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특집] 설탕, 그 달콤하고 씁쓸함에 대하여

[ 설탕의 역사 ① ]

피와 눈물로 점철된 슈거로드

글 윤은정


 영국 역사학자 노엘 디어는 “2천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무역에 희생된 것은 설탕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설탕이 지나간 자리는 온통 피와 눈물 투성이다. 설탕을 유럽에 확산시킨 이슬람 제국, 더 많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끌려온 노예들, 설탕과 노예의 이동 경로인 대서양을 사수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까지. 전쟁과 침략의 중심에 설탕이 있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슬람 제국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세계사의 패권이 옮겨갈 때마다 승자들은 어김없이 설탕도 장악했다.

기원전~8세기 _ 인도의 설탕, 코란과 함께 세계로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서태평양의 뉴기니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8천 년 이곳에서 처음 재배되다가 인도로 전파된 뒤 설탕의 모양으로 추출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설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기원전 327년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로 원정군을 보냈을 당시 사령관이었던 네아르코스 장군은 인더스강 근처에서 사탕수수를 발견했다. 그는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꿀을 만들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에는 인도에 주재했던 그리스인 에가스테네스가 설탕을 ‘돌꿀(石蜜)’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그 당시 이미 고형의 설탕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시절 인도에서 생산된 설탕은 상인들을 통해 아랍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동쪽으로는 인도·인도네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터키와 북아프리카로 설탕이 보급됐다. 8세기에는 이슬람이 스페인을 점령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설탕이 유럽 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설탕이 약품, 향신료, 장식재료, 방부재 등으로 쓰였을 뿐 식량으로서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11~13세기 _ 십자군 전쟁을 틈탄 설탕의 유혹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아랍인들은 풍부한 설탕을 만끽하며 단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설탕에 길들여진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설탕은 정치적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이슬람의 숙적이던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슬람에 빼앗긴 성지를 되찾겠다고 전쟁에 나섰던 십자군이 이슬람의 음식 맛을 알게 되고 그들 중 일부는 전쟁은 뒷전으로 미룬 채 설탕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이렇듯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설탕은 유럽으로 확산됐다.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십자군을 부활시켜 이슬람 세력을 다시 공격하려고 했는데, 이는 이슬람이 소유한 사탕수수 경작지를 빼앗아 이득을 챙기자는 속셈 때문이었다고 한다. 1226년 영국의 헨리3세 재위 당시 3파운드(1.4㎏) 정도였던 왕실의 설탕 소비가 1288년에는 6천258파운드(2천800㎏)로 급증한 것만 보더라도 설탕이 권력의 상징으로 부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16세기 _ 신대륙 발견과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
 유럽에서 설탕 경쟁 초기에 가장 선봉에 섰던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그들은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슬람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유하고 있었을 당시 사탕수수 경작법을 배워둔 덕분이었다. 1444년 포르투갈의 항해 왕 엔리케는 이슬람의 세력이 미치지 않은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을 다니며 사탕수수밭을 찾아 헤매다가 아프리카 원주민 235명을 데려와 노예로 팔았다. 이들이 사탕수수가 자라는 열대기후를 잘 견뎌낼 일꾼들이라는 이유였다. 이로써 설탕산업을 위한 노예무역의 첫 단추가 채워졌다.
 지중해 연안에서 재배되던 사탕수수는 대서양 연안의 마데이라 제도, 카나리아 제도 등을 거쳐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졌다. 1493년 콜럼버스가 두 번째 신대륙 항해를 할 때 카나리아 제도의 사탕수수가 카리브해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곳의 고온다습한 기후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해, 유럽인들은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고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멕시코, 브라질 등 남미에도 사탕수수 농장이 들어섰다. 16세기 중엽에는 150~200명의 노예들을 소유한 농장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설탕산업이 날로 번성하면서 달콤함에 중독된 유럽인들의 욕구도 덩달아 높아졌다.

17세기 _ 삼각무역에 희생된 노예들
 유럽인들은 면직물·총기·유리구슬 등을 배에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 노예를 사들인 다음, 남미와 카리브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담배·면화 등을 사서 유럽에 갖다 팔아 돈을 벌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이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설탕에서 세금과 관세를 거둬야 하는 정부는 사탕수수 농장주와 무역상, 선주들의 노예사냥을 묵인했다.
 1800년 이전에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 75%는 아프리카인이었다. 아프리카 볼타 강 동쪽으로부터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라고스에 이르는 지역은 ‘노예해안(Slave Coast)’이라 불릴 만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희생이 많았다. 하지만 신대륙으로 간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은 3년을 못 넘기고 죽음을 맞았다. 하루 20시간에 달하는 고된 노동을 견디기 힘든 탓이었다.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베어 공장으로 운반하는 것부터, 사탕수수를 압착하고 즙을 낸 다음 큰 솥에서 끓여 정제설탕을 만드는 데, 이때 필요한 땔감을 구하는 일 등이 모두 노예들의 몫이었다. 검은 노예들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새하얀 설탕이 만들어진 셈이다.

18~19세기 _ 대중화된 저가 설탕과 산업혁명
 노예 무역이 확대되고 플랜테이션이 자리 잡으면서 유럽으로 실려 가는 설탕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특히 설탕의 최대 소비국이던 영국에서는 설탕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1700년 영국의 연간 설탕 소비량은 무려 2천만 파운드. 1800년에는 1억 6천만 파운드로 100년 동안 여덟 배나 증가했다. 이제 설탕은 더 이상 일부 특권층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값싼 설탕은 굶주린 노동자들의 열량 공급원이 되어 산업혁명에 기여하기도 했다. 설탕을 잔뜩 탄 홍차와 오트밀이 노동자의 아침식사가 된 것이다. 여성과 아이들은 설탕이 듬뿍 들어간 빵이나 과자로 허기를 달랬다. 1900년경 영국인들이 총 칼로리의 20% 가량을 설탕에서 섭취했을 정도이다.
설탕의 저가 행진을 부채질한 또 다른 원인은 사탕무를 활용한 설탕 제조기술의 발달이었다. 신대륙의 사탕수수를 견제하기 위해 등장한 유럽산 사탕무는 독일과 프랑스가 앞장서 확산시켰다. 식민지 경쟁에서 뒤진 독일은 1799년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해 냈고, 프랑스는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설탕 수입이 막히자 사탕무 재배에 눈을 돌렸다. 게다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기술이 발달하면서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탕무 설탕이 사탕수수 설탕의 생산량을 앞지르게 된다.

20세기~현재 _ 미국의 제패, 현재진행형 무역 분쟁
 유럽 내륙에서 사탕무 재배가 가능해지고 증기기관을 이용해 설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1807년 프랑스가 처음으로 노예무역을 법으로 금지했다. 영국도 1833년 식민지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은 채 설탕산업의 전성기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미국은 쿠바에 대규모 경제 식민지를 건설해 사탕수수 필요량의 90% 가량을 충당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을 소비하고 있었다. 1893년 미국의 설탕 소비는 1865년의 전 세계 설탕 생산량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오늘날도 설탕은 분쟁의 요인이 되고 있다. 2009년 가뭄으로 설탕 공급이 감소하면서 2010년 초 설탕값이 치솟자 설탕 수출국 간에는 살벌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럽연합(EU)이 연간 수출량을 135만 톤으로 제한하기로 한 합의를 깨고 설탕 수출을 50만 톤 늘리겠다고 나서자, 브라질·호주·태국 등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뜻을 비친 것. 하지만 설탕 대란이 올 것이라던 전망은 빗나갔고, 설탕 가격은 1980년대 이래 가장 가파른 가격 하락세를 기록 중이다. 여전히 설탕에 울고 웃는 인류. 설탕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고대 인류는 어떻게 단맛을 섭취했을까?
설탕이 개발되기 전까지 수천 년간 인류는 설탕을 몰랐다. 아몬드나 호두 같은 견과류, 사과와 올리브 같은 과실, 보리와 밀 같은 곡류, 오이와 양파 같은 채소, 우유와 꿀 같은 수많은 음식이 단맛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식품은 자연 그대로의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고대인들이 가장 손쉽게 접했던 천연감미료는 바로 꿀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꿀을 ‘신들의 식량’이라 했고, 로마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여겼다. 그 외에 대추야자즙, 무화과즙, 포도즙, 사탕수수즙 등도 사용되었다.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는 야자즙과 대추야자가 대중적인 감미료로 사용되었다. 아랍권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대추야자시럽이 꿀의 대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화과도 그리스에서는 꿀의 대체물 역할을 했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인들은 포도나 무화과로 만든 시럽을 유럽의 다른 지역에 수출하기도 했다. 한편 쌀을 주식으로 하던 동양은 단맛을 만들어내기 위해 엿을 개발했고, 서양은 밀이 엿을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아 당도 높은 과일들을 졸여 잼을 만들곤 했다.

*참고문헌 《슈거블루스》 《설탕의 세계사》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설탕의 역사》 《설탕과 권력》 《설탕-잘먹고 잘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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