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0호 2008년 봄 살림,살림

[ 오 마이 달걀 2 ]

암탉,자유연애를 꿈꾸다

글 한정혜


<야생의 충고, 폐계 부활하다>

 

모이를 쪼아 먹을 때마다 하늘로 향하는 통통한 엉덩이의 움직임이 명랑하다. “요즘 이런 풍경 시골서도 보기 힘들죠? 이렇게 풀어놓고 닭 키우는 곳 없을 거예요.” 어라, 닭이 말을 하네? 닭은, 사람들은 야 이 토종닭 봐라, 살이 토실토실 올랐구나, 라고 말하겠지만 실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폐계(먹는 것에 비해 알 넣는 능력이 떨어져 양계장에서 퇴출당한 산란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 <야생의 충고-폐계, 부활하다>(제작 푸른별영상)는 닭의 입장에서 폐계 한 마리의 일생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가히 폐계의 자서전이라 할 만하며, 우리가 먹는 그 달걀이 어떻게 나고,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를 밝히는 대단히 흥미로운 보고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말을 건넨 폐계는 운이 좋아 다른 친구들이 포장마차로, 소시지 공장으로 팔려나갈 적에 포대에 담겨 어느 농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그 전까지는 한 많은 인생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폐계의 이야기가 시종 우울하거나 무겁지 않은 것은 극 중 흐르는 예쁜 음악 선율과 여성 내레이터의 상냥한 목소리 덕분이다. 물론 최고 일등 공신은 재기발랄하고 매사 더할 수 없이 긍정적인 폐계 자신이지만서도.


병아리 때부터 좀 수다스럽기는 해도 영민했던 우리의 주인공은 뛰어난 말솜씨로 우리를 웃게 하고, 때론 눈물 나게, 안타깝게 그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폐계는 벨기에산 부화기 속에서 태어나 엄마 품이 아니라 공장에서 껍질을 깨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인간들이 짜놓은 사육 스케줄에 따라 주사부터 맞았다. 껍질을 깨고 나온 하루 만에 강원도의 한 양계장으로 팔려올 때 몸값은 700원.


어릴 적 집 떠날 때 건강하게 잘 살라고 백신 주사 맞추고, 새집 오니까 먼 길 오느라 욕봤다고 안정제 섞인 사료를 먹인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을 만큼 어릴 적부터 예의 바른 병아리였다. 또 이제부터 약값, 밥값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눈치도 빨랐다. 하긴 ‘닭장같은’ 닭장 안에서 달리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지만서도.


생후 4개월 만에 첫 산란을 하고부터는 세상 이치에도 밝아져 ‘양계산업 1원의 경제학’에 눈 뜨게 된다. 3만 마리의 산란계가 하루에 3만 개쯤 알을 낳는데, 1원 떨어지면 하루 3만 원, 한달이면 100여만 원을 손해 본다는 것이 1원 경제학의 요지다. 그래서 조상 때부터 사료는 적게 먹고 알은 크게 낳도록 개량됨을 이해하면서도, 주인님 입장에 서서 버스 값, 과자 값은 잘도 올리면서 달걀 값은 5년 내내 100원인 현실에 불만을 토로할 만큼 세상 보는 눈이 매서워졌다. …아무도 듣지 않는 닭장 안에서의 혼잣말이었다.


24시간 친구 닭들 틈에 낑겨 1년하고도 한달이 지났을 때, 계생 일대 최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왕겨 분말, 싸라기, 특수영양제 등 몸에 좋은 온갖 것을 챙겨 먹이던 주인님이, “자기가 먹지 않는 달걀을 어떻게 남에게 팔 수 있느냐.”던 우리 주인님이 밥을 안 주는 거다. 쉴 새 없이 알을 뽑아내느라 알이 점점 작아지고 껍질이 깨진다고 열흘이나 굶기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강제 환우(튼튼하고 굵은 달걀을 얻기 위해 강제로 굶기고 수면시간을 줄이는 일로 환우는 털갈이라는 뜻)!


깃털이 숭숭 빠지고 죽을 맛이었지만 이를 악 물고 버텼다.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고 돈을 내고 단식원에도 들어가는데 참아야지.”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단식이 막바지에 이르자 폭언을 퍼붓고 말았다. “어떤 인간이 이런 고약한 시스템을 생각해냈단 말인가! 그 자에게 산란계의 저주가 있을지니! 꼬꼬 꼬꼬 꼬꼬!!”


아…. 단식이 끝나고 열흘 만에 밥을 먹게 되자 이내 화는 풀렸다. “안줘서 못 먹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단식, 이거 대단한 건강법이네요.” 스무날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알은 더욱 굵어졌다.


아까시 향이 물씬 풍길 때 산란계들은 난생 처음 외출을 했다.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려는 거다. “마리당 500개가 넘는 알을 낳았고, 마지막 살 한점까지 드리려는 거예요.” 기구한 한평생, 강원도 양계장에서 난 21개월이 현실이었는지 악몽이었는지 어리벙벙하지만 이제부터 나를 대신해 알을 뽑아낼 후배들에게 할 말은 해야지. “나중에 털갈이할 때 힘들더라도 잘 참아야해~.”


바로 그때부터였다. 트럭 말고 포대에 담긴 우리 주인공을 포함한 몇 마리의 닭들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 건 말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어느 농장에 방사되어 멋진 수탉을 만나 난생 처음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고, 처마 밑까지 날아오르는 놀라운 일도 해낸다.


일본과 호주 이곳저곳에서 ‘닭도 행복하고 사람도 만족하는 공간, 인간의 경제적인 이익을 충족시켜주면서 닭들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좋은 예’를 찾아 제시하고, 400원짜리 달걀의 소중한 의미를 설명해준다. 과잉 경쟁 중인 주인님들과 가격 인상을 원하지 않는 고객님들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뽑아낸 달걀과 낳은 달걀의 차이를 알게 된 순간, 부끄럽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을까.


<야생의 충고-폐계, 부활하다>는 KBS 홈페이지 <수요기획>에서 다시 볼 수 있다(2004년 3월 24일자 방영). 저용량으로 올라 있어 거친 화면이 아쉽지만 만듦새가 훌륭하고, 내레이션이 쉽고 명료해 듣기에만 열중해도 좋다. 특히 아이들과 꼭 함께 보기를 ‘강추’한다. 닭의 일생은 물론, 식품이기 전에 살아 숨 쉬는 생명이었다는 사실과 생명체를 대접하는 태도를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망설임 없이 400원짜리 달걀을 선택했다. 그저 “약간의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에게 쾌적한 여건을 마련해주신다면 더 맛있고 건강한 달걀을 제공해드릴 수 있다.”던 폐계의 공약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이 어떤 달걀을 선택하는 지에 따라, 내가 어떤 상태로 사육되어질 수 있는 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폐계의 잔잔한 고백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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