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호 2010년 여름 [특집] 설탕, 그 달콤하고 씁쓸함에 대하여

[ 여는 글 ]

단맛은 맛이 아니다

글 천규석

설탕, 커피 등의 생산농민들에게 시중보다 20~30%의 가격을 더 주고 수입해다 파는 공정무역이 말 그대로 공정한 것이 아닌 이유는 많지만, 지면의 허용범위에서 몇 가지만 약술한다.

그 하나는 공정무역이 그 생산농민과 노동자들의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커피공정무역협동조합’이 있는 나라다. 이 나라의 야부나라는 마을도 커피의 공정무역으로 ‘희망을 제작’하며 20%쯤 더 받는 배당금으로 마을의 수도 펌프를 설치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07년 9월 19일 《한겨례 신문》의 <에티오피아의 공정무역 유기농 커피>라는 기사에 의하면 이 마을의 원로인 메코넨이 “여전히 (공정무역) 커피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커피 밭 옆에 유럽에서 금지된 마약성분이 들어 있는 카트 나무를 심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기자에게 고백했다. 마을에 우물 펌프를 묻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고 마을의 가난이 해소될 수는 결코 없다. 우물펌프는 강물도 돈 주고 사먹는 봉이 김선달식 유료수도시대의 전주곡이고 아이를 제도권 학교에 보내는 것은 무한경쟁의 교육시장에 들러리서기로 진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 단체나 유명 연예인들이 아프리카 등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거나 수도펌프를 설치해 주는 것까지는 선행으로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단체나 개인들이 아이들과 무슨 결연을 맺고 눈물을 짜내며, 학교에 보내주는 것으로 그 선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과 제도 교육기구는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우골탑’(1950~60년대의 한국 대학은 주로 다수 농민들이 소 팔고 논 팔아 마련한 등록금으로 지었다고 해서 우골탑이라고 불리웠다.)을 거쳐 학부모들의 등골을 빼가는 ‘인골탑’으로, 모든 사람을 끝없는 경쟁과 수탈로 몰아넣고, 인간다운 우애와 협동의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는 ‘블랙홀’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삶은 이만큼 근대화되었고, 공정무역품까지 수입하는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하지만 모두가 근대화되면 근대화 안 된 것과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근대화를 뒤 받칠 석유자원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 자원이 풍부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아프리카나 중남미 자신을 위해 우리처럼 낭비할 자원은 선진국들이 남겨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아이들의 교육은 우리와 다른 방향의 길을 스스로 찾아내 가게 해주어야지 우리와 같은 경쟁주의 교육에 편입시켜주는 것으로 그 가난 구제를 다해준 것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 시민 사회 일부에서도 그것을 일찍부터 인정하고, 이미 대안도 못되지만 한때 ‘대안교육’이란 것에 열을 올린 적이 있지 않은가? 공정무역의 블랙홀은 이런 제도 교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페루의 한 공정무역 마을을 방문한 《공정한 무역 가능한 일인가》 (장윤정 역, 이후, 2007년)의 저자 데이비드 랜섬이 그 마을을 떠날 때의 ‘고별식’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형 카메라로 무장했는데 이건 지난해 급등했던 커피값으로 생긴 수입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마을 가게에도 생선 통조림, 쌀, 코카콜라뿐 아니라 진짜 샴페인도 있었다.” 역시 페루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빼온(peon)이라 불리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등 번호가 새겨진 최신 축구 셔츠를 입고’ 일요일 등 휴일에는 축구놀이를 한다고 한다. 공정무역에서 얻은 이익의 모두를 이런 식으로 세계시장에 되돌려주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대로 두고서는 그 가난을 결코 벗어나게 할 수 없다.

공정무역주의자들은 그 기호품들이 시중 것과 달리 유기농으로 생산되었다는 데 또 하나의 자기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유기농 시장주의자들은 유기농마저 농약과 비료를 안치거나 적게 치는 것만으로 오해하거나, 혹은 알고도 악용한다. 유기농의 진정한 목적이나 1차적 정당성은 농약과 비료를 안치는 데만 있지 않고 다른 뭇 생명들과 공생하는 지역 순환성과 지속성에 있다.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는 이유도 생산자나 소비자의 건강뿐만 아니라 지역 자급적 순환을 통한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다. 공정무역 농산물에 과연 농약과 비료를 안치는 것인지, 재배 때는 안친다 해도 장기 보관과 유통을 위해 수확후 처리는 하지 않는 것인지 더욱 검증하기 쉽지 않다.

다른 작물보다 재배가 더 까다로운 사탕수수나 커피 재배를 무농약, 무비료로 키우려면 가능한 연작을 피하고 산림 등을 벌채한 신개간지로 계속 이동하면서 재배해야 한다. 공정무역 농산물의 생산을 위해서는 이 같은 열대우림 파괴도 정당화되는가? 실제로 공정무역 농산물의 생산지역에서도 벌목과 화전개간이 확대돼 산사태가 되풀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공정무역 농산물이 역설적으로 다른 생명과의 공생을 오히려 파괴하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것은 농약과 비료를 안치는 지역의 유기농산물도 일단 배나 비행기에 실려 생태적 순환지역을 벗어나는 순간 유기물의 지역 순환을 차단하는 반유기적 생산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에너지를 크게 낭비하고 대기를 오염시키는 장거리 수출입 자체가 반유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정무역의 신화가 확산되면 그만큼 그 물량도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공정무역품의 수출입이라고 그 운송에 석유 등의 에너지가 적게 들고 따라서 오염 물질은 적게 내놓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공정무역이 우리가 당면한 환경문제, 에너지문제, 인류의 미래 건강문제 등의 세계적인 모순을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그 모순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켜 그 재생산에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공정무역 신화의 확대로 인한 문제는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15세기 이후부터의 서구 식민주의의 상업농을 위한 농업의 국제분업과 단작농업으로의 구조조정을 정당화하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신자유주의무역도 정당화한다. 공정무역 생산 농민과 노동자들의 세계시장 예속을 정당화하고, 공정무역 농산물 수입으로 인한 각 지역 농민·농촌들의 몰락을 정당화할 것이다. 흔히 공정무역품은 국내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 농민에게 주는 피해는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정무역으로 면죄부를 받아 설탕이나 커피 등의 기호품을 더 수입해 먹는 만큼 꿀, 차류, 음료류 생산 농민은 물론 쌀 등의 당류 원료를 생산하는 우리 농민도 몰락해 갈 것이다. 공정무역도 세계무역처럼 생산국이나 수입국 모두 자급경제 비율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높아질 것은 국제분업과 예속, 에너지 파괴량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 비율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아무리 공정무역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지역자급순환을 강조해도 이에 마음을 닫은 현실론자들이 압도적일 것이다. 거의 모든 유통(상업)식품에 다 들어가는 설탕을 대체할 다른 값싼 당류가 없는데 어쩔 것인가? 어차피 먹지 않고는 안 될 설탕이라면 그래도 다국적기업의 수입품보다는 상대적으로 생산 농민과 노동자들의 이익이 늘어나고 우리 소비자의 건강에도 유익한(?) 공정무역 설탕이 현실 아니냐? 설탕의 대체품도 없이 또 그것을 판매하지 않아 입는 소상인들의 영업 손해를 고려하지 않는 원칙주의는 무책임한 이상론이 아니냐고? 그것으로 자기 양심에 위안과 면죄부를 주려는 착한(?) 소비자들의 심리는 십분 이해하지만 그런 식의 현실 개량주의로 자기를 합리화, 정당화하는 것은 적어도 자식을 낳고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의 도리는 아닐 것이다. 정말 무책임한 자는 공정무역을 반대하는 이상주의적 원칙론자들이 아니고 자식을 위한다면서도 남의 몫과 미래의 자식들 몫까지 깡그리 다 먹어 치우려는 탐욕스런 현실주의자들일 것이다. 진정한 윤리적 소비는 제 땅에서 재생 순환되는 것으로 자급하는 자족소비뿐이다.

유럽 식민주의자들과는 달리 이 땅에서 설탕, 커피 등의 기호품들이 대중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부터로, 불과 40년 전부터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 없이 못산다며, 이미 그 기호품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 노예란 강자들에게 예속되어 짐승처럼 매매되는 사람을 뜻하지만, 오늘날의 강자인 시장자본에 의한 물량공세 앞에서 그 선택이 비주체적이거나 자유롭지 못한 대중은 전자 못지않은 심각한 노예 상태가 아닐까? 특히 이런 기호식품들은 그 생산이 처음부터 노예노동으로 이루어졌고 지금도 개선은 되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변한 게 없다. 노예 자신뿐 아니라 노예를 부리는 자와 노예노동의 상품을 소비하는 자 역시 노예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설탕의 단맛도 마찬가지다. 16세기부터 유럽 제국주의자들과 그 뒤를 이은 시장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획일적으로 길들여진 맛, 세뇌된 맛이다. 설탕은 설탕 권력에 의해 강제적 폭력적으로 합법화된 마약이다. 이 강제된 단맛에 의해 우리는 음식 고유의 풍미를 모두 잃었고, 모두가 단맛 하나에 중독되고 말았다. 설탕으로 음식의 참맛만 잃은 게 아니고 인간의 창조성과 개성, 그리고 인간미(人間味)도 함께 잃고 설탕권력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설탕을 적게 쓰거나 멀리하는 것은 잃어버린 음식의 참맛을 회복하는 길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설탕시장권력의 마수에 노예가 된 우리 몸과 영혼을 해방하는 주권회복의 길이기도 하다.

나는 그 지속불가능성 때문에 대규모 상업 축산을 반대하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잡식으로 진화한 인간이 자연계에서 생태적으로 서식하는 동물과 어류까지 거부하면 인간 먹거리의 총량과 질이 너무나도 제한되기 때문이다. 생태적 균형을 깨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잡식은 오히려 생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바다에서 잡는 생선 외의 축산물과 심지어 상당량의 생선까지도 사료에 의한 양식으로 생산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먹기 위해 돈 주고 고기를 사는 일은 없다. 대규모 상업 축산은 생태적 지속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사육과 도축 과정이 너무나 반생명적으로 잔혹스럽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 고기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상업적 먹을거리는 모르고는 모르되, 알고 보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제 맛인 게 하나도 없다. 설탕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설탕은 우리 몸속의 뼈와 치아에 손상을 주는 칼슘 도적이라고도 하고, 당뇨의 금기 식품이자 유발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설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저 카리브해와 중남미지역 원주민들의 절멸의 역사와 아프리카에서 참혹하게 사냥당해간 설탕플랜테이션의 흑인 노예들의 피땀과 못다산 목숨들이 절규하는 원혼을 상기하면 결코 그 맛이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설탕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설탕이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꿀, 조청, 감주 등이 그 대체품 구실을 해왔다. 사람들이 설탕 대신 이런 토착식품의 소비를 늘려준다면 이로부터 설탕과 유사한 새로운 대체품의 연구 개발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설탕 없이 못 사는 사람들은 굳이 공정무역 설탕보다는 차라리 믿기 어렵기 때문에 시중 설탕을 최소로 소비하는 태도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윤리적이고 착한 소비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정무역 소비자처럼 설탕값 몇 푼 더 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과 면죄부를 얻어 설탕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 보다는 훨씬 솔직하고 양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 천규석 님은 한살림대구 이사장입니다. 최근에 나온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외 다수의 저서를 통해 위와 같이 고독한 원칙주의적 소수의견을 거듭 개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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