본래 과일이다. 그런데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과일을 대체해서 곡식가루로 과일의 형태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이 과자의 시작이다. 학자들은 이런 과자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엿을 들고 있다. 따라서 엿은 과일 대용일 뿐만 아니라 제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유력한 추정이다. 모든 단 것은 종교와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엿과 함께 단맛을 지켜온 것은 꿀이다. 이미 로마시대부터도 꿀이 있었던 것처럼 꽃과 벌이 있는 곳이라면 서양은 물론 우리 역사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다만 생산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다. 값이 비싸서 대중들은 약으로나마 아주 드물게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곡물과 엿기름을 이용하여 식혜에서 조청까지 손쉽게 그리고 값싸게 단맛을 만들어 낼 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설탕 이전의 대표적인 감미료는 꿀이 아니라 조청이었다. 또한 엿과 꿀은 독립된 전통식품으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결국 설탕으로 인해서 우리가 단맛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단맛을 내는 감미료에 설탕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당은 설탕말고도 다른 음식물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 큰 충격을 주진 않았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
설탕이 우리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명종때 이인로의 《파안집》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고려 명종 이전에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의 설탕은 상류층에서 약용이나 기호식품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설탕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20세기 초로 추정된다. 일제가 타이완을 침공한 뒤 설탕이 유입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설탕과 팥이 든 빵과 양과자, 왜식 찹쌀떡이 선보인 것이다. 한편 사탕무로 만든 설탕이 국내에서 1920년대부터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강점기인 1920년 평양에 사탕무를 원료로 하는 제당공장이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생산능력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은 일본에서 생산가공한 것을 소비하게 되는데, 귀중품이기는 해도 특권층의 전유물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1925년 동아일보에는 설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기사의 내용이 재미있다. 요지는 이렇다. “설탕 소비량으로 선진화 수준을 측정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설탕은 소금과 달리 필수 조미료가 아니다. 만성적으로 설탕을 먹으면 독이 된다. 설탕 대신 꿀이 좋다.” 마치 요즘 환경운동 하는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이미 그때에도 음식과 건강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939년 2차대전이 일어나고 나서부터는 설탕 배급제가 실시된다. 그만큼 설탕이 대중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 물가조사한 것을 보면 같은 무게의 쇠고기 보다 2배가 비쌌을 정도이다. 현재는 10분의 1 가격이다. 

설탕의 대중화와 삼백 밀수사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설탕을 먹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이다. 맨 처음 설탕을 생산한 것은 1953년 11월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현 CJ)이다. 설탕은 한국 제조업의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제일제당은 해방 후 남한에 건설된 최초의 현대적 대규모 생산시설이었다. 그가 첫 번째 제조업으로 설탕을 선택한 이유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장 빨리 설립할 수 있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한에는 설탕 생산시설이 전무했다. 이 때문에 설탕의 국내 가격은 국제 가격의 3배나 됐다. 제일제당의 설립으로 1953년 남한의 설탕 수입 의존도는 100%였으나 54년 51%, 56년에는 불과 7%로 뚝 떨어졌다. 해외 원조물자 중 하나이던 원당을 가공해 설탕을 만들었다. 하루 생산능력은 25톤 정도로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오후에 한 트럭의 돈이 들어올 정도’라고 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아무튼 1960년대부터는 음식에 설탕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물론 짠맛이나 기타 양념 맛도 동시에 강해지는 때이지만 설탕의 소비증가는 두드러진다. 1960, 70년대 자라난 사람들이 ‘뽑기’와 ‘달고나’에 열광했던 것은 요즘보다 설탕이 귀했기 때문이다.
신세계 상업사박물관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인기 있는 명절 선물은 설탕·밀가루와 쌀·계란·돼지고기·참기름 등 농수산물이었다. 설탕은 특히 물자가 부족했던 이 시대에 최고의 선물이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설탕물을 대접하는 경우도 흔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국내 설탕 소비량도 크게 늘었다. 국제설탕협회(ISO)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2005년 기준으로 26㎏이다. 그리고 설탕소비가 가장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1998년 전후이다. 외식문화의 급격한 확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설탕 소비량은 국민소득과 비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2005년 설탕소비량을 보면 스와질랜드(97.4kg), 싱가포르(73.4kg), 브라질(59.2kg), 태국(35.0kg), 미국(31.3kg), 한국(26.0kg), 일본(18.8kg) 등이다. 소득수준보다는 오히려 비만도와 더 상관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고 한국이 설탕을 적게 먹는 것은 아니다. 2009년 설탕 소비량은 대략 26kg이다. 하지만 쌀 소비량은 74kg이다. 한마디로 밥 세 숟가락에 설탕 한 숟가락을 먹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등장하는 설탕
1950년 한국경제는 미국의 원조경제였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가 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가 현재 우리 정부의 회계연도다. 그런데 이 회계연도가 없는 해가 있다. 바로 1956년도다. 미국의 원조물자를 받아 우리 예산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당시 회계연도는 일제시대부터 쓰던 4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인 회계연도였다. 그런데 미국의 회계연도는 10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다. 그래서 예산을 사용하는 데 비효율적이었다. 따라서 1954년 회계연도를 6월까지 연장하고 1955년도 회계연도를 그 다음해 12월까지 연장해 1956년도 회계연도를 없애버린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중앙정부의 예산이 통과된 것을 예산에 포함시키기 위해 3월 추경을 하듯이 아마도 그 시기는 미국이 중앙정부 역할을 했던 셈이다.
미국의 경제원조는 친미반공정권 유지·육성자금원,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장, 군수산업의 시장, 대공산권 방어기지를 만드는 재원으로 이용되었다. 미국의 원조물자는 주로 소비재와 소비재 산업의 원료로서 50년대 한국의 공업화를 주도한 부문은 ‘삼백공업’(면방, 설탕, 밀가루)이었다. 미국 잉여농산물의 무분별한 국내 반입은 국내 밀, 면화 생산의 도태와 농업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미국의 경제원조는 한국경제를 철저히 종속시켰다.
또한 이런 대외 의존적 경제는 부패를 양산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분폭리사건’이다. 1964년 한 야당의원이 폭로한 내용은 “밀가루·설탕·시멘트 등 이른바 ‘삼분산업’과 관련된 기업들이 매점매석으로 가격을 조작하고 세금포탈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을 묵인하는 대가로 공화당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는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이 연루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를 보도한 경향신문을 삼성이 수십만 부를 사들이는 바람에 경향신문은 창간 이래 최대 부수를 팔았다고 한다. 삼성은 맞고소를 하면서 공격했지만, 훗날 박정희 정권이 이 사건의 반대급부로 3천800만 달러를 받았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경향과 삼성의 악연은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이어진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대신에 식료품이 단맛을 내는데 쓰이던 감미료였다. 요즘은 아스파탐이나 수크랄로스 등 다른 화학감미료가 많지만 당시에는 저렴한 값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이것을 건설자재로 몰래 들여오다 세관에 적발된 것이다. 이 밀수사건은 삼성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통해 여론화를 막고, 직원 개인의 문제로 덮어버리려 했으나 그 유명한 김두한의 국회 똥물투척사건으로 더 이상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득이 삼성은 한국비료를 헌납하고 사건을 무마하게 된다. 하지만 훗날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이것은 당시 박정권과 삼성이 함께 진행한 사업이었음을 밝혀, 독재정권과 재벌의 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 글을 쓴 정창수 님은 시민단체, ‘함께하는시민행동’에서 오래 일했으며 현재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 역사평론을 《시민의 신문》 등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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